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키퍼를 제외한 필드 플레이어들은 인간의 진화를 추진해온 손을 사용할 수 없다. 축구는 손을 사용할 수 없는 거의 유일한 구기이다. 그래서 축구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다른 구기에 비해 정교한 쾌감이 결여된 매우 불완전한 게임이다. 90분 동안 양 팀 선수 스물두 명이 사력을 다하고도 단 한 골을 얻지 못할 수도 있는 허망함이 여기에 있다.    
  
732×244cm 규격의 골대 안으로 둘레 70cm 무게 450g의 가죽 공을 넣으면 되는, 지극히 단순한 룰을 지닌 종목. 그러나 이제 축구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지구상의 모든 갈등과 감동이 축약된 축구는 4년마다 세계를 하나의 종교로 묶는다.
세계 축구의 최강자를 가리는 월드컵은 단일 종목의 대회이면서도 34년이나 먼저 시작한 올림픽의 아성을 넘어선 지 이미 오래이다. 1904년 창립할 당시 고작 7개국이었던 국제축구연맹(FIFA)의 회원 국가는 유엔 혹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보다도 많은 208개국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든 신생 국가는 FIFA에 가입하는 것으로 독립국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한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연합뉴스축구는 22명이 축구공을 골대 안으로 밀어넣는 단순한 경기이다. 그러나 이제 축구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미국에서 축구가 인기 없는 이유

우리는 아니 세계는 왜 축구에 열광하는가? 이 열광에 예외적인 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스포츠 산업의 중심지인 미국뿐이다. 이들은 아마추어 선수로 구성된 자신의 대표팀이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 종주국으로서 오만을 부리다가 처음으로 참가한 잉글랜드를 1-0으로 꺾는 월드컵 역사상 최대 이변을 연출했을 때조차도 심드렁했다. 미국은 우리보다 한 차례 더 많은 본선 진출 기록을 가진, 서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지역에서 여전히 톱클래스 실력을 지니고 있지만 축구에 열광하는 정도에서는 세계의 외딴 섬과도 같은 존재이다. 미식축구와 야구 그리고 농구와 아이스하키 같은 프로 스포츠가 일상화한 미국인에게 45분씩 쉬지 않고 운동장을 뛰어다니지만 골은 별로 터지지 않는 축구는 미개한 엔터테인먼트로 보였을 것이다.

미디어 산업의 관점에서 보자면 축구는 굉장히 비효율적인 콘텐츠이다. 일단 쉬는 시간이 한 번밖에 없기 때문에 야구처럼 광고를 많이 붙일 수 없다. 그리고 스타 플레이어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기 어렵다. 공격 면에서는 언제나 화면을 장악하게 되는 미식축구의 쿼터백이나 수비 시간에는 거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야구의 에이스와 달리 펠레 같은 축구 황제조차도 경기 중에 화면에 등장하는 비율은 너무 낮다. 물론, 당연히도, 이유는 더욱 본질적인 곳에 있다. 어쩌면 미국이 축구를 소외시키고 축구로부터 소외당한 것은 세계의 나머지 지역이 축구에 열광하는 것과 긴밀한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축구는 이미 19세기 때(위)부터 가장 원시적이면서 민중적이고 공동체적인 경기였다.

축구는 가장 원시적인 단계에서부터 민중적이고 공동체적인 경기였다. 이러한 성격은 도시화와 공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던 19세기 유럽 사회에 이르러 하층 노동자 계급의 문화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하지만 축구의 주도권은 여전히 이튼스쿨 같은 귀족 명문사학이 쥐고 있었고, 노동자 클럽팀은 그들이 1848년 혁명과 1871년 파리 코뮌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 귀족과 부르주아 학교 팀에게 번번이 패배했다.

그러나 운명의 1883년 3월31일,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 클럽 블랙번 로버스는 영국 FA컵 결승전에서 전해의 비참한 패배를 딛고 이튼스쿨에 2-1로 승리를 거둠으로써 전 노동자 계급에 뜨거운 감격을 안겨주었다. 이 경기를 분수령으로 축구는 노동자 계급의 깃발이 된다. 랭카셔와 요크셔 지역의 철도 노동자들을 기반으로 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같은 수많은 노동자 축구클럽이 현실에서의 억압과 패배를 보상해주기 시작했고, 그것은 리버풀의 안필드나 밀라노의 산시로 경기장에서 익히 볼 수 있는 선수들과 일체화한 서포터스의 응원 문화로 승화한다.

유럽 각국 축구 리그의 역사는 이렇게 억압과 소외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자기 표현 욕망이라는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고,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상상력은 제국주의의 확산 통로를 따라 세계의 식민지 지역에 다양한 형태로 전파되기에 이른다. 식민지 민중은 축구를 통해 민족자결을 향한 욕망의 축제적인 흥분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식민지 조선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1986년부터 무려 일곱 차례나 연속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대한민국은 1954년 첫 출전을 포함해 어느덧 세계에서 열아홉 번째로 월드컵 본선에 많이 진출한 나라가 되었다. 이는 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 전 대륙을 통틀어 단연 첫손에 꼽히는 기록이다. 

1954 월드컵 예선에서 한국은 일본에 5-1의 감격적인 역전승을 거두고(맨 위), 스위스 월드컵에 출전한다(위).
그러나 월드컵에 참가하기 훨씬 전부터 축구는 단연 한국의 국기였다. 국내의 인기도만을 본다면 축구는 고교야구부터 프로야구에 이르는 강고한 프랜차이즈 인프라를 지닌 야구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게다가 야구는 올림픽에서 우승까지 거두었다. 그런데도 평소에는 K리그에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던 사람들조차 축구 국가대표팀을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데 아무런 장애를 느끼지 못하며, 심지어 자신을 ‘붉은 악마’로 생각한다. 

한국, 축구로 일본 콤플렉스 벗어나

대한민국의 대다수 구성원은 축구를 통해 민족주의 유전자를 무의식 중에 공유한다. 1926년 10월 춘사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되어 식민지 대중의 민족 의식을 암묵적으로 나누던 바로 그 시점에, 불교청년회 축구단을 모태로 한 조선축구단이 일본 원정에서 8전 무패(5승3무)의 압도적인 전적을 거두면서 한반도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마이너리티의 승리라는 카타르시스를 감격적으로 경험한다. 이렇게 축구는 순식간에 한반도의 심장으로 진군한다.

독립국가 자격으로 처음 출전한 1948 런던 올림픽에서 중미의 강호 멕시코를 5-3으로 꺾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포신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은 1954년 전후의 폐허에서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놓고 A매치로 처음 만난 일본을, 그것도 반일을 국시로 내세우던 이승만 정부의 고집 때문에 도쿄에서 두 게임을 모두 치러야 하는 악조건 속에서, 일본에 지면 어떡할 것이냐는 경무대의 포기 종용에 대해 ‘일본에 패배한다면 대한해협을 다시 건너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메이지진구 구장에 도착한 한국 대표팀은 일본의 나가누마에게 선제골을 내주고도 안경 낀 윙어 정남식의 두 골과 아시아의 스트라이커로 발돋움하게 되는 최정민의 두 골을 포함해 5-1의 감격적인 역전승을 거둔다. 

ⓒ사진공동취재단한·일 월드컵에서 세네갈 선수들(위)이 자신들을 식민 지배한 프랑스를 꺾고 즐거워하고 있다.
적어도 정서적인 측면에서 한국은 자신을 모욕하고 유린했던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로부터 통쾌하게 벗어난다. 야구가 일본을 이기게 되는 것은 홈에서 열린 1963년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에 와서야 이루어진다.
넬슨 만델라는 말했다. “우리는 축구를 통해 저항과 단결을 도모했다”라고. 그것은 케이프타운 앞바다의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 로벤섬만의 얘기가 아니라, 20세기 이후 분열과 반목으로 혼란스러웠던 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 전반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2 한·일 월드컵 개막전에서 상대편의 식민지였던 세네갈이 전 대회 우승팀이기도 했던 프랑스를 역시 식민지 경험을 지닌 한국의 상암경기장에서 꺾은 것은 세계 축구사에서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축구는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강자들의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1930년 이래 열여덟 번이나 월드컵이 열렸지만 서유럽의 네 나라와 남미의 세 나라만이 우승 경험을 나눠가졌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실질적인 전력으로는 4강급으로 평가받던 아프리카 강호들은 판정의 불이익과 유럽 강국들의 은밀한 담합으로 8강 문턱을 아직 넘어서지 못했다. 다만 위안이 되는 것은 독일·이탈리아·프랑스·영국 같은 서유럽 맹주들이 서유럽 이외 지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는 단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 이제 아프리카 남단에서 처음으로 월드컵이 열린다. 이번 월드컵이 제3의 대안적 흐름의 물꼬를 트는 분기점이 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축구의 전 지구화가 진정한 상생과 공존으로 진화하는 역사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펠레가 말한 것처럼 축구는 아름다운 게임이다. 그러나 황제의 이 말을 조금 수정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축구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게임이다.

기자명 강헌(음악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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