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한국화로도 혼용)는 한갓진 인상을 주는 의구한 시각예술의 한 지류다. 세간의 인식은 그러하다. 이렇듯 정통 동양화에 무관심한 풍조 속에서도 조선 숙종 때 선비 서화가 공재(恭齋) 윤두서가 대중에게 각인된 데에는 매스미디어의 공로가 크다. 2008년 SBS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김홍도가 제자 신윤복에게 초상화의 모범으로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여준다고 설정했다.

〈공재 윤두서〉는 돌베개 출판사가 대중 미술서를 표방한 ‘조선 화가들 시리즈’의 2탄으로 펴낸 380여 쪽의 두툼한 책이다. 남인 윤선도를 증조부로 둔 윤두서는 인물화와 말 그림에 소질이 있던 것으로 전하는데 개중 대표작은 단연 ‘자화상’이 꼽힌다. 그래서 책 앞표지와 도입 글이 모두 ‘자화상’으로 출발한다. 화폭 가득 들어찬 화가 자신의 안면과 부릅뜬 두 눈 그리고 부담스러운 정면성이 보는 이를 압박한다. 그린 이의 자의식이 이렇듯 강하게 표출된 자화상은 전례가 없다.

〈공재 윤두서〉박은순 지음돌베개 펴냄
인체로부터 얼굴만 떼어낸 듯한 형식 파괴가 미술사가들의 관심을 유독 끌었다. 2005년 엑스선 촬영을 통해 원화에 귀가 희미하게 그려졌음이 밝혀지기 전까지 양쪽 귀가 생략된 원인을 인물 내면의 정신성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로 해석하기도 했다. 즉 ‘초상화에 인물의 정신을 담는다’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극단적 표현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 책은 그런 항간의 오해부터 바로잡는다. 1930년대 사진 자료를 들어 애초 이 그림은 “신체 부분까지 다 그렸던 것”이라고 정정한다(미술사가 조선미는 반신상으로 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아무튼 오늘날 우리가 대하는 그림에는 턱수염마저 수북한 좌우대칭을 이룬 정면 얼굴만 남아 있다. 당대 그려진 초상화의 전통을 감안해도 이건 엄밀한 탈선이다. 지면에서 비교 인용된 또 다른 정중앙 초상화인 남구만의 영정 그림도 윤두서의 ‘자화상’만큼 압도적인 정면성을 갖추지는 못했다.

‘자화상’으로 도입부를 연 책은 어째서 윤두서가 기이하고 형식 파괴적 화풍을 개척할 수 있었는지 남인의 가풍, 실사구시 학문의 배경, 박학을 추구한 윤두서의 성향 따위를 제시하며 분석한다. 윤두서는 서인과 남인의 대립 속에 일가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입신양명의 꿈을 접고(그러나 미련은 품고) 기운을 예술에 쏟는다. 이것이 회화사의 새 변혁을 이끈 동력이 된다.

옛것일수록 사전학습은 꼼꼼해야 한다

흔히 18세기 조선후기 회화는 진경산수화·풍속화·문인화, 이 셋이 주도한 문예부흥기로 보는데 이들의 먼 배후에 윤두서가 있다고 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서점가에 깔린 윤두서 관련 책은 연구서 성격이 짙다. 이 책 〈공재 윤두서〉는 풍부하고 선명한 도판과 간결체로 따분한 동양회화의 오명을 떨어내려 애썼다. 윤두서와 당나라 화첩 사이의 영향 관계를 가시화하려고 양쪽 도판을 나란히 비교해 배치하기도 했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문근영)은 윤두서의 ‘자화상’으로 초상화의 모범을 배웠다.

그렇지만 자주 반복되는 지문과 불가피하게 출몰하는 한자와 한시들은 독서의 피로를 보태기도 한다. 대중 예술서는 그래서 딜레마다. 하지만 ‘날로 먹는’ 지식은 세상에 없다. 간송미술관이 신윤복의 ‘미인도’를 공개하면 관람객이 길게 줄을 선다. 우리식 문화 탐식의 한 예다. 예술품이 입장료만으로 내 것이 될 순 없다. 식민화된 구경꾼 처지로 교양을 섭렵하리라는 믿음은 문화 산업이 조장한 집단 망상이다. 그 대상이 옛것일수록 꼼꼼한 사전 학습이 선행되어야 하는 법. 잘 만든 예술 대중서가 소중한 이유다.
기자명 반이정 (미술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