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환호에 묻히는 패자의 ‘상처’
  • 육성철(전 <신동아> 기자)
  • 호수 140
  • 승인 2010.06.2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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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프랑스 월드컵 직전이다. 프랑스 최대 항공사 에어프랑스는 근로조건 향상 등을 내걸고 장기 파업에 돌입했다. 버스와 가스 등 국가 기간산업도 연쇄 파업에 들어갔다. 자칫 프랑스에서 60년 만에 열린 월드컵이 파행으로 치달을 위기였다. 그러나 언론이 일방적으로 노동조합을 매도하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시민들도 파업으로 인한 불편을 묵묵히 참아냈다. 프랑스 파리에서 월드컵은 ‘그냥’ 월드컵일 뿐이었다.
4년 뒤 2002 한·일 월드컵이 열렸다. 한국이 경기를 벌이는 날마다 수백만 명이 거리 응원을 펼쳤다. 그러나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 시위는 철저히 차단됐다. 경찰이 월드컵 기간 중 금지 통고한 집회 건수는 1년 전보다 362% 증가했다. 헌법재판소가 폭넓게 허용하라고 결정한 1인 시위조차 제지됐다.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시민의 합법적 권리는 무시됐다. 대한민국에서의 월드컵은 ‘그냥’ 월드컵이 아니었다.

월드컵은 세상을 춤추게 한다. 심지어 국가의 명운을 좌우한다. 인접 국가인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축구 때문에 실제 전쟁을 벌였다. 양국은 1970 멕시코 월드컵 북중미 예선전에서 맞붙었는데 응원단의 유혈 난투극이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다. 축구에서 엘살바도르가 승리하자 온두라스는 무력 침공을 감행했다. 두 나라는 아폴로 11호가 발사되는 순간 잠시 휴전했다가 우주선이 지구 궤도를 벗어나자 다시 전쟁에 들어갔다. 축구에 이어 전쟁까지 패했던 온두라스가 이번 남아공 대회에 출전한다. 전쟁 이후 두 번째다.

   
ⓒReuter=Newsis
축구 스타 리오넬 메시의 연소득은 230억원이 넘는다. 그러나 월드컵 공인구를 만드는 노동자(위)의 월급은 200달러가 안 된다.

한국은 남아공 월드컵에서 B조에 속했다. 그리스를 시작으로 아르헨티나·나이지리아와 차례로 격돌한다. 세 경기에서 최소 1승1무를 거두어야 16강 진출을 바라볼 수 있다. 승패를 떠나 네 나라가 걸어온 길을 더듬어보는 것도 이번 월드컵의 감상 포인트 중 하나다. 때로 축구는 축구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한국과 맞서는 나라들의 ‘속사정’

아르헨티나는 1978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을 제패했다. 그러나 이날의 승리는 월드컵 역사에 오점으로 남아 있다. 당시 비델라 군사정권은 무자비한 테러와 고문을 자행하면서 국민의 불만을 무마하는 데 월드컵을 이용했다. 그러자 네덜란드의 축구 영웅 요한 크루이프는 “학살자들의 손에 묻은 피를 닦아주러 가지 않겠다”라며 대회를 보이콧했다. 비록 네덜란드가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에 석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네덜란드 인들은 결코 크루이프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 무렵의 일이다. 한국이 낳은 축구 스타 차범근은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했다가 되돌아오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국보급 선수를 해외로 넘길 수 없다는 국민 정서의 중심에는 비델라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박정희 정권이 있었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봉쇄하며 군사정권이 홍보용으로 개최한 축구대회가 바로 박스컵 또는 박대통령컵이었다. 웃지 못할, 불과 한 세대 전의 일이다.

그리스는 최근 세계 자산가를 공포에 떨게 했던 유럽발 경제 위기의 진원지다. 방만한 재정지출과 무분별한 외채 도입으로 국가가 부도 위기에 직면했다. 1997년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국제통화기금(IMF) 원조를 받기에 이르렀다. 치솟는 청년실업률과 시위대에 대한 과잉 대응도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다만 한국인들이 나라 빚을 갚겠다며 금 모으기에 나섰다면, 그리스 인들은 여전히 저축보다 소비에 치중한다. 한국에서 외환위기의 고통이 사회 약자에게 고스란히 전가된 것과 달리 그리스에서는 이 와중에도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현 대통령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다. 남편 네스토르 키르츠네르에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세계 최초의 부부 직선 대통령으로 기록돼 있다. 아르헨티나도 모라토리엄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와 비슷하다. 국가가 위기로 치닫는 상황에서도 전·현직 대통령 부부의 재산은 계속 늘어나 언론의 빈축을 산다. 불법 치부 논란, 부동산 거래 의혹, 해외 재산 소유 등도 한국인에게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나이지리아에서는 내전이 한창이다. 1999년 이후 집계된 분쟁 희생자만 1만명이 넘는다.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10여 차례 쿠데타가 발생했고, 2004년에는 종교 분쟁으로 국가 비상사태까지 선포됐다. 나이지리아는 미국의 최대 석유 공급원으로 파격적인 군사 지원을 받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석유를 팔아 사들인 무기가 내전을 확산시키는 악의 축이다.

대통령이 신병 치료차 3개월씩 해외에 머무르는 사이 부통령이 내각을 해산한 나이지리아. 한국은 바로 그 나라와 16강 진출을 가리는 B조 예선 마지막 경기를 치른다.
축구광들이 4년마다 축제를 즐기는 동안, 축제에 초대받지 못한 수많은 이의 삶은 잊히거나 왜곡된다. 승자의 환호 속에 패자의 상처는 조용히 묻혀버린다. 세계 최고의 축구 스타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가 1년에 2000만 달러(약 230억원)를 버는 동안, 월드컵 공인구를 만드는 동남아시아 노동자의 월급은 채 200달러(약 23만원)가 안 된다. 남아공 월드컵 공인구 ‘자블라니’는 남아공의 11개 공용어 중 하나인 줄루어로 ‘축하한다’는 뜻이다. 누가 무엇을 축하할 것인지, 자블라니는 답을 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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