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많이 내는 게 돈 버는 목적인 이상한 나라
  • 신호철 기자
  • 호수 113
  • 승인 2009.11.1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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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돈을 버는 가장 큰 목적은 세금을 내기 위해서다. 국세청에 가능한 많은 세금을 주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한다. 하루에 20만 크로네(4100만원)꼴로 세금을 낸다.” 노르웨이 갑부 올라브 톤(86)이 지난해 쓴 자서전에 나오는 말이다. 올라브 톤이 2008년에 낸 세금은 모두 133억원으로 밝혀졌다. 소득은 146억원이었다.

올라브 톤 회장의 소득·세금 내역이 공개된 것은 지난 10월22일이었다. 북유럽 신문사에게 10월 말·11월 초는 ‘부자 랭킹의 계절’이다. 10월22일 노르웨이 국세청은 2008년도 귀속분 전 국민의 소득·재산·납세 내역을 공개했다. 며칠 뒤 11월2일 핀란드 정부도 2008년도 기준 전 국민이 얼마를 벌었고 얼마를 세금으로 냈는지 공개했다.

두 나라 언론은 이 자료를 바탕으로 ‘100대 소득 부자 순위’ ‘자산 부자 순위’ ‘최고 납세액 순위’ 등을 매기며 부자 명단 만들기에 바빴다. 덕분에 북유럽 부자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노르웨이 최고 부자 재산은 2조원대

2008년 노르웨이 최고 부자는 티데만 그룹 회장 요한 헨릭 안데르센으로 신고 자산이 2조1816억원이었다. 올라브 톤은 3위였다. 노르웨이 최대 부동산 기업인 ‘올라브톤 그룹’ 창업자인 그는 2005년에는 1위였다.

올라브 톤이 살아온 길은 북유럽 자수성가 부자의 삶을 대변한다. 농사꾼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모피 장사 등을 하며 사업 수완을 키웠다. 28세 때 자기 건물을 사고 33세에 첫 식당을 열었다. 부동산 투자에 재능을 발휘해 현재 쇼핑몰·호텔·식당·술집 등 노르웨이 내에 420개, 해외 25개 빌딩을 소유하고 있다.

   
올라브 톤은 1조284억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기로 했다.
이미 자선 단체를 3개 세웠다. 그리고 2008년 9월12일 자서전 출판기념회에서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라고 선언해 충격을 줬다. “무덤에 돈을 싣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특정 개인이나 기업에 재산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에도 재산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하는 재벌이 종종 있지만 노르웨이 부자가 ‘전 재산’을 얘기할 때는 차원이 다르다. 자산·소득이 대중에게 모두 공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10월22일 노르웨이 국세청 발표 자료에 따르면 그의 자산은 1조284억원에 달한다. 그런데 올라브 톤 측은 오히려 비과세 자산이나 외국에 있는 자산도 많기 때문에 기부액 규모는 더 커지낟고 설명한다. 올라브 톤 자선재단 담당자는 시사IN과의 전화 통화에서 "노르웨이 언론은 그가 사회에 기부하게 되는 재산 규모를 약 3조원 가량으로 추산한다"라고 설명했다.

물론 올라브 톤 부부에게 자녀가 없는 것이 재산 환원의 동기일지도 모른다. 왜 아이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첩을 두어서라도’ ‘양자들 들여서라도’ 가업을 이으려는 동양식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같다. 측근들은 그가 알프레드 노벨처럼 과학 관련 재단을 만들 거라고 전한다.

올라브 톤은 재산 기부 선언을 하기 2년 전인 2006년 8월 종손(형의 손자) 26명을 불러모아 100만 크로네(2억원)씩 나눠줬다. 그의 재산 규모를 생각하면 큰돈은 아니다. 조카 10명에게 돌아간 몫은 없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을 ‘스크루지 아저씨’라고 불렀다. 평생 친척을 챙기지 않다가 말년에 인심 쓴다는 자책 같았다. 종손 26명은 성직자·엔지니어 등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들은 작은할아버지에게 돈을 받자마자 상속세(15%)를 냈고, 부유세(1.1%)도 추가로 냈다. 노르웨이에는 원체 거액 기부자가 많아서 올라브 톤이 1조3000억원 전 재산을 기부한다 하더라도 노르웨이 역대 기부 규모로는 세 번째가 된다.

노르웨이 부자가 다 자수성가형인 것은 아니다. 소득 순위가 아니라 자산 순위만 따지면 상속형 부자가 더 많다. 선박 재벌 회장의 동생으로 회사를 물려받은 란프리드 라스무센(자산 순위 6위)도 상속형 부자다. 하지만 언론이 그녀를 언급할 때는 항상 ‘수수한(nøkternt)’이라는 형용사를 붙인다. 한때 수학 교사로 일한 그녀는 대주주일 뿐 회사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소비를 거의 하지 않아 언론 인터뷰 때 “해변가에 집 살 때 말고는 딱히 돈 쓸 일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핀란드의 경우는 전통적으로 자수성가형이 부자 순위를 거의 다 차지했다. 그런데 올해는 비임금 소득(자본 소득) 분야에서 상속 부자가 상위 5명을 차지했다. 하지만 딱히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 소득 1위는 이미 1950년에 죽은 하르트발 페르 빅토르가 차지했다. 핀란드는 죽은 사람의 자산이 후손에게 상속되지 않으면 고인의 이름으로 계속 세금을 물린다. 올해 하르트발 가문 기업이 인수·합병되면서 고인과 하르트발 가의 자산 가치가 갑자기 올랐다.

   
휴대전화 기업 노키아 회장(오른쪽)과 사장(가운데)은 자수성가한 기업가로 필란드 부자 1.2위를 차지했다.
물론 북유럽 부자도 종종 사회적으로 추한 모습을 보인다. 노르웨이 자산 부자 2위인 셸 잉게 뢰케는 2003년 보트 면허를 불법적으로 취득한 죄로 2005년 법원에서 120일 구속형을 받았다. 한 신문사가 특종을 폭로한 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이 계기였다. 결국 25일을 살고 풀려났다.

프라이버시 침해? 투명성이 더 중요

노르웨이와 핀란드 부자 순위를 보면, 이 나라 부자들이 경제 규모에 비해 재산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르웨이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08년 기준으로 9만4000달러로 한국의 5배에 달한다. 하지만 노르웨이 최고 부자 자산 규모는 한국 부자 랭킹의 3위 수준이다(**쪽 표 3 참조). 게다가 한국 부자 순위는 오로지 주식 시가 총액만 계산한 것이다. 핀란드 1인당 GDP는 5만1000달러로 한국의 2.5배다. 하지만 핀란드 최고 소득자 올릴라 요르마 노키아 회장이 지난해 올린 소득 140억원은 15년 전 정주영 회장이 신고한 소득에도 못 미친다(표 4). 말하자면, 한국은 북유럽보다 국민은 더 가난하고 부자는 더 부유한 곳이다.

   
여성부자 1위 란프리드 라스무센은 소박함으로 유명하다.
북유럽 사회가 부의 불평등이 덜한 이유로 조세제도를 빠뜨릴 수 없다. 북유럽 소득세율과 관련해 오해가 있다. 지난 10월 기획재정부는 한나라당 김성식 의원에게 보낸 자료에 ‘한국의 최고 소득세율이 핀란드(32%), 노르웨이(24.6%)보다 높다’라고 밝혔다. 이 내용이 10월6일 기사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통계는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북유럽에는 지방세 및 기타 조세 부담이 한국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다. 이번에 발표된 부자 100위 명단을 보면 실질 최고 소득세율은 핀란드의 경우 53%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르웨이는 48%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하게 비교하려면 한국 고액 납세자 내역 공개가 필요해 보인다. 한국 최고 소득세율은 내년부터 35%에서 33%로 개정돼 인하될 예정이다.

노르웨이의 NRK, 핀란드의 YLE 등 주요 언론사는 전 국민 소득·납세 내역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갖가지 분석을 시도한다. 지역별·성별·직업별 분류는 물론이고 특정 연도에 태어난 사람의 소득, 특정 성씨를 가진 사람의 소득까지 목록이 다양하다. 언론의 지나친 명단 발표에 거부감을 느끼는 시민도 있다. 노르웨이 타블로이드 신문 ‘다그블라데트’ 칼럼니스트 얀 옴다흘은 정부의 전 국민 납세 내역 공개를 두고 ‘세금 포르노’라고 칭했다. 사회적 효용은 없으면서 이웃을 훔쳐보는 관음증만 충족시킨다는 지적이다. 노르웨이는 2004년 이후 우파가 집권하는 동안 납세 내역 공개를 중단했지만 올해 좌파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재개했다.

스웨덴에서도 2년 전 집권한 우파 정부가 납세 내역 공개를 어렵게 만들었다. 구청에서 인쇄물로만 열람하게 하고, 온라인 자료 수집은 접근을 까다롭게 만든 것이다. 이러면 전국 순위를 매기기 힘들다. 스웨덴 국세청의 에릭 보만 씨는 고액 납세자 명단을 구하는 <시사IN>의 요청에 “2년 전에는 가능했지만 지금은 안 된다”라고 거절했다. 그래도 끈질긴 지역 언론은 구청별 부자 순위를 매긴다. 올해 2월 사업가 한스 스타흘그렌은 신문에서 자기가 스톡홀름 리딩외 구(區) 최고 소득자라는 기사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는 <더 로칼>과의 인터뷰에서 “성범죄자의 신상도 보호하는 나라에서 왜 내 개인정보를 공중에 알리느냐”라고 따졌다. 아마도 북유럽에서 이 문제에 관해 가장 열려 있는 나라는 핀란드인 듯하다.

소득·납세 내역 공개를 찬성하는 쪽은 투명성과 사회 정의를 강조한다. 노르웨이 언론사 ‘어드레사’는 10월22일 사설에서 “프라이버시보다 투명성 쪽이 더 무게 있다고 본다. …부작용을 막을 방법은 많다. 명단 공개는 이 나라의 오랜 훌륭한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썼다. 유럽학 교수인 에릭 그린드하임은 다그블라데트  인터뷰에서 “투명성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부분이다. 시민은 우리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옹호했다. 노르웨이 블로거 글렌 멜뷔는 “탈세를 방지할 수 있고 조세 제도의 불공정성함을 고칠 수 있다면 명단 공개는 득이 된다”라고 썼다. 북유럽인에게 이른바 부유함이란 개인적 성취라기보다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실현한 사회적 산물이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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