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6개. 2003년부터 2004년까지 4년 간 전국에서 사라져 간 ‘10평 미만 서점’의 개수이다. 동네 곳곳에 들어서있던 서점들이 대형 서점과 인터넷 서점의 영향으로 문을 닫은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크고 강한 서점들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은 동네 서점들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 도전을 펼치고 있다. 동네 서점을 꾸리는 이들은 ‘동네 서점만이 지니는 가치’가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거기에 희망을 건다.


글 싣는 순서. 
1. 살아남은 동네 서점의 슬픔
2. 참고서 상점’으로 바뀐 동네서점
3. 아직 희망이 있다
4. 그곳에 가면 책향기가 난다


동네 서점은 모두 학습 참고서만 파는 곳으로 전락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수가 많지는 않지만 서점 주인과 함께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동네 서점이 여전히 살아있다.

ⓒ시사IN 안희태
서울 대학로에서 5년간 책을 팔아온 '이음아트'도 지난해 문을 닫았지만, 같은 자리에 '책방이음'이라는 동네 서점이 새로 문을 열었다.

■서울 혜화동 ‘책방이음’

서울 혜화동의 ‘책방이음’은 생긴 지 4개월도 되지 않았다. 이런 현실에 신생 동네 서점이라니!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책방이음’은 지난 5년간 대학로에서 인문예술 서적을 팔아온 ‘이음아트’가 문을 닫고 난 자리에 새로 생긴 서점이기 때문이다.

ⓒ시사IN 안희태
서울 혜화동 ‘책방이음’을 꾸리는 조진석씨

하지만 슬퍼할 필요도 없다. 동네 서점이 문 닫은 자리에 프랜차이즈 빵집이나 커피 전문점이 생기는 대신, ‘이음아트’ 자리에는 ‘책방이음’이라는 또다른 동네 서점이 비슷한 책 구성으로 바통을 이어받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동네 서점은 죽기도 하지만, 새로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새로 시작된 ‘책방이음’은 ‘나와우리’라는 평화·인권 단체가 운영한다. 상근 활동가인 조진석씨는

“책을 팔아 이윤을 남기지 않겠다는 전제를 세워놓고 서점을 꾸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각종 수험서나 초·중·고등학교 학습 참고서, 영어 교재 따위는 들여놓지도 않았다.
또 하나, 출판사에서 올해 말까지는 판매하기로 한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책방이음에서는 구입할 수 없다. 돌아가신 분의 유언을 생각해 ‘빌려주기만’ 한단다.

 

■강원 춘천 ‘광장서적’

엄밀히 말하면 동네 서점은 아니다. 매장도 넓고 분점도 있다. 이른바 지방의 ‘중형 서점’인데, 송규철 대표(46)가 하는 고민은 작은 서점 주인들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이 서울 중심이라, 지방이 ‘동네’가 돼버린 탓이다. 그런 ‘동네’ 골짜기까지에도 각기 다른 브랜드의 대형 마트 네 곳이 들어서고 그 안에 모두 큰 서점들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시사IN 백승기
강원 춘천 ‘광장서적’의 송규철 대표

11년 전 송 대표가 처음 서점을 열었을 때 춘천 시내에는 서점이 27군데 있었다. 지금은 12곳만 남았다. 광장서적에서 매출이 오르면 송 대표는 씁쓸해진다. 결코 춘천에서 책 읽는 사람이 늘어서이거나 인터넷 대신 지역 서점을 찾아야겠다는 인식이 퍼져서 매출이 오른 게 아니라는 것이다. “광장서적보다 더 작은 서점들이 망해가기에 잠깐 그 수요를 흡수한 것뿐이다.”

살아남았기에, 송 대표는 광장서적을 지역에서 제 몫을 하는 서점으로 만들고 싶었다. 음악회, 시낭송회, 독서토론회, 저자 초청 강연회 등 책을 매개로 할 수 있는 문화 행사를 자주 열었다. 어린이 도서관 짓기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또 하나, 지인에게 좋은 책을 선물하게 하는 ‘책사랑 릴레이’를 단골손님 3명에서부터 시작해 차례차례 이어갔다. 송 대표는 그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한 해 동안 72명의 지역 주민들이 ‘책’이라는 끈으로 묶이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면서 송 대표는 “지역 ·동네 서점의 경쟁력은 고객과 접촉면을 넓히는 길밖에 없다”라는 확신을 굳혔다.


■서울 응암동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상북)’은 지난 2007년 6월 윤성근씨(35)가 만든 중고 서적 전문 서점이다.
이름은 ‘헌책방’이지만 사실 윤씨는 그 분류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책을 팔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한 가지 다짐한 게 있다면, ‘내가 읽은 책 가운데에 남들에게 권할 만한 책을 팔겠다’라는 것이다. 원하는 책만 골라 책장에 꽂아놓고, 좋은 책만 손님들에게 권하고 싶었다. 새 책방을 열면 실현하기 힘든 일이었다. 자연스레 이상북의 책장에는 윤씨가 읽고 추천하는 ‘중고 서적’ 3000여권이 꽂혔다.

ⓒ시사IN 백승기
서울 응암동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장 윤성근씨

처음 1년은 힘들었다. 동네 골목길에 제대로 된 간판도 없이 들어선 반지하 책방에 일부러 찾아와주는 손님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윤씨는 이상북을 통해 “검소하게 생활하면 책방을 운영하며 먹고 살 수 있는 인건비”를 지급받는다. 지역 시민들과 부대끼며 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상북은 동네에 뿌리내린 크고 작은 지역·시민단체와 ‘공생’ 관계를 맺었다. 이상북은 그들에게 문화 행사와 세미나를 열 공간과 책을 제공해주고, 그들은 이상북 주인장을 대신해 마을 곳곳에 책방을 홍보해주는 식이다.

윤씨가 책방에서 팔 책을 구하는 방법도 독특하다. “은근히, 여기 은평구에 대학 시절 책 많이 읽던 운동권 출신들이 많아요. 그 사람들 집에 놀러가서 다용도실 같은 공간 문을 열면, 십중팔구 철학·사회·인문서들이 빼곡이 쌓여있거든요. 그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읽게끔 제게 넘기십시오’라고 하고 가져오는거죠.”


■충북 충주 ‘책이 있는 글터’

버스를 타고 충북 충주시 칠금동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면 대형마트가 제일 먼저 눈앞에 펼쳐진다. 웬만한 지방 소도시들이 다 그렇듯, 충주시에도 최근 몇 년간 시내 주요 지점에 대형마트가 들어서고 그 안에서 책을 팔기 시작했다. 당연히 작은 동네 서점들에 타격이 돌아갔다. 

ⓒ시사IN 안희태
충북 충주 ‘책이 있는 글터’의 이연호 대표

하지만 충주시 금릉동 ‘책이 있는 글터(책터)’의 이연호 대표(46)는 걱정이 덜하다. ‘책터’에선 마트 서점에서 많이 파는 학습 참고서가 차지하는 판매 비율이 25%에 그치기 때문이다. 인문사회과학 서점이 잘 팔리지 않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인데, 이 대표는 오히려 “최근 2~3년간 인문사회과학서를 찾는 손님들이 늘었다”라고 말했다. 특이한 서점이다.

책터에는 몇 가지 눈에 띄는 공간이 있다. 첫 번째는 서점 한 켠에 놓인 책꽂이이다. 그곳에는 ‘글터가 읽고 권하는 책’이라는 명패가 놓여있다. 이 대표가 직접 읽은 책 가운데 독자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것들을 따로 모아 놓은 것이다. 그냥 모아놓는 것이야 쉽다. 그런데 이 대표는 엽서 크기의 종이에 일일이 독후감을 적어 책 사이에 꽂아 놨다.

두 번째는 서점 위층에 마련해 놓은 작은 문화 공간 ‘숨’이다. 지난해 11월부터 이곳에서 “책에서 희망을 발견해보자”라는 주제 아래 강좌 시리즈를 열었다. 공간을 열어놓으니 지역 사회의 다양한 사람들이 문을 두드렸다. 동네에서 점을 보는 어르신이 “여기에서 명리학 강의를 한 번 해보고 싶다”라고 요청해오고, 오카리나 공연과 어린이 연극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연습 공간으로 쓰기도 하고, 바느질을 뜨러 아주머니들이 모이기도 했다. 책만 파는 서점이 아니라 사람이 모이고 지역 사회 문화가 꽃피는 서점이 된 것이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