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만화 같다’는 말을 할 때, 이는 현실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화는 현실에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에게 상상력의 날개를 펴게 해준다. 그런데 상상력을 거세한 만화가 있다. 바로 ‘르포만화’다. 국내에서는 생경하지만 세계적으로 르포만화는 독립된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사회현상을 충실히 기록하거나 서술하는 것을 뜻하는 ‘르포’와 상상력의 대표주자인 ‘만화’는 얼핏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둘이 만났을 때 현실은 상상 이상의 힘을 갖게 된다. 이를 증명하는 르포만화 작품집이 나왔다. 김홍모 작가 등 젊은 만화가 6인이 공동으로 작업한 〈내가 살던 용산〉이다. 용산참사 헌정만화집으로 기획된 이 작품집에서 여섯 명의 만화가는 각자 용산참사 희생자 한 명씩을 맡아 그들의 숨겨진 사연을 전했다. 작품집을 기획한 김홍모씨는 불에 탄 망루 속 희생자들의 최후 상황을 꼼꼼히 되짚었다.

르포만화가 6인이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렸다.

〈내가 살던 용산〉은 만화계에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작품 출시를 계기로 지난 3월11일 홍대 만화카페 ‘한 잔의 룰루랄라’에서 르포만화 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6인의 만화가 외에 만화평론가 한상정씨, 르포문학 작가 김순천씨와 다큐멘터리 감독 공미연씨도 참석해 작품의 의미와 르포만화의 현재를 살폈다. 3월23일에는 홍대 클럽 ‘빵’에서 북콘서트도 열릴 예정이다.

외국에서는 르포만화가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척박하다. 본격 르포만화는 많지 않다. 지금까지 나온 르포만화는 대부분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것들이었다. 가족사를 배경으로 한 〈대한민국 원주민〉(최규석)과 〈정가네 소사〉(신성식), 입양아 체험을 담은 〈피부색깔=꿀색〉(전정식), 장애여성의 체험을 담은 〈겨드랑이가 가렵다〉(이해경), 귀농 경험을 그린 〈삽 한 자루 달랑 들고〉(장진영), 군대 이야기를 담은 〈푸른 끝에 서다〉(고영일), 북한 주민과의 생활 경험을 담은 〈보통시민 오씨의 북한체류기〉(오영진)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용산 참사 계기로 르포문학·르포만화 주목

국내에서 본격 르포만화가로 꼽히는 대표적인 만화가는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과 최호철 교수다. 르포만화집 〈코리아 판타지〉를 내고 있는 최 교수의 작품 〈철망바닥〉은 탄탄한 취재로 언론보도를 뒤집는 내용을 그려 르포만화의 교범으로 불린다. 최 교수는 “현장에 가보고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언론에 보도된 것은 단순히 개가 방치된 아이를 물어 죽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개는 식용견으로 길러지던 도사견으로 아이가 방치된 이유는 가난이었고 담임은 기간제 비정규직 교사였으며 개발로 공동체가 파괴되어 누구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담아냈다”라고 말했다.

르포만화가 6인이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렸다.

국내에서는 르포만화보다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배합한 팩션 계열의 만화가 주목받는다. 강풀의 〈26년〉과 최규석의 〈100℃〉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26년〉은 1000만명 이상의 누리꾼이 인터넷에서 볼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데, 영화 판권계약도 체결되었다. 만화평론가 서찬휘씨는 “예전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 프랑스혁명을 다룬 〈테르미토르〉나 가상 국가의 시민혁명을 다룬 〈북해의 별〉이 필독서가 되었듯이 정부에 비판적인 누리꾼들에게 이런 작품들이 각광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국내 르포만화 중 주목받았던 또 다른 작품은 2006년 박건웅 작가가 노근리 사건을 재구성한 〈노근리 이야기〉다. 만화카페 룰루랄라 운영자 이성민씨는 “〈노근리 이야기〉는 유대인 학살을 다룬 아트 슈피겔만의 〈쥐〉를 연상시키는 역작으로 평가받았다. 그동안 르포만화는 주로 단편으로 그려졌는데 장편으로 노근리 사건을 재조명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꾸준히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참여 활동을 하던 박 작가는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용산참사는 르포만화 작가들에게 좋은 계기가 되었다. 현장 예술가들에게 용산참사는 1980년 광주와 같은 영혼의 상처를 남겼다. 시인 이문재씨와 소설가 장정일씨는 ‘논픽션이 죽은 시대’라고 했는데, 그 논픽션의 싹이 참사현장의 잿더미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김홍모 작가는 용산이 잊히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스스로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에 반성하며 이 책을 기획했다. 그는 출판사를 설득하고 작가들을 직접 섭외했다. 섭외 조건은 한 가지였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가질 것.” 그렇게 해서 김성희·김수박·신성식·앙꼬·유승하 작가를 모았다.

르포만화가 6인이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렸다.

용산참사와 관련한 헌정 작품집을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이 다양한 방식으로 펴냈다. 6-9 작가선언을 했던 문인들은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를 냈는데 이에 앞서 르포 작가들이 희생자 가족과 여러 재개발 지역의 세입자 이야기를 다룬 〈여기 사람이 있다〉를 내기도 했다. 미술인들은 ‘파견 미술인’들의 작업을 기록한 〈끝나지 않은 전시〉를 펴내기도 했다. 만화가들이 작업한 〈내가 살던 용산〉은 이들보다 낮은 시선으로 용산을 바라봤다. 희생자와 같은 ‘사회적 루저’의 시선으로 참사를 바라봤다. 희생자와 같은 눈높이에서 그려서 〈내가 살던 용산〉은 술술 읽힌다. 

작가들의 눈높이가 낮았던 것에 대해 고 이상림씨 편을 그린 김성희 작가는 “용산참사는 바로 내 얘기였다. 만화계에서 주류인 적도 없고 비정규직보다 못한 프리랜서다. 뿌리 없는 존재로서 나의 문제였다. 이 만화를 통해서 내가 사회에 말하고 싶은 바를 말할 수 있었다. 세상은 가난한 사람들을 불편해한다. 보기 싫어하고 듣기 싫어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만화 읽고 내 이웃의 이야기로 받아들여”

또 한 가지 특징은 〈내가 살던 용산〉이 용산참사 헌정집 중 사건 재구성에 가장 충실했다는 것이다. 다른 장르의 예술이 ‘해석’에 주목할 때 이들은 조용히 ‘사실’을 취재했다. 상상력을 거세한 만화에서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충실한 취재뿐이었다. 고 윤용헌씨의 삶을 다룬 김수박 작가는 ‘인과관계’에 주목해 언론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팩트를 제시했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명확한 인과관계를 통해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흥미와 감동을 도모했다.

맨 왼쪽부터 〈내가 살던 용산〉을 펴낸 김홍모·김성희·김수박·신성식·앙꼬·유승하 작가.

김 작가는 “미선이 효순이 사건 때 탱크에 깔린 부시를 납작하게 묘사한 만화가 있었다. 그런 폭력적인 방식은 싫었다.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을 알리는 데 주목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고 윤용헌씨와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지석준씨의 진술 등을 통해 그가 화재 때문이 아니라 무리한 진압 때문에 사망했을 수 있다는 것을 논증했다.

작품집을 기획하며 작가들이 제일 신경 쓴 부분은 취재였다. 고 양회성씨와 두 아들 이야기를 그린 신성식 작가는 “혼자 작업하는 것이 익숙한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취재였다. 취재를 통해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야 했는데 쉽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사건 개요와 정황을 취재하며 만화가들이 취재하는 데 공을 들인 것은 희생자 가족의 마음이었다. 신문이나 방송이 들여다보지 않는 그들의 마음을 취재했다. 신문이나 방송은 피해자 가족들의 마음을 취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청자나 독자도 그들의 마음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만화가들은 마음을 취재해서 그들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공감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상상력은 힘이 셌다. 고 한대성씨의 삶을 복원한 유승하 작가는 “취재원이 말을 잘 안 했다. 침묵이 길었다. 그 침묵 속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고 상상해보았는데 그 얼마나가 얼마만큼일까 짐작하면서 그렸다”라고 말했다.

취재를 마친 작가들이 만화를 그릴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용산참사로 어떻게 독자에게 말을 걸까 하는 부분이었다. 김성희 작가는 “만화를 통하면 가르친다는 느낌을 받기보다 접한다라는 느낌을 받는다. 불편한 이야기지만 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불편하지 않고 편하게 접할 수 있도록 신경 썼다”라고 말했다.

국내 르포만화(위)는 작가의 경험을 담은 자전적 스토리가 대부분이다.

불편한 이야기를 불편하지 않게 전달하는 것은 르포만화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2004년 일본 문화청 미디어예술제 대상을 받은 만화 〈저녁뜸의 거리〉의 작가 고노 후미요는 원폭 피해자 마을사람들 이야기를 전하면서 “사람들은 우리가 조용히 죽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라는 말을 전했다. 용산참사 희생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조용히 사라져주기를 바라는 냉정한 시선에 대해 〈내가 살던 용산〉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작가들은 희생자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말걸기를 시도했다. 고 이성수씨의 삶을 그린 앙꼬씨는 “고 이성수씨의 아들인 상현이의 목소리를 담았다. 상현이의 편지를 통해 아빠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다행히 독자들이 상현이를 기억했다. 상현이와 독자들을 연결해주었다는 사실이 기뻤다”라고 말했다. 만화가들은 희생자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거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을 ‘미선이 효순이 사건’으로 불리게 해 국민의 가슴에 담기게 했듯이 희생자들을 독자의 가슴에 담게 했다. 이는 화가들이 헌정집 〈끝나지 않은 전시〉에서 용산참사 피해자들을 열사로 묘사한 것과 대비된다.

독자들이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내 주변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면서 용산참사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가 생겼다. 재개발 관련 사업을 하면서 철거민을 ‘떼쟁이’라고 부르던 앙꼬 작가의 아버지도 변했다. 작가의 아버지는 딸에게 “너의 만화를 보니 그들의 사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너무 깊이 이해하면 나는 그 일을 못한다”라고 말했다. 

전문 르포만화가 최호철 교수는 한 장의 그림에 상황을 담는 ‘르포 삽화’ 작업(위)을 하고 있다.

최호철 교수는 “안 보고 만들어 그리기보다 보고 있는 대로 그리는 것이 만화가에게는 더 어렵다. 그러나 진짜 있는 이야기를 자기가 체험한 듯 혹은 옆에서 본 듯 전하려면 사실을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내가 살던 용산〉을 마치고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밝히는 소회는 “내가 용산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만화 작업을 하면서 조금씩 용산을 알아갔고 그렇게 얻은 깨달음은 만화를 통해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해졌다. 

르포만화 간담회에서 만화연구가 한상정씨는 프랑스에서의 일화를 통해 르포만화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프랑스 만화가가 북한에 다녀온 뒤 〈평양〉이라는 르포만화를 냈다. 10장도 읽을 수 없었다. 왜곡된 것 투성이였다. 그런데 프랑스 친구들은 재밌다고 읽었다. 성질이 뻗쳤다. 다행히 오영진 작가의 〈보통시민 오씨의 북한체류기〉가 프랑스에서 출간돼 억울함을 풀 수 있었다. 우리 시선으로 사실을 전할 만화가 필요하다.” 오영진 작가는 경수로 사업을 위해서 북한에 파견되어 일하면서 경험한 것을 만화로 그린 작가였다. 이후 프랑스에서 만화평론가상을 받고 앙굴렘페스티벌에 초청되기도 했다.

〈내가 살던 용산〉이 의미 있는 성취를 이뤘지만 르포만화의 미래는 어둡다. 발표할 무대가 없기 때문이다. 정부지원금이 끊겨 우리만화연대에서 발간하던 〈우리만화〉가 정간되었고 한겨레신문에서 내던 〈팝툰〉도 더 이상 발간되지 않고 있다. 르포만화를 실어주던 비정규 무크지도 대부분 나오지 않고 있다. 이전엔 국가인권위원회 등 정부기관에서 후원해 〈십시일반〉 같은 인권만화집을 내기도 했는데 정권이 바뀐 뒤론 난망하다. 작가들도 다음 작업에 대한 기약이 없다. 한 르포만화가는 “어쩌면 열악한 우리 자신에 대해 르포만화를 그려야 될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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