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대통령의 부음이 날아든 5월 어느 날부터 객관 세계의 리얼리티가 점점 흐릿해진다.  내가 ‘양식 있는 시민’이었다면, 용산에서 일이 터진 정초부터 그랬어야 마땅하리라. 그러나 세계를 대하는 내 의식은 사사롭고 편파적이어서, 용산보다는 부엉이바위가 나를 더 휘청거리게 했다. 사리를 분별하기가 참 힘들다.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에게 어떤 낙인을 찍기는 쉽다. 그러나 그 낙인이 그럴 만했는지를 따져보기는 쉽지 않다. 한 사람이나 집단이 늘 옳은 말만 하거나 늘 그른 짓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헌재)는 최근 미디어법의 국회 표결 절차에 위법이 있었지만 법적 효력에는 문제가 없다고 판결해 여론의 분노와 비웃음을 샀다. 이 기괴한 말장난에 정치적 고려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헌재는 ‘권력’의 눈치를 본 것이다. 그러나 헌재는 그보다 얼마 전, 야간집회를 원칙적으로 금지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제10조가 헌법정신에 어긋난다고 판결해 ‘권력’의 눈총을 사기도 했다. 그 헌재가 바로 이 헌재다.

대한민국 법원이 힘있는 이들에게 너그럽고 힘없는 이들에게 모지락스러운 경향이 있다는 것은 삼성 재판과 용산 재판이 날것으로 보여주었지만, 그걸 근거로 법원은 늘 가진 자 편이라고 몰아세울 수는 없다. 더 많은 경우에, 법원은 상식적 판결을 내리기 때문이다. 민감하다면 민감한 사안이긴 하지만, 대법원이 문국현의 국회의원직을 박탈한 것을 두고 ‘정권에 휘둘린 정치재판’이라 비난할 수 있을까? 대법원이 이재오 눈치를 봤다? 이것은 제3자가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런데도 문국현의 주장이 일부 여론의 반향을 얻은 것은 그간 법원이 힘센 자들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기 때문일 테다.

이명박 정권은 나쁜 정권인가? 그렇다. 이 정권은 애오라지 자본의 자기증식 욕망 위에 올라탄 ‘삼마이 정권’이다. 그럼 노무현 정권은 좋은 정권이었나? 모르겠다. 희망 잃은 노동자들이 잇따라 제 몸을 살라도 “분신을 투쟁 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라고 그들을 훈계한 이가 노무현이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한·미 FTA를 날조된 통계수치 위에서 강행한 이가 노무현이며, 자신의 정치적 결정 때문에 이역만리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자국 시민에게 예의를 갖추기는커녕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테러에 단호히 대처하겠다며 ‘위엄’을 보인 이가 노무현이고, 당시 여당과 한나라당 사이에 무슨 이념 차이가 있느냐며 이른바 대연정(大聯政)을 꾀했던 이가 노무현이다. 특권(층)이 싫다며 좌충우돌하던 그가 미움이라는 열정을 조금만 합리적으로 배분했더라면, 오늘날 한국 공교육의 터미네이터가 돼버린 외국어고등학교라는 괴물은 진작 없어졌을 것이고, 그 자신이 피해자였던 학벌주의의 힘도 조금은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한 줌의 회의도 발붙일 곳 없는 세상은 얼마나 끔찍한가

노무현은 자신을 어려운 사람들의 대표자로 여긴 게 아니라 어려운 처지를 이겨내고 최고 권력을 쥔 특별한 개인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구조’와의 싸움을 그리 쉽게 포기했던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대통령 선거 때부터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뱃심 좋은 도박꾼 태도를 취함으로써, 한 개인이 제 편의를 위해 공동체의 운명을 판돈으로 거는 이기적 모험주의를 ‘정치의 정석’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정운찬씨, 이명박씨, 당신들 정말 볼품없는 사람이군요!”라며 시비를 따져 보려다가도, 우선 내 발밑이 불안해지고, 내가 한때 지지했던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의 발밑이 불안해 보이는 것이다.

세종시는 노무현 정치학의 백미다. 노무현은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성감대를 건드리며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을 판돈으로 걺으로써, 반대파를 분열의 늪에 빠뜨리는 데 성공했다. 수정론이나 폐기론은 특정 지역에 대한 다른 지역들의 집단 따돌림이라는 범죄적 효과 없이는 현실화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나는, 이 사안에서 박근혜 지지자가 될 수밖에 없다.

소설가 최인훈은 지금부터 한 세대 전에 쓴 두 연작 장편에서 (지금 나처럼) 실천이성 바깥의 관념에 몰두하는 인간을 ‘회색인’이라 부르고, 그 회색인의 관념 여행을 ‘서유기’라 불렀다. ‘회색인의 서유기’가 지금 한국에서 수행하는 기능은 고작 삼성의 나라, ‘삼마이 정권’에 대한 승인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줌의 회의(懷疑)도 발붙일 곳 없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살기 끔찍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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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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