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친일을 부끄러워하고 고백하고 참회한 사람도 있었다.
“일제 하 검사, 즉 고관을 지냈다는 것만은 한없이 후회하는 일이다. 일제 통치에 협력했다는 것만으로도 아무리 사과해도 모자랄 것이다.” 1948년 8월 대검찰청 차장 엄상섭 등 8명은 일제강점기에 검사를 지냈다는 이유로 사표를 냈다.

하동군수를 지낸 이항녕(전 홍익대 총장)은 강연을 다니면서 친일을 반성했다. “일제 말 27세 젊은 나이로 하동군수를 지내면서 저 자신의 출세와 보신에 눈이 어두워 (군민들을) 죽창으로 위협까지 했던 저를 너그럽고 따뜻하게 맞아주신 하동 군민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1991년 7월10일. 바르게살기운동 하동군협의회 초청 강연회). 이항녕은 1961년 자전석 소설 〈청산곡〉을 통해 친일한 부끄러움을 고백하고, 여러 차례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감사 편지 보낸 친일 후손

2002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들이 친일 문학인을 공개하고 참회하고 있다.
김남식씨는 일제 식민지 교육을 담당한 사실을 반성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동대문구 회기동 주변의 쓰레기를 줍고 있다. 그는 ‘국민학교’의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는 데도 공헌했다.

친일파 후손이 사죄한 경우도 있다. “아버지가 일제 말엽 한때 저지른 치욕적인 친일 행위를 뉘우치고 변절 고충을 고백하면서 ‘반역의 죄인’임을 자처했던 바 있음을 되새겨보면서, 저는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조선일보 기자를 지낸 소설가 김동환의 아들 김영식씨는 책과 학술대회 등에서 여러 차례 부친의 친일 행위를 사과했다.

할아버지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다는 것을 확인한 손자 이윤씨는 곧바로 사과했다. “아픈 마음으로 과거를 사과합니다. 소위 ‘조?중?동’을 필두로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속죄하지 못하는 무리에게 새삼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2005년 〈친일인명사전〉 1차 수록 예정자 명단이 발표되자 후손인 한진규씨는 민족문제연구소에 이메일을 보냈다. “조상들의 업적과 함께 친일 행동도 함께 후손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조상들의 노고를 후손이 나눠가지는 것이며, 또 그렇게 작지만 용기 있는 행동 하나만으로도 한국 사회는 조금씩 바뀌어나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친일에 대한 언론계의 반성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반면 문학계와 종교계의 반성이 눈에 띈다. 2002년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친일 문인 명단 및 친일 문학작품 목록을 공개하고 참회했다. “친일 문학인들이 국정교과서에 버젓이 활개를 치고 행세함으로써 진정한 문학의 이름을 호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민족정기를 훼손하고 겨레 모두에게 심대한 상처를 주었다.”

2000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친일에 대한 반성문을 내놓았다.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 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2005년 대한불교조계종은 ‘친일 청산을 통한 국가비전 창출과 과거사 정립 노력 촉구 성명서’를 내놓았다. 2007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는 ‘신사참배의 부일협력에 대한 죄책고백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친일인명사전〉이 민족공동체를 참회의 분위기로 이끌 수 있다면, 영광의 역사 못지않게 민족적 용기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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