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체 절단면과 선체 내?외부에 대한 육안 검사 결과 내부 폭발보다는 외부 폭발의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다.” 민군합동조사단 윤덕용 공동단장이 4월16일 발표한 1차 조사결과다.

외부 폭발이라는 결론이 모든 미스터리를 다 푸는 것은 아니다. 북한에 의한 어뢰 공격인지, 다른 형태의 외부 폭발인지는 뱃머리를 인양하고 파편을 수거해 더 치밀한 조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 언론이 함부로 추리 게임을 펼치는 것은 위험할지도 모른다. 다만 앞으로 결론이 어떻게 내려지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가 어떻게 대응할지를 예측해볼 수는 있다. 시나리오별 대응책과 타당성을 비슷한 역사적 사례와 비교해 짚어봤다.

 

ⓒ시사IN 조남진

 

시나리오 1 : 사고 원인이 북한의 고의적 어뢰 공격으로 밝혀질 경우
- 딜레마에 빠지는 청와대. 보복 공격은 불가능
-참고할 만한 사례 : 초계함 당포함 침몰 사건(1967년), 코르푸 해협 군함 침몰 사건(1946년)

정부와 청와대는 천안함 침몰 원인이 북한에 있다거나 북한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일부 보수 언론과 퇴역 장성을 중심으로 북한의 ‘버블제트 어뢰 공격설’이 확산되고 있다. 보복 공격론도 거세다.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은 “전쟁을 결심해야 전쟁이 없다”라며 “만약 어두운 바닷속에서 북한 소행의 물증이 떠오르면…. 한국이 제대로 된 나라라면 원칙적으로는 북한의 잠수함 기지를 부숴야 한다”라고 썼다.

하지만 이 선택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이성현 세종연구소 안보연구실장은 “만약 침몰 원인이 북한 어뢰로 밝혀지더라도 사후적으로 보복 공격하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국제법적인 이유와 전시작전권 문제가 있다. 국제법에서 유엔헌장 제51조에 자위권이 명시되어 있긴 하지만,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단지 보복을 위한 공격을 자위권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성현 실장은 “비유하자면, 밤에 길을 걷다 괴한에게 습격을 당한 후 며칠 뒤에 범인이 체포되었을 때, 내가 직접적인 폭력으로 상대를 보복하는 것이 법적으로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작전권이 미국에게 있다는 것도 보복 공격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1967년 해군 당포함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해 1월19일 오후 2시34분, 해군 650t급 초계함 당포함(PCE-56)이 동해안 북방한계선 근처에서 작전을 하던 중 북한 해안포 포격을 맞아 침몰한 적이 있었다.

당시 당포함은 명태잡이 어선 60여 척을 보호 관리하고 있었다. 어선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북한 해안까지 접근하자 당포함도 어선을 쫓아갔다. 이때 동굴 진지 속에 있던 북한 해안 포대가 280여 발 포격을 시작했다. 당포함은 170여 발로 대응사격을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함선은 침몰했다. 승무원 79명 가운데 39명이 전사 실종됐다.

 

 

 

1967년 1월19일 650t급 초계함 당포함이 북한 해안포 포격을 받고 침몰하고 있다.

 

 

당포함 침몰 사건의 책임을 두고 북한과 한국은 서로를 비난했다. 북한은 한국 해군이 북한 영해에 진입했기 때문에 정당한 자위권을 행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군은 북한 영해에 진입하지 않았다고 맞섰다. 당시 기사를 보면 우리 군이 북한 고성 앞바다(수원단) 4.5마일(7.24km) 안으로 진입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북한은 해안에서 12해리(22km)를 영해라고 주장했고 한국은 3해리(5.56km)만 인정하고 있었다. 서해 NLL 논쟁의 동해판이었는데, 지금과는 서로 처지가 바뀐 셈이었다.

사건 직후 박정희 정부는 보복을 구상했다. 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찰스 본스틸 유엔군사령관에게 북한 도발에 응분의 군사조치를 취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본스틸 사령관은 보복은 정책문제로 상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지 못했으며 한국군이 단독 행동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점만을 강조했다”라고 밝혔다.

작전권이 없던 한국군은 보복 공격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박정희 정부는 한 해 뒤인 1968년 우리 어선이 동해안에서 북위 38도30분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어로한계선을 설정했다. 당포함 침몰 이전보다 남으로 후퇴한 선이었다.

지금도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은 미군에게 있다. 이창위 서울시립대 교수는 “1994년 평시 작전권을 이양받을 때 6개 핵심 사항에 대해서는 한미연합사 사령관에 연합권한위임사항(CODA :Combined Delegated Authority)으로 위임했다. 단독 작전이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6개 사항 중 첫 번째 조항이 ‘전쟁 억제와 방어를 위한 한·미 연합 위기관리’다. 이 조항에 따르면 한국이 보복 공격을 하려면 미국과 협의해야 하는데 과거 전례와 현 국제 정세로 볼 때 미국이 허락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1946년 영국 함대가 알바니아 영해 코르푸 해협에서 기뢰를 맞아 침몰하는 모습.

 

 

북한이 원인으로 지목되면 청와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보수층은 보복 공격을 하지 못하는 데 실망하게 되고, 야당은 책임론을 펼 수 있다. 노무현 정부 때 국방보좌관을 거쳐 현재 〈D&D 포커스〉 편집장을 맡고 있는 김종대 씨는 “만약 북한 어뢰 공격이 사실이라면, 이것에 대해 어떤 대응도 못하고, 단기간에 확인도 하지 못한 군 수뇌부가 책임져야 한다. 큰일이다”라고 말했다.

이 경우 이명박 정부가 정치적인 타격을 크게 받을지는 확실치 않다.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 내내 잇단 북한 공격을 받고 무력한 모습을 보였지만, 정치적 효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정권이 문제의 핵심을 북한의 만행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정부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유엔 안보리와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 이 사건을 국제 이슈로 부각하는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를 천안함 사건과 연결할 때 종종 등장하는 사례는 코르푸 해협 영국 군함 침몰 사건이다.

1946년, 영국 군함이 알바니아 영해인 코르푸 해협에서 기뢰에 맞아 침몰해 승조원 44명이 죽고 4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영국은 알바니아가 설치한 기뢰에 의한 사고라고 의심했으나 알바니아는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사고 원인을 밝힌다며 알바니아 영해 안에 자국 조사단원을 투입해 바다밑을 수색했다. 영국은 독일제 기뢰 파편 조각 2개를 찾아냈고, 분석 결과 페인트가 칠해진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혔다.

영국은 이 증거를 바탕으로 알바니아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고, 1949년 12월 국제사법재판소는 알바니아가 영국에게 84만3947파운드 또는 200만9437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흔히 영국이 일방적으로 이긴 소송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내용은 보면 다르다. 국제사법재판소가 영국의 손을 들어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뢰가 알바니아 것이라는 점은 인정되지 않았다. 단지 제대로 기뢰를 관리하지 못하고 영국에게 알려주지 못한 책임만 물었다. 영국이 알바니아 영해에서 수색작업을 한 것은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알바니아는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을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40여 년이 지난 1992년 5월 영국과 알바니아는 ‘1946년 코르푸 해협 사건에 대한 상호간의 유감(regret)’을 공동성명 형식으로 발표했다. 1996년 알바니아는 영국에게 200만 달러를 지급했지만, 공식적인 이유는 코르푸 사건 배상금이 아니라 영국이 보관하던 금괴를 반환받은 대가였다.

이번 천안함 사건의 경우는 북한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국제사법재판소 재판이 열리는 것 자체가 어려울뿐더러, 그 결과도 장담할 수 없다. 남은 것은 유엔 안보리를 통해 북한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도 이런 주장을 펼치는 정치인이 많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만약 북한 공격이 원인라면, 꽤 오랫동안 남북관계가 어려워질 것이다. 북한은 고립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시나리오 2 : 북한과 무관한 침몰
참고할 만한 사례 : 쿠르스크호 침몰 사건(2000년)

양무진 교수는 “만약 천안함 침몰이 북한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질 경우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북한 연루설, 보복공격설을 외쳤던 것이 역으로 우리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국제적으로 우리가 더 망신을 당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무기인 버블제트 어뢰를 북한이 보유할 능력이 있는지, 탐지되지 않고 실전에 운용할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 제기될 뿐만 아니라, 천안함 소나병(음파탐지병)이 탐지하지 못했다는 점도 걸린다. 만약 외부 폭발의 원인이 북한과는 무관한 것이거나, 한국군 자체에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참고할 만한 사례는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호 침몰 사고다.  

2000년 8월12일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호는 노르웨이 북부 바렌츠해를 지나다 원인 모를 사고를 맞아 침몰했다. 해저 108m에 가라앉아 승조원 118명이 전원 사망했다. 사건 초기 잠수함 침몰 원인을 놓고 러시아 군부는 외부에 책임을 돌렸다. 발레리 마닐로프 러시아 해군 참모차장은 언론에 “침몰한 쿠르스크호로부터 50m 떨어진 해저에서 영국 또는 미국 핵잠수함의 선체 외부 난간으로 보이는 물체가 발견됐다”라고 말했다. 러시아 언론은 군부 소식통을 취재원으로 “사고 직후 사고 해역에서 영국 국적의 부표가 발견됐다가 가라앉았다” “사고 당시 외국 잠수함 3척이 부근 해역에 있었다”라는 보도를 연일 쏟아냈다.

 

 

2000년 8월12일 침몰한 러시아 잠수함 쿠르스크호 모습. 러시아는 인양을 위해 두 조각을 냈다.

 

 

한편 서방 언론(독일 베를리너 자이퉁 등)과 러시아 정치인(전직 해군장교였다는 세르케이 주코프 등)은 러시아 아군끼리 오발 사고로 침몰했다는 주장을 폈다. 근해를 지나던 러시아 핵순양함 페테르대제호가 어뢰를 잘못 발사해 잠수함 쿠르스크호에 맞았다는 것이다.

러시아 당국은 사건이 발생한 지 무려 1년 11개월이 지난 2002년 7월 공식 조사 결과를 발표를 했다. 허탈하게도 잠수함 안에 있던 어뢰에서 연료가 유출돼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이 결론이 허탈한 이유는, 애초 미국 정부가 예측한 사고 원인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미국 정보당국은 사건 발생 6일 뒤인 8월18일 “우리는 쿠르스크호의 선체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으나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내부 폭발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라고 언론에 밝혔다. 미국이 6일 만에 알아낸 진상을 러시아가 확인하는 데 2년 가까이 걸린 셈이다.

진상 확인에 시간을 끈 것은 푸틴 당시 대통령에게는 유리한 결과를 낳았다. 잠수함 침몰 이후 푸틴 대통령 지지율은 10% 하락하며 정치적 위기에 몰렸지만, 푸틴은 유족들과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을 연출하는 등 ‘국민과 아픔을 나누는 지도자’ 이미지를 알리는 데 그 사건을 활용했다. 한 달 뒤인 2000년 9월13일 푸틴은 ‘러시아판 유신’이라는 국익수호 독트린을 발표하며 국가 정보 통제권을 손에 넣었다. 2002년 침몰 사고 진상이 밝혀졌을 때는 책임을 묻기에 너무 늦어버렸다.

기자명 신호철 기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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