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 자활을 위한 잡지 〈빅이슈 코리아〉입니다. 한번 보고 가세요!” 7월7일, 서울 지하철 3호선 고속터미널역 8번 출구 앞에서 ‘빅판(빅이슈 판매원)’ 남상욱씨(37)가 또박또박 외쳤다. 시민들은 남씨가 손에 높이 든 잡지를 한번, 남씨 목에 걸린 명찰을 한번씩 보고 지나갔다. 명찰에는 남씨의 이름과 사진이 크게 인쇄돼 있었다. 이렇게 남씨가 얼굴과 이름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놓기는 노숙 생활을 시작한 1992년 이후 처음이었다. 

지난 7월5일 〈빅이슈 코리아〉가 창간한 날부터, 남씨와 같은 노숙인 15명이 서울 주요 지하철역 인근에서 잡지 판매를 시작했다. 모두 면접과 교육을 마치고, ‘술을 마시고 판매하지 않는다’ ‘하루 수익의 50% 이상은 저축한다’와 같은 행동 수칙 10가지에 동의한 사람들이다. 창간 직후 이 ‘빅판’들은 3000원짜리 〈빅이슈 코리아〉 10권을 무료로 제공받았다. 공짜는 여기까지, 이제 직접 일을 해 돈을 벌어야 한다. 대신 10권을 다 판 종잣돈 3만원으로 잡지를 1400원에 사서 팔 수 있다. 한 권을 팔 때마다 1600원씩 이득이 생기는 것이다.

시작은 1991년 창간한 〈빅이슈〉 영국판이었다. 그 역시 노숙인 출신 존 버드 씨가 만든 이 잡지(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는 영국에서 노숙인 5000명을 자립으로 이끌었다. 이후 28개국으로 퍼진 〈빅이슈〉는 2010년 한국에도 상륙했다.
〈빅이슈 코리아〉 사업단에서는 기존의 노숙인 자립 지원 시스템을 한층 발전시켰다. 잡지 판매 권한에 더해, 15일간 꾸준히 활동을 한 ‘빅판’에게는 한 달간 고시원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주소지’가 생기면 다른 일자리도 구할 수 있다. 6개월간 고시원을 유지하며 안정적인 생활을 할 경우, 주거복지재단을 통해 임대주택에 입주할 기회도 주기로 했다.

ⓒ시사IN 조남진〈빅이슈 코리아〉 창간을 하루 앞둔 지난 7월4일 서울 인사동 쌈지길에서 전야제 행사가 열렸다. 직원들이 창간 준비호를 보여주며 잡지를 홍보했다.
“동정 아닌 재미에 호소하는 잡지 만들자”

〈빅이슈〉 판매는 하나의 ‘인정 투쟁’이다. 노숙인은 모두 게으르고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시민에게, 성실하고 친절하게 일하는 노숙인을 눈앞에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빅이슈 코리아〉 진무두 판매국장은 “우리나라에서는 노숙을 ‘사회적 자살’로 인식하기 때문에, 노숙인들은 자기 얼굴과 신분을 드러내는 걸 가장 어렵게 여긴다”라고 말했다. 매일 8시간 동안 명찰을 목에 건 채 번화가에 서 있는 빅판들은 그 어려움과 싸워 이긴 사람들이다.

빅판이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길에서 ‘구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하기 때문이다. 구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파는 물건이 제 값어치를 해야 한다. 한국을 방문한 〈빅이슈〉 창립자 존 버드 씨가 내내 강조한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지금 창간 10주년을 넘긴 영국의 〈빅이슈〉는 슬럼프에 빠져 있다. 잡지를 사는 사람 4명 중 3명은 잡지를 가져가지 않고 판매원에게 돈만 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생기면 안 된다.”

〈빅이슈 코리아〉를 만드는 사람들도 결코 동정심에 호소할 생각이 없다. 불쌍해서가 아니라 읽고 싶어서 사는 잡지를 만들기 위해, 직원 10명과 여러 프로보노(재능기부자)가 머리를 맞댔다. 노숙인 출신 모델이 직접 표지를 장식한 창간호에는 사회적 기업가 특별 대담이나 홈리스 월드컵 소식 같은 ‘사회적’ 기사부터 여름휴가 가이드와 조니 뎁 인터뷰(빅이슈 영국 북부판 제공) 같은 ‘오락적’ 기사까지 골고루 담겼다.

하지만 한국에서 〈빅이슈〉를 파는 노숙인들은 아직 동정조차 받기 힘들었다. 7월7일 서울 고속터미널역 앞에서 〈빅이슈〉를 팔던 빅판 남상욱씨는 오후 1시 즈음 판매를 접어야 했다. 경비원이 “여기에서 상행위를 하면 안 된다”라며 쫓아냈기 때문이다. 창간 이전, 판매국 직원들이 판매 지점의 인근 상인에게 일일이 협조를 구하러 다녔지만 고속터미널, 신세계백화점, 센트럴시티 등 이해관계자가 여럿인 이곳에서는 문제가 간단히 풀리지 않은 것이다.

판매 제재를 받은 남씨가 판매국 직원을 기다리는 동안, 역 안에는 “거동이 수상한 사람이 상행위를 하는 경우 즉시 신고해주십시오”라는 안내 방송이 여러 번 흘러나왔다. 다음 날부터 판매처를 종로3가역 앞으로 옮겨 다시 일하기 시작했지만, 전날 남씨를 쫓아내던 경비 반장의 한마디는 내내 남씨의 가슴을 후볐다. “예전에 여기에서 노숙인들끼리 싸움 붙어서 살인도 나고 그랬는데, 또 노숙인이 여기 있으면 안 되지….”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