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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한파' 일본 정객 가세 히데아키의 '추한' 진면목

<추한 한국인>을 쓴 일본의 유명 정치 평론가 가세 히데아키의 연인은 한국인 여성이었다. 10여 년 동안 동거해온 그녀와의 과거를 부정하며 한국 유족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는 ‘혐한파’ 가세의 행태를 추적했다.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2007년 12월 03일 월요일 제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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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이오성
11월28일 가세 히데아키와 사귀었던 고 김선경씨가 변사체로 발견된 일본 도쿄의 한 주택을 김씨의 어머니가 찾았다.
 
 
“죽기 전에 그렇게 나더러 자기 집에 놀러오라고 졸랐어요. 돈 아깝다며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요. 그때 한 번이라도 들렀다면 이렇게 후회스럽지는 않을 텐데···.”

11월30일, 도쿄 중심지인 아자부의 한 맨션 앞. 정득남 할머니는 하염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이곳에서 정씨의 딸은 숨을 거뒀다. 자신의 딸이 20년 넘게 일본에 사는 동안 어머니는 한 번도 일본 땅을 밟지 못했다. 딸이 불귀의 객이 되고 나서야 어미는 대한해협을 넘었다.

일본에서 작은 술집을 경영하던 정씨의 딸 김선경씨가 한 줌의 재가 된 것은 2005년 8월. 그녀의 나이 마흔다섯으로 남편도 자식도 없는 외로운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지난 10여 년 동안 ‘가족 이상’의 관계를 맺어왔던 일본인 남성이 있었다. 바로 유명 극우파 정치 평론가인 가세 히데아키(加瀨英明)이다. 

가세는 1980년대 이후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 때 청와대를 드나들면서 ‘대일 파이프라인’을 자처했던 인물.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들어 <추한 한국인>이라는 책을 한국인 이름으로 날조 간행해 큰 파문을 일으키며 혐한파로 돌아섰다(상자 기사 참조). 이후 한국 정부로부터 입국 불허 조처까지 당한 그가, 한국인 여성과 동거 생활을 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가세는 김씨의 죽음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김씨가 숨진 장소인 맨션의 명의가 가세 앞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왜 남의 집에서 숨을 거둔 것일까. 유족들은 이 집이 김씨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김씨가 틈만 나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사는 집이 자기 것이라고 말해왔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선경이는 내게 안부전화를 걸었어요. 그때마다 지금 사는 집을 10년 할부로 구입한 건데, 이제 2년만 더 내면 내 집이 된다고 했습니다. 집 판 돈은 고국의 어머니에게 주고 자기가 운영하는 가게를 판 돈은 고아원에 준다고 했어요. 자기는 이미 노후 대책을 세워놨다면서요.”

김씨 사망 후 주변 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유족들은 그 집이 가세의 명의임을 알게 됐다. 가세는 유족에게 “내가 선경씨를 예뻐해서 이 집을 명의 신탁해주려 했지만, 사망했으므로 이건 엄연한 내 집이다”라며 못을 박았다. 이상하게 여겼지만, 고인이 세상에 없는 마당에 따져 물을 곳이 없었다.

“2년만 더 부으면 내 집 된다”고 했는데…

그렇게 평범한 죽음으로 묻힐 뻔한 김선경씨 사건이 불거진 것은 지난해 6월, 일본에서 보내온 한 다발의 꽃 때문이었다. 가세가 비서를 통해 김씨의 무덤에 꽃이라도 한 다발 놓아두라고 지시한 것이다. 하지만 딸이 변사한 뒤 노모는 충격으로 드러누워 무덤은커녕 납골묘에도 김씨를 안장하지 못한 채 방치하는 형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마저 딸의 사망 소식에 충격을 받고 세상을 떴다.

   
  <추한 한국인>을 쓴 가세 히데아키.  
 
김씨 노모의 사연을 듣고 딱하게 여긴 한국인 박종규 목사가 가세에게 편지를 썼다. 김선경씨의 유지를 이행하라는 요구였다. 하지만 그때부터 가세 측의 태도가 돌변해 김씨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나섰다. 집을 명의 신탁하려 할 만큼 각별했던 둘의 관계가 가세의 발빼기로 순식간에 ‘남남’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러나 가세 측의 주장은 뻔뻔한 거짓말이었다. 사망한 김씨는 유품으로 가세가 볼에 키스하는 사진, 함께 여행 가서 찍은 사진 등 둘의 깊은 관계를 입증하는 증거를 남겨두었다. 둘의 동거 관계가 10여 년 가까이 지속된 것임을 설명하는 정황과 증언도 수두룩했다. 이런 ‘물증’들을 제시했음에도 가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국인 여성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가 죽은 뒤에 나 몰라라 하는 혐한파 가세의 이런 태도에 분개한 박 목사와 유족은 결국 지난해 8월, 집의 소유주가 누구인가를 따지는 법적 소송에 들어갔다. 유족은 김씨가 가세의 은행 계좌로 매달 정기적인 금액을 지급한 통장 기록을 확보해 이를 주택할부금 증거로 내세웠다.

한국의 유족 측이 법적 대응할 움직임을 보이자 다급해진 가세는 유족에게 합의 위로금조로 100만 엔(약 850만원)을 제시했다. 유족들은 “가세의 주장대로 선경이와 아무 관계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위로금 따위를 받을 이유가 없다”라며 합의를 거부하고 소송을 이어갔다.

 
11월28일, 유족들은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튿날 도쿄 지방법원에서 열리는 1심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 정씨는 “만일 일본 법원이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린다면 뻔뻔스러운 가세의 집 앞에서 누워버리겠다”라며 배수진을 쳤다.

하지만 도쿄에서는 뜻밖의 상황이 유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세 측이 법원에 300만 엔에 합의하겠다고 제안해둔 것이다. 유족 측을 대리한 일본인 변호사도 합의를 종용했다. 김씨가 소득신고를 하지 않은 외국인이므로 가세 계좌에 불입한 돈을 불입금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유족들은 일순 혼란에 빠졌다. 낯선 땅 일본에서 그들의 편은 없었다. 일본 현지 상황을 철저하게 파악하지 못한 유족들의 책임도 있지만, 그들 처지에서는 “가세 측이 뭔가 손을 썼다”라고 여길 만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날 밤, 박 목사와 유족은 고심 끝에 법원의 합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족의 입장을 적극 대변해줄 변호사를 다시 선임하는 등 길고 지루한 싸움을 이어가기로 했다. 박 목사는 “돈 한 푼 못 받는 한이 있어도 가증스러운 가세를 벌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튿날 유족은 도쿄 지방법원의 합의 권고에 불복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재판부는 내년 1월17일에 1심 판결을 내리겠다고 발표했다.

   
  한국인 김선경씨가 의문사한 뒤 가세는 내연 관계를 부인했지만 유품에서 증거 사진이 발견됐다.  
 
혐한파 일본인을 상대로 한 일본 법정의 재판에서 판결 전망이 그리 밝은 것은 아니다. 가세 측이 일방적으로 김씨의 유품을 정리한 까닭에 유족에게 유리한 증거자료가 많지 않다. 김씨의 사망 원인이 당뇨로 인한 것이라는 일본 경찰의 변사사건 종결 처리도 석연치 않다. 결국 누군가 일본에 상주하며 초동 자료부터 다시 수집해야 하는 상황에서 당장 하루하루가 불안한 한국인 칠순 노모의 싸움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싸움은 이미 법의 승패를 다투는 문제를 넘어섰다. 재산 문제를 둘러싼 일본 법원의 판결과 상관없이 이번 기회에 일본 극우인사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이겠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시사IN>은 도쿄 현지에서 여러 차례 가세 측에 연락을 했지만, 끝내 그는 대답을 회피했다. 

한국인을 혐오하는 책을 팔아 막대한 부와 명예를 획득하고, 뒤로는 10년 동안 사귄 한국인 여성의 집을 가료채려 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가세. 이 ‘추악한 일본인’ 가세는 오늘도 일본에서 한국과 한국인을 능멸하는 선봉장 노릇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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