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민노당) 사람들은 명절이 고역이었다. 중앙당 당직자들은 경찰 조사에 대비해 아예 연휴를 반납하고 당사에서 설을 맞았다. ‘농성조’에서 제외된 이들은 어김없이 고향에서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한 민노당 국회의원 보좌관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고향 어른들이 ‘비자금’ 얘기부터 꺼내더라”며 싸늘했던 설 분위기를 전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과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에 대한 수사가 민노당으로 옮아붙은 지난 한 달 동안 민노당은 ‘불법 계좌로, 백억대의 불법 자금을 굴리고, 그 돈을 유력 정치인의 계좌로 흘려보내는’ 총체적 비리 정당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경찰과 보수 언론의 융단폭격이 확실한 효과를 본 셈이다.

경찰과 보수 언론의 논리는 이렇다. 우선 민노당이 당 살림살이를 관리하는 CMS 계좌가 선관위에 신고되지 않은 계좌인데, 이는 정치자금법 위반이다. ‘불법 계좌’라는 몇몇 언론의 표현은 그래서 나왔다. 따라서 이 계좌를 거쳐가는 정치자금 또한 모두 불법이다. 백억대 불법 정치자금이란 이를 뜻한다. 마찬가지 논리로, 국회의원 후원금이 이 계좌를 거쳐 해당 의원에게로 갔으므로 이 역시 ‘불법적으로 흘러들어간’ 돈이 된다. 이상의 세 사실이 한데 엮이면 “불법 계좌로 백억대 비자금을 조성하고 당 국회의원에게도 비자금을 챙겨주는” 비리 정당의 이미지가 완성된다.

ⓒ진보정치 제공경찰이 민노당 서버를 압수수색한 지난 2월7일, 몸싸움 도중 비명을 지르는 이정희 의원(왼쪽 아래).
민노당은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우선 문제의 선관위 미신고 계좌는 당비 등을 자동이체하는 계좌로, 개설에 금융결제원의 허가가 필요하고 정당마다 하나밖에 가질 수 없는 CMS 계좌다. 돈의 흐름이 훤히 드러나는 CMS 계좌를 ‘비자금 관리용’으로 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백억대 불법 자금’이라는 표현 역시 오해의 소지가 크다. 민노당은 문제의 CMS 계좌를 일종의 ‘정류장 계좌’로 사용했다. 당비, 특별당비, 국회의원 후원금, 대선후보 경선 후원금, 당 기관지 구독비, 민노당 상근자 노조 조합비 등 자동이체가 필요한 온갖 돈이 일단 CMS 계좌로 모였다가 용도에 맞춰 20개의 계좌로 나뉘어 빠져나갔다. 민노당이 공개한 입출금 내역을 보면, 2006년부터 현재까지 5년간 이 계좌를 거쳐간 돈을 모두 합친 액수가 256억원이다. 매월 자동이체되는 당비 등이 242억원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돈의 출처가 분명한 데다가, 애초에 백억대의 돈이 계좌에 머무른 적도 없다. 민노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경찰이 백억대 불법 자금을 이야기하는데, 사실 그건 비자금이 아니라 몇 년치 당 전 재산인 셈이다. 백억대 비자금이나 가져보고 당하면 억울하지나 않지”라고 말했다.

문제의 CMS 계좌로 국회의원 후원금을 내면 이 역시 즉시 각 의원의 계좌로 이체된다. 17대 국회 당시 당 공식 계좌로 후원금을 내도록 안내하는 의원실도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과 보수 언론이 “불법 계좌에서 전·현직 의원에게로 흘러들어갔다”라고 ‘음습하게’ 표현하는 돈의 실체다. 17대 국회 4년 동안 심상정 전 의원(현 진보신당)이 후원금 2억5000만원을 이 계좌를 통해 받은 반면 권영길 의원은 380만원만 받는 등 의원실이 어느 계좌로 후원금을 유도하느냐에 따라 편차도 컸다. 17대 국회에서 민노당 의원들이 해마다 정치후원금 한도액(1억5000만원, 지역구 의원은 전국선거가 있는 해 3억원)을 채웠던 것을 고려하면 문제 될 게 없는 액수다.

법무부 장관, “민노당 겨냥한 수사 아니다”

결국 민노당에 덧씌워진 ‘비리 정당’의 굴레는 문제의 계좌를 선관위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로 줄줄이 엮여나온 셈이다. 일단 계좌가 불법이니, 그 계좌를 거친 돈이 닿은 모든 것이 불법이라는 논리다. 선관위에 신고는 왜 안 했을까? 민노당은 행정 착오라고 주장한다. 당 핵심당직자는 “쪽팔리는 얘기긴 한데, 진짜 몰랐다”라고 말했다. 현재는 선관위에 계좌를 신고했고, 행정처분을 기다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상황이 이쯤 되자 경찰 수사를 지휘하는 검찰에서도 당혹해하는 분위기가 읽힌다. 경찰이 공연히 민노당을 들쑤셔놓은 탓에 정작 검찰이 ‘몸통’으로 생각하는 전교조·전공노에 대한 수사마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 정당법과 국가공무원법은 교사와 공무원의 정당 가입을 금하는데, 전교조·전공노 조합원이 민노당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이 애초 수사의 요지였다. 경찰은 “120명에 대해서는 당원번호까지 확보했다”라고 자신감을 보이고 있지만,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민노당 당원명부와 대조해봐야 한다.

이에 협조하지 않는 민노당을 압박하기 위해 ‘불법 계좌’ 의혹을 제기했지만 오히려 벌집을 쑤신 꼴이 됐다. 검찰이 물밑에서 민노당 달래기를 시도하는 흐름도 감지된다. 2월16일에는 이귀남 법무부 장관이 강기갑 대표와 비공개로 만나 “민노당을 겨냥한 수사가 아니다. 공무원 위법행위를 수사하는 것이니만큼 협조해달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역시 ‘몸통’은 전교조와 전공노라는 얘기다.

정치권에서는 그중에서도 이번 수사의 핵심 타깃은 전교조라고 본다. 6월에는 지방선거에서는 교육감선거가 동시에 치러진다.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는 진보·보수 교육감의 정면 충돌이 예상되는 가운데, 진보 진영 교육감 후보가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조직력을 보유한 곳이 전교조다. 한 민노당 관계자는 “교육감 선거에 정당은 공식적으로 개입하지 못한다. 진보 후보가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은 사실상 전교조뿐인데, 전교조가 와해되면 선거를 치를 방법이 없다. 지금 정권이 보기에는 전교조가 민노당보다 더 위협적인 상대인 셈이다. 그래서 이번 수사도 검찰은 민노당이 아니라 전교조를 표적으로 들어온 것인데, 경찰이 과잉충성을 하다 판이 꼬였다”라고 짚었다.

지난 1월 서울 어린이 대공원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창당 10주년 기념식
경찰이 전교조와 전공노 조합원 69명을 정당 가입 등의 혐의로 소환조사하겠다고 밝힌 것은 지난 1월25일이다. 그보다 엿새 전인 1월19일에는 전교조 시국선언 교사들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이를 두고도 정치권에서는 “시국선언 수사로 전교조를 옥죄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수사당국이 정당법 위반 수사라는 ‘플랜 B’를 가동했다”라는 말이 나왔다. 전교조 측에서는, 이번 수사가 지난해 7월 전교조 사무실 압수수색 당시 통째로 뜯어간 서버를 뒤져 기획한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6개월에 걸쳐 기획된 수사 아니냐는 얘기다.

서울·경기 지역 교육감이 진보 진영에 넘어가면 사실상 현 정부 교육정책은 전면 제동이 걸린다. 정부가 광역단체장 못지않게 수도권 교육감선거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다. 최근 이주호 교육과학부 차관이 일부 보수 진영 교육감 후보에게 불출마를 종용하는 등 교육감 선거에 개입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안으로는 보수 후보를 단속해 단일화하고 밖으로는 핵심 조직력인 전교조를 와해시키는 것이 보수 진영의 교육감 선거 전략이라는 분석도 그래서 나온다. 그런 식의 ‘큰 그림’에서 보면, 이번 수사에서 민노당은 ‘어쩌다 휘말린 주변적 변수’에 가까운 셈이다.

서울시 교육감 후보로는 진보 진영에서는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와 전국교수노동조합이 곽노현 방송통신대 교수를 후보로 추대한 가운데 박명기·이부영 서울시 교육위원이 출마의사를 보이고 있다. 보수 진영에서는 박세일 서울대 교수, 문용린 전 교육부 장관 등 거물급의 출마를 종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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