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선 진출국 리스트를 쭉 훑어본다. 꼭 챙겨볼 경기를 정해야 한다. A조에는 멕시코와 프랑스가 있다. 유로 2004나 2006년 월드컵 때까지만 해도 무조건 1순위로 챙겨야 했던 팀이 프랑스지만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C조의 잉글랜드는, 뭐 상관없겠지. E조가 제대로다. 네덜란드·덴마크·일본·카메룬. 일본을 제외한 세 팀을 다 봐야 하니 꼼짝없이 전 경기 시청이다. H조. 가장 열심히 들여다봐야 할 스페인이 있다. 이번 월드컵에서는 이렇게 예닐곱 팀 경기를 챙겨야 한다. 이 정도면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체코와 러시아가 예선에서 탈락해준 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Reuter=Newsis클럽 서포터에게 ‘나의 팀’이란 응원하는 클럽팀이지 국가대표팀이 아니다.

이제 이 팀들의 조별 리그 탈락을 두 손 모아 기원하며 경기를 본다. 승리에 탄식하고 패배에 환호하며 좀 희한한 방식으로 월드컵을 즐긴다. 아무리 그래도 스페인의 탈락을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겠지? 조별 리그에서 살아남은 팀이라면 다시 16강 탈락을 기원해본다. 하지만 그 이상이라면, 차라리 우승해버려.

클럽 서포터는 ‘클럽 에이스’가 빨리 쉬기 바라

국가대표 축구 경기에는 도무지 관심이 가지 않는, 뼛속까지 클럽팀 서포터로만 축구를 즐기는 내가 월드컵을 보는 법은 대충 이렇다. 내가 응원하는 클럽팀 선수들 경기만 챙겨보기. 위에서 꼽은 일곱 팀에서 ‘내 새끼들’이 국가대표로 뛴다. 잉글랜드 대표로 간 선수는 주전 확보가 좀 의심스럽고, 우리 팀 에이스는 스페인 대표다. 우리 팀 왼쪽 날개이자 러시아 대표팀 에이스는, 러시아가 월드컵에 탈락한 직후 축구하기 싫다고 잠시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클럽 서포터에게 ‘나의 팀’이란 응원하는 클럽팀이지 국가대표팀이 아니다. 축구란 8월에 시작해서 5월에 끝나는 걸로만 알고 있는 유럽 리그 클럽팀 서포터에게, 월드컵이니 유로니 하는 한여름의 이벤트는 그리스에서 축구를 새벽에 하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한창 선수를 사고팔며 다음 시즌 구상을 하고 있을 ‘입축구’의 시기에 난데없는 ‘진짜 축구’라니. 그저 다치지 않고 얼른얼른 탈락해서 하루라도 더 쉬길. 여름에 제대로 못 쉬면 그 시즌 중 언제고 반드시 탈이 난다. 어디 보자, 그렇게 말아먹은 시즌이 몇 번이더라. 어차피 못 쉴 거면 차라리 우승해서 경험이라도 쌓고 오길. 2008년에 스페인산 우리 에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너무 잘해서 눈에 띄어도 곤란하다. 레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같은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있는 팀이 내 새끼들에 관심 갖는 거, 웬만하면 사양하고 싶다. 역시 조별 리그 탈락이 속 편한 결론이다. 아니 애초에, 나이가 들어서든 감독이랑 싸워서든 축구협회가 대표팀 수당을 떼어먹어서든 간에, 선수가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면 무조건 두 손 두 발 다 들고 환호하는 게 클럽팀 서포터란 족속이다. 그 나라 축구 팬 심정이야 내가 알게 뭐람.

못해야 하는 선수는 또 있다. 우리 팀 감독이 관심을 보이는, 그래서 여름 이적시장에서 데려올 가능성이 있는 선수가 월드컵에서 날아버리면, 그게 또 곤란한 일이다. 월드컵과 같은, 주목도는 높지만 표본이 매우 적은 단기전에서의 대활약은 때로 선수의 몸값을 불가사의한 수준으로 올려버린다. 이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 하면…, 관두자. 서포터는 자기 팀 감독을 닮게 마련이라더니, 이건 우리 짠돌이 감독 입버릇 아닌가. 아무튼 브라질의 미드필더 한 명이 하필 6월에 컨디션이 바닥이길 바라며, 브라질 경기도 체크리스트에 올려야겠다.

자기 동네 클럽에 대한 충성심이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축구란 원래부터 그런 경기였다. 그건 차라리 일종의 계급 의식이었고, 매주 축구장을 찾는 건 일종의 제의(祭儀)였다. 1890년 육체 노동자의 도시 선덜랜드 시가지 행차에 나선 영국 황태자는 선덜랜드(지금도 프리미어리그에 있는 그 축구팀이다)의 홈경기 날짜를 피하는 센스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구경꾼을 2000명밖에 못 모으는 이례적인 ‘흥행 참패’를 겪었다. 평생 언제 볼지도 모를 황태자를 제쳐두고 매주 있는 축구를 보러 몰려간 숫자는 그 열 배인 2만명. 황태자 잘못이 아니다. 100년도 더 전부터 이건, 기독교인이 일요일이면 교회를 가듯 토요일마다 습관처럼 찾게 되는 그런 게임이었다. 4년에 한 번씩 한 달에 60경기를 몰아 치르면서, 평소에는 있지도 않은 팀에 대한 로열티를 국가와 민족과 이동통신사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건 아무래도 내 취향은 아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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