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차곡차곡 쌓아 담은 방랑기
  • 변진경 기자
  • 호수 142
  • 승인 2010.06.04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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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기 전, 짐을 꾸리고 정보를 모으는 것만큼이나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 올해 출간된 여행 에세이 가운데 여행자의 마음가짐을 갖추는 데 도움을 줄 만한 책을 모아봤다.
멀리 여행을 가기로 했다. 무엇부터 할까? 여행사에 전화해 싸고 좋은 패키지 상품을 알아볼 수도 있고, 인터넷에 접속해 관광 명소를 스크랩해보거나, 여행 가이드북을 사서 숙소와 맛집을 정리해둘 수도 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독서를 하는 건 어떨까.

많은 사람이 여행의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 여행서를 펴냈다. 그 가운데에는 본 것과 먹은 것에 대한 정보를 단편적으로 늘어놓아 실용 가이드북과 경계가 모호한 책도 있고, 자기애가 철철 넘치는 사진과 짧은 글귀로만 채운 일기장 같은 책도 있다. 하지만 ‘떠나려는 자’들을 사색에 잠기게 만드는 좋은 책도 많다. ‘여행서’라기보다 ‘방랑기’에 가까운 이 책들은 서점 속에서 때로는 여행 가이드북 사이에 섞여, 때로는 인문사회 분야 책장 어딘가에 꽂혀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20년 동안 여행하는 삶을 살아온 이지상씨가 쓴 <언제나 여행처럼>(중앙북스)은 ‘나는 왜 떠나려고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다. 평범한 샐러리맨에서 세계를 떠도는 방랑자로 삶의 방향을 바꾼 저자는 막스 베버와 게오그르 짐멜, 질 들뢰즈 같은 학자들의 이론을 틀로 삼아 자신의 여행과 삶을 분석했다. 그래서 여행을 예찬하는 대신 ‘여행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이들에게 힘을 주고자’ 했다.

   
ⓒ뉴시스
사람들은 ‘지금, 여기’를 부정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사진은 이집트 카이로 서남쪽의 리비아 사막에 펼쳐진 흑사막 언덕을 오르는 여행자들.
일본 사진작가 후지와라 신야도 <티베트 방랑>(작가정신)에서 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의 여행기를 전했다. 15년가량 인도·티베트·중근동·유럽·미국을 떠돈 저자의 이야기에서는 ‘여행의 흥분’ 대신 ‘방랑의 고독’이 절절히 묻어난다. 1982년 일본에서 나온 <티베트 방랑>은 1995년 한국에서 첫 출간된 이후 지난 5월10일 한국에서 재출간됐다.

고독한 방랑자가 가족을 꾸리면 평범하게 정착하고 말까? 최근 많이 나오는 ‘가족 방랑기’들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여행 전문 출판사 ‘론리 플래닛’을 만든 토니 휠러와 모린 휠러 부부는 <론리 플래닛 스토리>(안그라픽스)를 통해 부부가 함께 여행의 열정을 즐기는 사례를 보여준다. 혼자 가던 히말라야를 결혼 후 신혼여행으로 다녀온 이야기를 쓴 책 (<허니문 히말라야>(한승주·황소자리))도 있고 미혼 때 다니던 여행의 맛을 잊지 못해 43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세계일주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미친 가족, 집 팔고 지도 밖으로>(이정현·글로세움))도 있다.

하나의 주제에 따라 세상을 떠도는 ‘테마 방랑기’도 최근 트렌드 중 하나이다. 가장 인기 있는 주제는 바로 ‘책’이다. <길 위에서 책을 만나다>의 저자 노동효씨는 “세상은 한 권의 책이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나침반 삼아 ‘독서 여행’을 떠났다. 저자는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역 광장에서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를, 인도 보드가야 하리옴 레스토랑에서 라즈니시의 <틈>을, 네팔의 히말라야에서 윌리엄 어니스트 보먼의 <럼두들 등반기>를 다시 만나면서 ‘길들이 읽어주는 문장을 들었다’.

<굴라쉬 브런치>(북노마드)에선 번역가 윤미나씨가 동유럽 국가들을 돌아다니며 보후밀 흐라발과 슬라보예 지젝의 책을 다시 읽었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책세상)에서는 평생 니체 연구에 매달린 철학자 이진우씨가 니체의 사상과 삶이 흩뿌려진 베를린, 라이프치히, 질스마리아, 로마 등지를 떠돌아다닌다. 특히 소설가 서진의 여행 에세이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푸른숲)는 ‘책’과 ‘방랑’의 조합이 절묘하게 이루어진 예이다. 저자가 실제 뉴욕 51개의 서점을 ‘어슬렁거린’ 이야기에, ‘북원더러(Book Wonderer)’ 3명이 자신이 원하는 책을 찾아 도시를 방랑하는 가상의 이야기를 더했다. 

방랑은 취향을 따른다. 어떤 사람들은 개나 고양이의 발자국을 따라 떠돈다. <유럽에서 개를 만나다>(원유진·다인북스)와 <파리의 숨은 고양이 찾기>(장원선·랜덤하우스), <고양이, 만나러 갑니다>(고경원·아트북스)와 같은 책에서 그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극한의 상황에서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달리기 여행을 떠난다. <나는 오늘도 사막을 꿈꾼다>(김효정·일리)와 <하이 크레이지>(유지성·책세상)에는 사막·오지 레이서들의 독특한 방랑기가 담겨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방랑’을 이끄는 가장 큰 힘은 ‘방황’이다. 삶에 지친 이들일수록 방랑이 길어지고 깊어진다. 무명 시나리오 작가 혹은 백수로 지냈고 9년간의 결혼 생활을 이혼으로 끝낸 김정화씨는 집 전세금 3500만원을 빼서 세계 일주를 떠난 이야기를 <여행의 여왕>(큰솔)에 적었다. 고 김동리 작가의 세 번째 부인이자 소설가인 서영은씨는 신춘문예 심사를 하다 문득 삶의 회의가 느껴져, 유언장까지 써놓고 비장한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다(<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문학동네)).

“여행에서도 일상의 잡동사니를 만난다”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지금, 여기’를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티베트 방랑>의 후지와라 신야는 “저마다 고유의 지층 연대 위에 사는 지구의 다양한 공간들을 옮겨 다니면 ‘타임 슬립’이 가능”하기에 여행을 다닌다고 했고, <언제나 여행처럼>의 이지상도 “‘멍 때리는’ 여행자들과 같이 앉아 유유히 흘러가는 갠지스 강을 보며 이 생(生)과 저 생의 경계에 앉은 몽상가가 될 때, 내 존재는 무한히 확장되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방랑자들은 여행 역시 일상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책에서 고백하기도 한다. 존경의 대상이었던 티베트 승려들이 사실은 “잠이 덜 깬 얼굴로 독경을 외고 나서는 온종일 빈둥빈둥 놀거나, 모자란 잠을 보충하느라 절 방에서 앉아서 졸고, 버터를 듬뿍 넣은 소금차나 설탕차를 하루에 스무 잔이고 서른 잔이고 번갈아가며 마시는” 사람들임을 알고 실망한 후지와라 신야는 <티베트 방랑>에서 말한다. “원경이 중경이 되고 다시 근경이 되고 결국 그 원경에 도달했을 때, 익히 보아온 일상의 잡동사니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여행 계획에 들뜬 이에게 가장 필요한 건 이런 ‘마음의 준비’일지도 모른다.

올해 출간된
여행 에세이 가운데
여행자의 마음가짐을
갖추는 데
도움을 줄 만한
책을 모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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