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악몽이 현실이 된 상지대
  • 장일호
  • 호수 151
  • 승인 2010.08.10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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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낮 기온이 32도를 웃돌고 있었다. 폭염더위 속 그늘 한 점 없던 아스팔트는 이글거렸다. 찜통더위도 분노를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8월9일 오후 2시,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후문 앞 도로를 점거하고 주저앉아 있던 이승현 상지대 예술체육대학 학생회장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안 돼요. 정상화시키기 전에는 못 가요. 어떻게 만들어 놓은 학교인데. (결정하는 사람들) 학교 한 번 와보지도 않고. 이런 나라가 어디 있어요. 안 돼요, 제발…” 해산하라는 경찰의 경고방송에도 요지부동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교수들도, 학우들도 붙박이처럼 거리에 서서 한참동안 눈가를 훔쳤다. “민주사학을 지켜 달라”라고 외치던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경찰의 연행이었다. 이승현 예술체육대학 학생회장을 비롯해 학생 3명은 불법집회를 이유로 연행됐다. 

지난 15년간 상지대에 몸 담았던 정대화 교수(정치학)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삭발한 머리 위로 눌러쓴 모자 역시 고개와 함께 꺾였다. 정 교수는 상지대 정상화를 바라며 정부종합청사 앞 비닐 위에 몸을 뉘인 채 밤이슬을 맞았다. 사분위 결정이 나기 전까지만 해도 “사분위가 함부로 결정짓지는 못할 것이다”라며 짐짓 여유롭던 정 교수였다. 

   
ⓒ시사IN 장일호
옛 재단인사가 포함된 정이사 선임에 할말을 잃은 정대화 교수.
정 교수는 10여 년 전, 김문기씨와 독대한 자리에서 “용퇴하라”라며 맞섰던 추억담까지 늘어놨었다. 상지대에서 보낸 세월은 정 교수에게 고소와 고발의 연속이었다. 원주지검의 검사는 정 교수에게 “그만오라”라는 농을 건넬 정도였다. 사분위 발표 이후 정 교수는 “옛 재단의 시절의 ‘악몽’이 떠오른다. 귀신과 싸우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학생 이승현씨나 정대화 교수가 ‘설마’하며 여겼던 한여름 밤의 악몽이 현실이 됐다. 지난 1993년 사학비리로 물러났던 상지대 김문기 전 이사장이 17년만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날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는 상지대에 정이사 8명과 임시이사 1명을 선임했다. 사분위는 김문기 옛 상지대 재단 이사장의 둘째 아들 김길남씨를 포함해 옛 재단 인사 4명을 정이사에 선임했다. 언뜻 보면 옛 재단 인사가 과반수를 넘지 않기 때문에 학교 장악은 불가능해 보인다. 교과부는 애초에 명단에 포함 돼 있던 옛 재단 이사장인 김문기씨를 “학내 분규 당사자이기 때문에 선임에서 제외됐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학생·교직원·교수 등 구성원들은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하다고 반발했다. 이날 사분위가 과반수를 못 넘게 임명한 임사이사는 옛 재단 몫이다. 언제든 김문기 전 이사장 쪽 인사로 교체될 수 있다. 이번 결정은 옛 재단이 과반수를 넘는 시간만 늦춘 셈이다. 옛 재단의 상지대 장악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사분위원의 이같은 결정에 반발해 사분위원인 이장희 위원(한국외국어대 법학과)이 이날 회의 도중 사퇴했다. 상지대 부총장을 지낸 박병섭 교수(법대)는 “이 위원은 사분위 회의가 이사 선임에 대한 원칙이나 김문기 측의 자격논란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 대신 ‘몇 대 몇’에 대한 논의만 했다고 한다. 이 위원은 이 사건이 이명박 정부의 도덕성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라고 말했다. 

상지대학교 총학생회와 교수협의회 등으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는 “국민과 구성원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비리재단 복귀를 허용한 사분위의 결정은 전면무효로, 불복종운동을 벌일 것이다”라고 밝혔다. 비대위는 교과부 장관에게 재심 청구를 요청하는 것은 물론, 신임 이사진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등 법적인 방법도 검토하고 있다. 

   
ⓒ시사IN 장일호
'진압 당하는 민주사학' 사분위 결정에 반발해 교과부 앞 농성을 하던 상지대 학생들(위). 경찰이 강제해산에 나서자, 끌려가면서도 옛 재단 복귀 반대를 외치는 상지대 학생(아래)

김문기 전 이사장은 누구?

김문기 전 이사장은 1970년대 종로에서 ‘빠고다가구’점을 운영해 모은 재산으로 고 훤홍묵씨가 설립한 청암학원을 1974년 인수해 상지학원으로 바꿨다. 제5공화국 시절에는 민자당 국회의원으로 3선했다. 재임 당시 사위를 비서실장에, 매부를 부총장에 앉히는 등 족벌 경영으로 잡음이 그치지 않았다.

   
정이사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사실상 17년만에 상지대에 돌아오는 김문기 전 재단이사장
이사장으로 있던 1986년 용공조작 의혹 사건이 불거졌다. 당시 재단 퇴진 요구를 벌이던 학생들 사이에 ‘가자 북의 낙원으로’라고 적힌 유인물이 돌아 경찰이 조사를 벌였다. 1999년, 직원 김황일씨가 자신을 비롯한 본부의 소행이었다는 양심선언을 했다. 같은 해 12월 강원경찰청은 학교 쪽 교직원이 유인물을 제작 살포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1992년에는 한약재료학과 폐과 논란을 두고 분규가 심했다. 자격증 발급 요구와 함께 학과 학생들이 농성을 벌이자 4학년 대부분을 유급시키고 폐과 조처했다.

상지대 교수협의회 소속 30여 명은 1993년 3월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경제학과 박정원 교수의 재임용 탈락 조처가 학내 민주화에 앞장선 데 대한 보복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교육부 감사 결과 재임용 탈락 사유는 본부가 주장했던 연구능력 부족이 아니라 학교 기여도 등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사실 때문으로 밝혀졌다. 교육부는 평가기준의 객관성이 결여되었다며 새로 기준을 마련하라고 지적했다.

민자당 의원이던 1993년. ‘YS 개혁정치’ 일환으로 처음 이루어진 재산 공개 결과 부동산 투기와 재단 운영 비리 정황이 드러났다. 대검 중수부가 수사에 나서 그는 한의학과 부정입학 대가로 1인당 1억∼1억5000만원씩을 받아 챙긴 혐의로 구속되었다. 당시 김 전 이사장은 민자당 의원 가운데 가장 많은 450여 억원의
땅을 소유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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