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이 떨어지고 있다. 부동산의 ‘리트머스 시험지’인 강남 집값이 1000만원 단위로 뚝뚝 떨어지면서 거래가 실종되었다. 여느 때처럼 일시적 등락은 아닌 것 같다. 시각에 따라 하향 안정화니, 대세 하락이니, 거품 붕괴니 진단이 엇갈린다. 이유 역시 분분하지만 “이미 오를 대로 올랐다” “가계부채가 한계에 도달했다” “거시경제의 불안 속에 심리가 얼어붙었다” 따위 지적은 공통된다. 이명박 정부의 ‘의지’적 요인도 있다. 보금자리주택 정책이 집값 하락의 도화선 구실을 하고 있다거나, 청와대가 금융 규제를 풀지 않고 버티고 있다거나 하는 얘기들이다.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부동산 열풍 속에서는 강도가 세도 효과가 적지만, 시장이 불안하면 약간의 규제를 해도 세게 반응한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운이 좋은 편이다”라고 말했다.

출범하면서부터 규제를 확 풀면서 ‘강부자’ 정권의 면모를 드러냈던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기조가 달라진 건 지난해 9월을 전후한 시점. 8·15 경축사를 통해 “획기적인 주택정책을 내놓겠다”라면서 보금자리주택 60만 채 공급안을 내놓았고, 강남 재건축 아파트를 중심으로 집값이 너무 오르자 은행권의 총부채상환비율(DTI)과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을 수도권과 제2 금융권으로 확대 적용해 시장을 조였다.

ⓒ청와대사진기자단2007년 ‘건설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노무현 전 대통령. 노 전 대통령은 임기 말 이명박 당선자에게 부동산 정책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일관성을 유지해달라는 뜻에서 책 〈대한민국 부동산 40년〉을 선물했다.
‘업자’들은 보금자리주택이 주변 시세에 비해 20∼50% 싸기 때문에 민간 분양 시장이 얼어붙었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보금자리주택이 사실상 분양가를 낮추는 ‘분양가 상한제’ 효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보금자리 정책은 이명박 대통령이 ‘20년 지기’ 이지송 토지주택공사 사장(전 현대건설 사장)과 호흡을 맞추며 직접 챙기고 있다. 정부·여당 내 반발도 있지만, 청와대 측은 서민 정책이라는 명분으로 ‘표’도 사고, 일자리 창출과 경기부양 효과도 누리는 일석삼조의 정치적 효과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공염불’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홍헌호 연구위원은 “정부가 올해 보금자리 공급 계획을 18만 호라고 밝혔지만 실질적인 보금자리는 7만7000호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부터 공급해오던 국민임대주택·영구임대주택 등이다”라고 지적했다. 또 2차 보금자리주택 분양값이 1차에 비해 올랐고, 지역에 따라서는 주변 민간 주택 시세와 비슷하거나 더 비싼 경우가 나타나고 있어 건설족의 압력이 통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 밖에 그린벨트 훼손과 미분양 적체 등 공급 과잉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의 보금자리 정책은 ‘반값 아파트’라는 친서민 프레임으로 “강남 불패 신화 무너뜨리다” “노무현이 못 잡은 집값 이명박이 잡는다”라는 식의 호의적인 시선을 받고 있다.

노무현, 왜 집값 못 잡았나

“강남이 불패면 대통령도 불패다”라는 언명이 상징하듯, 노무현 정권은 5년 내내 부동산과 싸웠다. 적게는 여덟 번, 많게는 30여 차례의 부동산 정책을 발표하며 세제·금융·공급 전방위에서 세계 각국의 경험을 거의 모두 망라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급도 만만치 않았다. 5년간 국민임대주택 50만 호 건설(35만 호 달성) 안을 내놓아 역대 정부 최고치를 자랑했고, 택지 공급량은 1992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매번 ‘부동산 불패’가 반복되다보니 “과연 부동산을 잡겠다는 의지가 있었나”라는 오해와, 심지어 ‘투기 조장 세력’이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단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동산 핵심 참모였던 김수현 교수(세종대 도시부동산 대학원)의 말처럼 “집값이 너무 올랐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일국 단위의 정책을 압도할 세계 경제 상황과 아울러 빌미를 제공한 주체 요인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연합뉴스2008년 은평뉴타운 건설 현장을 둘러보는 이명박 대통령(사진 가운데).
객관적 요인은 두 가지다. 이른바 ‘전 정부 설거지론’이다. 노무현 정권은 들어서자마자 카드채 위기(2003년)와 신용불량 위기(2004년)를 겪으면서 부동산을 잡기 위한 정책 수단으로 금리 인상을 사용할 수 없는 처지였다. 금리를 인상하면 다수의 서민 신용불량자들이 채무 상환의 어려움을 겪는 등 경기가 급격히 저하될 우려가 있었다. 세계 경제는 더 악조건이었다. 과잉 유동성으로 지구촌에는 돈이 넘쳐났고 부동산으로 자금이 쏠렸다. 하여 ‘우리 모두’는 집값 상승이라는 거품을 즐겼다.

결국 2008년 9월 미국발 금융위기로 거품이 터졌지만, 그 이전까지는 자산가격 상승과 이에 따른 소비 활성화 등이 ‘신경제’로 옹호되었다. 김 교수는 “참여정부 출범 당시 300조원 수준이던 부동 자금은 이후 수백조원 가까운 부동 자금으로 확대되었고, 가히 우리 경제가 감당할 수 없는 과잉 자금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 같은 상황 논리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고백했듯 실수가 있었다. 최근 출간된 〈노무현 자서전〉에는 ‘뼈아픈 실책’이라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강력한 유동성 규제는 다른 부작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일단은 다른 수단으로 관리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낭패를 본 것이다. 유동성 규제를 하지 않고도 부동산 가격 폭등을 막을 수 있는지, 부동산 시장에 이상 동향은 없는지, 너무나 걱정이 되어서 몇 차례나 경제보좌관과 관계 부처 장관들에게 묻고 확인했다. 그때마다 문제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것을 믿은 게 잘못이었다.”

결국 금융 당국의 규제(DTI·LTV)를 강화했고 집값을 잡는 데 효과를 발휘했지만, 너무 늦은 투입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팀은 금융 규제에 대해 유보적이었다. ‘경기 부양’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 탓이다. 정치적 무능도 있다. “투기는 끝났다”라고 공언했을 정도로 모든 역량이 투입된 8·31 대책 이후에도 집값이 오르자 청와대는 아노미에 빠졌다. 추후 각 부동산 주체들의 문제를 따져본 결과, “각각 자신의 시각에서만 이 문제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국민경제 전체에 대한 정무적 판단을 할 시기를 놓쳐버린 것으로 나타났다”(김수현 〈주택정책의 원칙과 쟁점〉). 결국 부동산은 노무현의 ‘정치적 책임의 문제’로 떨어진 것이다. 이 외에도 ‘자책골’은 여러 차례 있었다. 보조를 맞춰야 할 여당과의 엇박자, 토건 관료들의 헛발질, 자신이 만든 제도를 과신하는 각종 설화들로 인해 “하늘이 두쪽 나도 부동산만은 꼭 잡겠다” “헌법만큼 고치기 어려운 제도를 만들겠다”라던 노무현의 꿈은 반토막이 났다.
더 뼈아픈 대목은 정부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가격 상승이 지속되자 대중 사이에서는 부동산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으면서 동시에 땅이나 집을 사지 않으면 바보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여론의 모순’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김헌태 〈분노한 대중의 사회〉).

기자명 박형숙 기자 다른기사 보기 ph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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