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이 보장하는 결사의 자유, 자주적 단결권에 부합하며 국제노동기구(ILO)도 같은 이유에서 10여 차례 넘게 우리 정부에 도입을 권고한 제도가 있다. 바로 복수노조이다. 이 제도가 허용될 경우 삼성과 포스코 등 무노조·어용노조 사업장 노동자뿐만 아니라 노동3권에서 소외된 비정규직들의 권리도 적잖이 신장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데 최근 노·사·정 간 힘겨루기 양상을 보면 이 ‘진보적인 제도’의 시행에 가장 적극적인 쪽은 양대 노총도 경영자 단체도 아닌 이명박 정부로 보인다.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문제와 함께 뜨거운 논란거리인 복수노조 도입과 관련해 ‘즉각 시행’ 자체를 강조하는 곳은 아무리 봐도 현 정부밖에 없기 때문이다.
복수노조 찬성이야 반대야

1997년 노동법 개정 과정에서 입법화되었으나 노사 양측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법 시행이 유예된 이후 무려 13년째다. 노동자 측은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경영자 측은 복수노조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둘은 매번 ‘합의’를 거쳐 두 제도의 시행을 계속 미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분위기가 좀 다르다. 양측의 반발은 여전하지만, 유예 기간이 끝나는 내년 1월을 앞두고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예정대로’에 힘을 싣는다. 정운찬 국무총리·임태희 노동부 장관을 비롯한 정부 측은 ‘국제적 기준’에, 심지어 ‘노동운동의 원칙’까지 거론하며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압박한다.

10월29일 복수노조와 전임자 임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노·사·정 대표자들. 임태희 노동부 장관(왼쪽 세 번째) 좌우에 양 노총 위원장이 서 있다.
물론 양대 노총도 공식적으로는 복수노조 시행을 지지한다고 밝힌다. 하지만 말만 그럴 뿐 실천의 방향은 좀 이상하다. 이를테면 양 노총의 공식 구호는 ‘복수노조 창구단일화 반대’다. 정부가 교섭창구 단일화를 전제로 한 복수노조를 추진하자 “소수 노조의 교섭권을 박탈할 수 있다”라며 반발하는 것인데, 문제는 이
구호를 ‘복수노조 찬성’ 또는 ‘즉각 허용’이라고 볼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이다.
“우리 입장을 복수노조 반대로 알고 있는 조합원이 많아 교육에 애를 먹고 있다”라는 민주노총 관계자의 걱정은 상당 부분 자초한 것이 아닐까. 이 관계자는 이어 “민주노총이 가장 주력하는 문제는 역시 전임자 임금이다. 대공장 등 힘이 있는 노조는 사실 복수노조에 큰 관심이 없거나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되면 좋지만, 안된다고 적극적으로 싸울 수는 없는 사안이다”라고 전한다.

한국노총은 좀 더 노골적이다. 김종각 정책본부장은 “복수노조 시행 시 선명성과 교섭권 확보, 상급단체 변경 등으로 인한 노노 갈등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특히 한국노총 전체 80만 조합원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한국교통운수노조총연합(교운총련)이 이 제도에 적극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노총의 한 관계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버스·택시·항만 등 교운총련 소속 사업장은 다른 업종과 달리 민주노총이 별로 없고 한국노총이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복수노조가 되면 민주노총 세력이 치고들어오지 않을까 걱정이 많다.”

현대중공업에 복수노조가 생긴다면?

양대 노총은 전임자 임금 금지는 물론이고 복수노조 시행이 노동운동을 무력화하려는 정부의 ‘불순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강조한다. 물론 근거가 없지 않다. 정부와 보수언론의 지원을 받는 ‘제3노총’ 세력의 핵심인 서울메트로노조의 정연수 위원장은 지난 4월 〈시사IN〉과 가진 인터뷰에서 “새로운 노총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아직 소수지만 복수노조가 허용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기득권’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복수노조가 시행되면 대공장 등 현장 노사관계에 큰 변화가 올 수 있다. 위는 지난 1월 울산 현대중공업 측의 폭력행위를 규탄하는 진보신당 관계자들.

그러나 정반대 상황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15년째 무분규 임단협 타결, 민주노총 탈퇴, 교섭권 위임 등으로 ‘어용 노조’라는 비난을 받는 울산 현대중공업노조의 경우를 보자. 이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권리 보장 등을 주장하며 민주파 노조를 세우기 위해 애쓰는 현장조직인 ‘전진하는 노동자회’의 김형균 전 의장은 “복수노조가 시행되면 현장 분위기가 급반전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전체 비정규직 수가 정규직 조합원 수와 비슷한 2만여 명이다. 민주파가 이들 비정규직과 함께 노조를 만들어 교섭권과 파업권을 확보하면 우리가 다수파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


오민규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도 “비정규직은 조직화 과정에서 사측이 세운 유령 노조나 어용 노조와 곳곳에서 맞닥뜨리고 있다. 복수노조를 잘 활용하면 얼마든지 ‘자본의 칼’이 아니라 ‘노동의 칼’로 벼려낼 수 있다”라고 강조한다.

노·사·정 대표자들은 현재 ‘6자 회의’를 구성해 11월25일을 기한으로 복수노조와 전임자 임금 문제를 논의 중이다. 정부의 태도가 강경하긴 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정책연대까지 이룬 한국노총과 관계, 재계의 반발 등으로 복수노조 시행은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전망이 적지 않다. 양대 노총의 주된 관심이 전임자 임금 금지를 다시 유예하거나 최소한 ‘완화’하는 데 있기 때문에 복수노조의 ‘희생’은 불가피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은 “전임자 임금 금지를 완화하는 대가로 자주적 단결권과 교섭권을 훼손할 바에는, 예정대로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를 시행하는 것이 낫다”라고 주장한다. “지난 50년 동안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기업별 노사관계를 유지하고 온존시켜온 복수노조 금지 조항을 이번에 없애야 한다. 복수노조는 중소 영세업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노동기본권을 가져다줄 것이며, 몇 해 안 가 노조 조직률은 20%대의 벽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라는 당위성과 기대 때문이다. 김 소장은 전임자 임금 문제에 대해서는 ‘노조의 자주성을 침해하지 않는 한’ 임금 지급이 곧바로 부당노동행위가 안 되는 점 등 다양한 법 해석상의 다툼이 가능해 노동계가 자신감을 잃을 필요가 없다고 설명한다.

“어려울수록 원칙을 중시해야 한다. 노조의 핵심 가치는 자주성과 민주성이다. 복수노조 제도개선은 노동운동의 원칙을 바로잡는 일이다.” 위 글은 김경선 노동부 노사관계법제과장이 노동전문지 〈매일노동뉴스〉에 기고한 내용의 일부다. 정부의 ‘훈수’가 설득력 있느냐 없느냐는 노동운동 진영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 같다.

기자명 고동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intered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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