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이 형님 덕에 아레테가 유명해졌다.”

한나라당 친이계 핵심인 정두언 의원이 친박계 좌장 격인 김무성 의원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인사를 건넸다. 1월22일 아침 국회의원 회관 1층에서 열린 한 공부모임에서의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아레테(Arete·탁월함을 뜻하는 그리스어)’ 모임이 최근 정가의 화제로 떠올랐다. 당초 권택기 김영우 김용태 이춘식 조해진 정두언 정태근 의원 등 한나라당 친이 직계 의원들이 만든 인문학 공부모임인데, 여기에 친박계 김무성 의원이 가입하면서 “친박이 갈라지는 거냐” “이게 무슨 정치적 의미냐”며 설왕설래가 오간 것이다.

1월22일 김무성 의원(왼쪽 두번째)이 정두언 의원(맨 오른쪽) 등 친이 중심의 인문학 공부모임 '아레테'에 참석했다.
‘고대 오리엔트 신화를 통해 본 인간’(서울대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 강의)이라는 강의를 한 시간 넘게 경청한 김 의원은 “공부하러 왔다. 내용이 좀 어려웠는데, 2주 후 강의에도 꼭 참석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김 의원 측은 ‘공부’를 강조한다. 한 참모는 “1월11일자로 아레테 모임이 신규 회원을 모집한다는 공문이 왔다. 의원님이 상반기 강의 내용을 쭉 검토하시더니 평소 인문학에 약하다고 생각하셨는지 가입하겠다고 하시더라. 그걸 두고 친이, 친박으로 갈라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지나치게 갈등을 조장하는 것 아닌가”라고 불쾌해했다.

친이 진영도 같은 반응이다. 정두언 의원은 “아버지 돌아가시고 보니 세상은 딱 두 놈으로 갈리더라. 아버지 장례에 온 놈과 안 온 놈. 요즘은 세상이 딱 두 개다. 친이 아니면 친박”이라며 “공부하는 거 가지고 친이, 친박 나누는 게 옳은 일이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양측의 이런 항변에도 김 의원의 아레테 가입이 예사롭지 않게 여겨지는 건 바로 ‘시기’와 ‘상황’의 미묘함 때문이다.

친이, 친박계는 요즘 ‘세종시’를 둘러싸고 사생결단의 기 싸움을 벌이고 있다. 특히 박근혜 전 대표가 연일 말문을 열며 싸움의 전면에 나섰고, 당 지도부 회의와 각종 토론회, 팬클럽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친이 친박 간 전선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다. 그런 마당에 친박계의 상징성 높은 인사가 친이 핵심인사들과 어울린다는 건 이례적이다. 한나라당의 한 중도파 의원은 “인문학 공부를 꼭 친이 모임에서 해야 했을까?”라고 반문했다. 

상황을 더 미묘하게 만드는 건 박 전 대표와 김 의원의 관계다. 김 의원과 박 전 대표는 원래 악연으로 시작했다. 1960년 장면 정권 때 민주당 원내총무였던 김 의원의 부친(김용주)은 9개월 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쫓겨났다. 부산이 고향인 김 의원은 ‘박정희’에 대한 적개심으로 민주화운동에 전념했고, YS의 상도동계에 입문해 성장했다.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을 탈당한 2002년 즈음에는 김 의원이 이회창 총재의 비서실장을 맡아 여전히 껄끄러운 사이였다.

그러던 관계가 박 전 대표가 대표 자리에 올라 김 의원에게 사무총장을 제안하면서 180도 달라졌다. 박근혜 대표-김무성 사무총장은 2004년 총선에서 탄핵 역풍으로 휘청거리던 한나라당을 기사회생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서로 신뢰를 쌓았고, 김 의원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박근혜 캠프의 조직총괄본부장을 맡으며 명실상부한 ‘친박계 좌장’ 자리에 올랐다. 2008년 총선 때 김 의원이 공천에서 배제된 것도 친박계 숙청에 나선 친이계의 표적이 된 측면이 크다.

탈당해 친박 무소속 연대를 결성한 김 의원은 ‘박근혜 바람’ 덕에 살아서 복당했고 그 후로도 “이명박 대통령이 박 전 대표를 포용해야 한다”는 등 친박계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꾸준히 냈다. 그런데 이처럼 끈끈하게 이어져온 두 사람의 관계가 지금은 서먹하다. 지난해 5월 원내대표 경선 파동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4월 재보선에서 참패한 친이 주류 진영에서는 친박을 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5월6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희태 대표의 조찬 회동 직후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에 공감을 이뤘다”는 깜짝 발표가 나왔다. 하지만 미국 스탠퍼드대 특강을 위해 방미 중이던 박 전 대표가 단호하게 ‘반대’의 뜻을 밝혔고, 그 바람에 평소 “친박계도 국정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바람직하다”며 여러 차례 원내대표를 노리던 김 의원의 꿈은 무산됐다.

박 전 대표의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때는 경주 재보선에서 친박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는 등 여당이 참패해 대통령 지지율이 하락하고, 당에서는 쇄신위를 만들어 대표 교체를 논의하는 등 책임론이 무성했다. 게다가 안상수 정의화 황우여 등 4선 의원 3명이 원내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하고 두달 째 선거운동 중이었다. 그런 마당에 미국에 있는 박 전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김무성 내정에 동의하라’고 하면 응하겠는가? 박 전 대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처사다.”

그러나 이 일로 김 의원은 크게 마음이 상했고 그 후 정치권에서는 “김 의원이 박 전 대표를 원망한다더라” “김 의원이 지인들에게 친박계 탈퇴 의사를 묻고 다녔다더라”는 식의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런 소문은 최근 들어 “친이계가 김무성 의원을 포섭해 세종시 수정안 찬성 기자회견을 하려고 한다”는 쪽으로까지 발전했다. 친이계가 친박 진영의 분열을 통해 박 전 대표에게 타격을 주려고 ‘약한 고리’인 김 의원을 공략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0월 김 의원이 한 인터뷰에서 세종시 수정안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박 전 대표가 다음 날 ‘원안+α’를 강조하는 등 두 사람이 세종시 문제로 충돌한 후 이런 관측은 더 힘을 얻고 있다.

‘악연’을 ‘선연’으로 승화시킨 박근혜 전 대표(오른쪽)와 김무성 의원(맨 왼쪽) 사이가 지난해 5월 이후 껄끄럽다. 사진은 박 전 대표가 국립부경대학교에서 명예정치학 박사학위 받을 때 참석한 김무성 의원.

“배신 했다는 기록은 남기지 않을 것”

그런 마당에 지난해 11월 이명박 대통령이 김 의원을 아프가니스탄 카르자이 대통령 취임식에 특사로 보낸 데 이어, 김 의원이 친이계 공부모임에 가입하는 등 양측의 접촉이 활발해지자 친박계는 물론 정치권 안팎의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때마침 발간된 신동아 2월호(1월19일 발간)는 “친이계의 한 핵심 인사가 지난해 5월 작성한 ‘당정청 재정비’라는 문건에 ‘친박계 포섭 및 견제’를 위해서는 김무성 원내대표 안이 유일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고, 이 문건이 청와대에 전달된 지 불과 5일 뒤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안’이 공표됐다”고 보도했다. 이래저래 ‘김무성 포섭론’에 힘을 싣는 내용이다.

김 의원 측은 물론 펄쩍 뛴다. 원내대표 건으로 박 전 대표와 서먹해진 건 사실이지만 세종시 기자회견 등은 검토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김 의원은 최근 국회방송에 나와 “한번 맺은 정치인연은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다” “무능했다는 얘기는 들어도 배신했다는 기록은 남기지 않을 것이다”라며 유독 ‘의리’를 강조했다.

하지만 세종시 해법에 대해서는 여전히 할 말이 많은 기색이다. 한 측근은 "지금은 때가 아니지만, 세종시에 대해 언급할 시기와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계보가 모든 걸 우선 할 수도 없는 것 아니냐"고도 했다. 이 때문에 친박 일각에서는 “김 의원은 더 이상 친박계 좌장이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다. 만에 하나 ‘김무성 이탈’이 가져올 충격을 일찌감치 차단하겠다는 속내다.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는 친박 의원도 있다. “김 의원은 여전히 친박계 좌장이다. 김 의원이 친이계 모임에 간 건 친이 의원들과의 연결 고리 노릇을 하려는 장기 포석일 것이다.”
친이, 친박의 갈등이 가팔라질수록 ‘MS의 행보’가 주요 변수로 떠오를 전망이다. 

기자명 이숙이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ok@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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