“오늘날의 예술은 미학적 전통에서 표가 나지 않던 매체, 즉 사진과 비디오를 통해 공격적인 인체, 내막을 알 수 없는 인체 따위를 제시하고 있다.”

프랑스 미학자 이브 미쇼를 인용해본다. 미쇼의 파격적인 옛 주장은 당대 미술 현장의 중심에서 더는 새롭지 않다. 그렇다고 진부한 주장도 아니다. 제1회(1995년) 이후 15년의 내공이 축적된 광주비엔날레의 제8회 행사장도 미쇼의 진술을 되새김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광주비엔날레(11원7일까지)는 동시대 미술에 잠복해 있던 묵은 과제들, 스펙터클의 부재, 김빠지는 볼거리, 소재 고갈이라는 매체의 한계 따위를 유쾌하지만 고고학적으로 되짚되, 진솔하게 고백한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필시 우연의 일치이겠으나, 외국인 총감독을 처음 도입한 2008년 광주 때와 닮았다.

ⓒ뉴시스마시밀리아노 지오니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이 이데사 헨델레스의 〈파트너〉를 들고 있다.

지난 행사의 주제는 그해에 개최된 ‘유능한 전시회들’을 한자리에 늘어놓은 것이 전부였다(전시 타이틀은 그래서 〈연례보고〉였다). 그래서 ‘주제 없는 게 바로 주제’였던 행사 아니었나. 그게 무슨 미덕이냐 반문하겠지만, 이전까지의 광주비엔날레가 내건 타이틀은 도를 지나친 감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이미지 생산의 한 귀결일 수밖에 없는 동시대 미술을 과도하게 포장한 인상이 짙었다. 내놓을 게 동이 난 결과다.

반면 2008년과 올해 행사가 내건 주제와 전시 방식은 진솔한 자기 고백에 가깝다. 30권에 달하는 시인 고은의 연작 서사시의 제목 〈만인보〉를 그대로 딴 이번 비엔날레는 총감독 마시밀리아노 지오니의 해설처럼 이미지에 중독된 현대적 삶·미술에 맞춰졌다. 기존 행사 때보다 사진 매체의 비중이 높아진 이유다. 고은의 시가 그러하듯 광주비엔날레의 〈만인보〉 또한 애착의 대상을 이미지화해 소장하려는 현대인·미술의 줄기찬 욕구를 추적했고, 당대 미술이 직면한 위기감도 겸허하게 성찰했다.

테디 베어와 촬영한 3000장의 사진

신작으로 채워지기 일쑤인 디스플레이 방식도 20세기 초반 해럴드 애저턴이 고안한 초고속 조명 사진부터, 20세기 중반 황금기의 거물들을 거쳐 당대 신흥 주자까지 연대에 제약을 두지 않았다. 방대한 이미지 아카이브(기록 보관소)를 통해 미술이라는 명칭 아래 이미지가 생산자와 소비자의 욕망에 의해 어떤 전개도를 그렸는지 살핀 것이다. 개막 전부터 화제를 모은 수집가이자 기획자 이데사 헨델레스의 〈파트너(테디 베어 프로젝트)〉도 한 예다. 1900~1940년 사이 곰인형 테디 베어와 나란히 촬영한 3000장의 불특정한 사진을 꾸준히 수집한 그녀는 배당받은 전시 공간 전체를 그 사진들로 채웠다(곰인형과 사람이 나란히 등장하기 때문에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인물 사진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이번 전시의 주력 매체가 사진이고, 사진이 재현한 피사체의 거개는 (벗은) 인체이고 보니 두 개의 화두가 도출된다. 전문가보다 이미지를 능수능란하게 취급하는 동시대 익명적 비전공자 집단의 강한 압력과, 예술 창작의 동력으로 작동해온 인류의 보편적 관음증(과 그 양면성)이다. 순수예술만을 ‘영혼의 구원’이라 가치를 부여하던 때가 있었다. 여전히 축사로 애용되는 상투적 관용구다. 하지만 〈만인보〉는 영혼보다 육체의 가치에 주목해온 예술의 연대기를 증언한다.

ⓒ뉴시스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사진이 재현한 피사체는 거개가 ‘벗은 인체’이다.

19세기 뉴올리언스 사창가의 매춘부 누드만을 촬영한 E. J. 벨로크의 사진부터, 자전적 요소를 폴라로이드 사진에 담아 일렬로 나열한 현대 작가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의 르포르타주까지 다채롭다. 벨로크의 준포르노 사진은 B급 아마추어가 가진 취미의 산물처럼 보이는데, 세상팔방에 비밀리에 사사롭게 수행되는 ‘금도를 넘는’ 행위를 기록한 사진들의 총량은 지구 몇 바퀴를 돌고도 남을 것이다(벨로크의 작품 역시 그의 사후 발견된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제도권 예술과 비제도권 이미지 생산 사이의 격차와, 감상과 관음 사이의 완고한 이분법이 파괴되는 현실을 목격하고 수긍할 때 동시대 미술도 온전히 이해될 것이다.

미감의 한계치를 넘어선 과포화 상태의 이미지로 조형화를 꾀한 예술가 그룹도 많다. 정치와 문화의 관계에 관심이 지대한 스위스 출신 토마스 히르슈호른의 〈박힌 페티쉬〉는 ‘보호자의 지도가 필요한’ 작품에 속한다. 나사못이 촘촘히 박힌 기성 마네킹들의 머리 부위와 실제 엽기적인 사고 사진(머리가 박살 난)을 층층이 병치시킨 설치물이다. 구체화된 메시지의 적시보다는 ‘문맥 없는 시각 충격’에 호소한 작품 같았다. 그런데 관음의 원리란 뚜렷한 명분 제시를 유보한 원초적 본능이며, 이미지 생산·소비의 동력도 이 원인 모를 욕망에 의해 유도된다.

ⓒ광주비엔날레 제공프랑스의 장 포트리에가 전쟁 희생자들을 표현한 〈인질〉 연작 작품.

이번 광주비엔날레는 엽기 이미지와 관음증에서도 보편적 계보학을 들이민다. 히르슈호른의 작품 가까이에는 2차 세계대전 후 병리현상을 거친 화면으로 형상화한 타시즘(얼룩화로 불리는 추상표현주의의 한 갈래)의 거장 장 포트리에가 배치되었다. 개별 주제들 간의 유기적 관계를 살피려고, 미술사의 주요 사건들을 행사장에 예시하고 있다. 인체 모형의 언캐니한(기묘한) 인상을 보강려고 이제는 역사가 된 예술가인 존 드 안드레아, 한스 벨머의 인물상(혹은 인형)을 내세운 것이나, 자기 몰입적 수집 욕구의 근거로 앤디 워홀의 비공개 아카이브 작품을 구원투수로 내세운 것도 동일한 이치다.

이번 쇼를 이끈 총감독 마시밀리아노 지오니는 세상에서 가장 비좁은 1㎡의 비영리 갤러리 ‘롱갤러리(The Wrong Gallery:잘못된 화랑)’의 창립자다. 롱갤러리에서 출품한 폴 매카시, 티노 세갈 그리고 공동 창립자 마우리치오 카텔란을 이번 광주에서도 만날 수 있는 이유인가보다. 견고한 제도 예술을 향한 반어법을 이름으로 채택한 롱갤러리의 수장이지만(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 역사의 전개도를 편견 없이 한꺼번에 제시하고 싶었나보다.

기자명 반이정 (미술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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