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범죄를 반성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범죄를 용인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대문호 알베르 카뮈의 말에서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의 발간 의의를 찾았다.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오는 데는 광복 후 64년 세월이 필요했다. 8년 동안 학자 150여 명이 편찬에 참여했다. 먼저 문헌자료 3000여 종에서 인물정보 250만 건을 취합했다. 그리고 20여 개 전문분과 심의와 편찬위원회의 50여 차례에 걸친 면밀한 검토를 거쳐 친일 인사 4389명을 수록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편찬위원들에게 “우리 할아버지를 명단에 올린다는 생각으로 선정과 서술에 신중을 기해달라”고 말했다. 감수에 참여한 한 교수는 “고증에 고증을 거듭했다. 친일파가 사전에 빠질 수는 있지만 친일 행적이 없는 사람이 올라가거나 내용이 틀린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학계에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전국 대학 교수 1만명이 편찬을 지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독 반발하는 세력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주변과 조선·중앙·동아일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는 법원에 ‘〈친일인명사전〉에 아버지의 이름을 싣는 것과 사전의 배포를 금지해 달라’고 가처분 신청을 냈다. 하지만 기각당했다. 친박연대 한선교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이 국가에 큰 공을 세웠으니 친일파가 아니다’라는 취지의 인터뷰를 했다. 정부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공이 크다고 친일 행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공도 과도 역사의 일부다. 고치거나 지울 수 없다.

지난 11월8일 서울 효창공원 백범묘소 앞에서 열린 〈친일인명사전〉 발간 보고대회.
친일 정리가 국가 정통성 훼손?

방응모·홍진기·김성수 등 일제강점기 자사의 사주와 사장 등이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조선·중앙·동아일보는 발끈했다. 조선일보는 11월9일 ‘대한민국 정통성 다시 갉아먹은 친일사전 발간 대회’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아까운 국민 세금이 또 한 번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갉아먹는 데 쓰인 꼴이다”라고 비난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 사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친일 책임을 묻기가 어려운 계급인 만주국 중위인데도 명단에 올렸다. 건국에 이은 경제발전의 주역에 대한 모욕주기로 의심된다.…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사회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에 단호한 대처로 맞서지 않을 수 없다.”

사전에 오른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논쟁은 거의 없다.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공개하고 정리하려는 노력이 국가 정통성을 훼손한다는 소리는 뜬금없다. 친일파를 정리하지 않는 것이 대한민국 정통성을 수호한다는 논리는 궤변에 가깝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는 “조선과 동아는 구체적으로 어떤 면이 국가 정통성을 훼손했다는 것인지 적시하지 않았다. 친일 문제만 나오면 얼버무리면서 훼손됐다고만 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했다.

조·중·동은 그들에게 ‘전가의 보도’인 색깔론과 박정희를 빼들었다. 조선일보는 “조국 광복운동에 손가락 하나 담근 적이 없는 정체불명의 인사들이 사전을 만드는 데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국민 세금을 8억원이나 지원했다”라고 썼다. 동아일보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임헌영 소장이 공산주의 지하조직인 ‘남민전’에 가담한 전력을 부각시켰다. 또 좌파 인사들의 친일 행적을 너그럽게 평가했다며, 〈친일인명사전〉이 ‘좌파사관’이라고 치부했다. 중앙일보는 11월10일 칼럼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낸 민족문제연구소와 학자들을 ‘좌파’로 단정했다. 그리고 몽양 여운형 같은 좌익 성향의 인사가 빠진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조·중·동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것에 불만을 토했다. 하지만 세 신문은 모두 박 전 대통령이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을 하고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한다”라는 혈서까지 쓰며 만주군에 지원했다는 내용은 보도하지 않았다. 중앙일보는 아예 새로운 학설을 주장했다. 11월5일자 칼럼에서 “그(박 전 대통령)는 부관으로서 작전명령을 전달하고 부대 깃발을 관리했다. 여러 자료·증언을 종합하면 실제 전투에는 참가한 적이 없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은 “박 전 대통령의 임무는 전투를 지휘하는 작전 장교였다. 세상에 어느 나라 장교가 전쟁터에서 부대 깃발만 관리하는가”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김성수,중앙일보 회장을 역임한 홍진기.
방응모·김성수 친일 자료 수백 점

〈친일인명사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민족지를 자처하는 조선·동아일보의 사주 방응모·김성수의 친일 행적은 명확하다. 한 역사학과 교수는 “방응모와 김성수가 워낙 유명한 사람이어서 행적도 그만큼 뚜렷이 남아 있다. 김성수는 양면성이 있지만 친일로 볼 만한 확실한 자료가 너무 많다”라고 말했다.

조선일보의 창간 이념 ‘신문명 진보주의’는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 이데올로기다. 조선일보의 친일 기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사주 방응모는 생전에 불가피한 타협을 넘어서 적극적인 친일 행위에 나섰다. 1933년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한 방응모는 곧바로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했다. 1934년에는 조선총독부와 군부의 지원을 받는 대아시아주의 황도사상 단체의 발기인 겸 고문으로 참여했다.

방응모는 1937년 7월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 씨’ 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문했다.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이에 반대하자 방응모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원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방응모는 1937년 일반 국민에 대한 황군 원호와 개선 군인의 환송과 접대를 맡은 경성군사후원연맹 위원으로 활동했다. 내선일치를 목적으로 하는 시국강연회에 여러 차례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언론사 사주로 일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글을 여러 편 남겼다. 방응모는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으로 활동했고 1945년 11월 조선일보를 복간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기자들의 친일 행위도 두드러진다. 조선일보에서 간부를 지낸 서춘·유광렬·이상협·홍양명·홍종인 등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다. 친일 문인으로 이름을 올린 이광수·김동인·김동환·노천명·채만식·주요한 등도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조선일보 주필을 역임한 서춘은 조선총독부에서 추진하는 정책을 적극 지지하거나 직접 참여했다. 1943년 일제가 해군특별지원병제를 실시하자, 서춘은 “반도의 다시없는 영예요. 반도 청년은 순국의 결의를 다져 일시동인의 성지에 보답해야 한다”라는 글을 썼다.

편집국장·주필을 거쳐 1959년 조선일보 회장을 지낸 홍종인은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자 “국민으로서 최대한도의 의무인 징병제도의 실시는 조선인의 국민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라고 썼다. 그는 1944년 학병 입영에 대해 “조선 사람에게 역사에 없었던 감격을 일으킨 것이다. 살아 돌아온 병정들이 돌미륵같이 미더운 존재가 될 그때야말로 내선일체의 실을 훨씬 올리고 동아의 지도자 된 광영이 비로소 나타날 것이다”라고 서술했다.

조선일보가 펴낸 책 〈조선일보 사람들〉은 홍종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언제나 언론 본연의 원칙과 정도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고 이것이 그를 ‘평생 기자’로 만들었다. 광복을 맞아서는 ‘마음 놓고 우리말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감격이었다.”

조선일보 출신 친일 인사 가장 많아

동아일보 사장과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김성수. 동아일보는 일제 말 김성수가 쓴 징병 권고문에 대해 이름을 도용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아일보의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그런 사례가 너무 많다. 친일 행위는 적지 않다. 김성수는 1937년 중일전쟁의 의미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경성방송국에서 라디오 시국 강좌를 했다. 그리고 경성군사후원연맹에 1000원을 국방헌금으로 냈다.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으로 참여해 이사를 맡았고, 같은 해 10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국생활개선위원회 의례 및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활약했다.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에 감사로 활동했다.

〈친일인명사전〉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김성수는 징병제가 실시되자 1943년 매일신보에 ‘문약(文弱)의 고질(痼疾)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하라’는 징병 격려문을 기고했다. “징병제 실시로 비로소 조선인이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으로 되었다. 지난 500년 동안 문약했던 조선의 분위기를 일신할 기회를 얻었다.” 또 다른 김성수의 친일 사설이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여러 번 실렸다. 김성수는 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되자 보성전문학교의 지원율을 높이기 위해 각종 활동에 나섰다. 1943년 12월 보성전문학교 학도지원병 예비군사학교 입소식에서 “제군은 세계 무비의 황군의 일원의 광영을 입게 되었으니 학도의 기분을 버리고 군인의 마음으로 규율 있는 생활을 하라”고 훈시했다. 김성수는 해방 후 동아일보 사장에 재취임했고, 1951년에는 대한민국 부통령으로 선출됐다.

동아일보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았던 이상협은 1935년 한일병합 25주년 표창을 받았다. 표창 사유는 “때로는 언론에서 때로는 문장으로 반도 민중에게 총독정치를 철저히 이해시킴으로써 내선인의 융합에 노력했고 제국통치의 공명을 밝혀주는 등 조선통치를 위해 공헌한 공적이 실로 크다”는 것이었다.

문인 이광수는 1926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다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천재적인 문사였던 그는 천재성을 친일행위에 쏟아 글을 수백 편 남겼다. 최남선이 광복 후 “친일은 씻기 어려운 대치욕이다”라고 말했던 반면, 이광수는 “친일은 민족 보존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라고 강변했다. 이광수는 병자호란 당시 끌려갔던 여성들을 ‘홍제원 목욕’이라는 지혜를 통해 감싸안았듯이 친일했던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부친 홍진기도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1966년 중앙방송 사장과 중앙일보 회장을 지낸 홍진기는 1940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일제강점기에 판사 생활을 했다. 〈친일인명사전〉에 홍진기의 구체적인 친일 행적이 실리지는 않았다. 홍진기는 해방 이후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1960년 3·15 부정선거 사건으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석방됐다. 홍진기의 장인 김신석도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김신석은 1936년 6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어 광복 때까지 재임했다. 김신석은 1944년 경성일보에 “조선의 부형들은 어린 딸을 여자 정신대로 안심하고 보내라”고 기고했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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