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대화가 시작된 것은 1971년이었다. 그 이후 모두 596회 회담을 가졌다. 초기의 남북회담은 사실상 ‘총 없는 전쟁’이었다. 상대방의 주장에 밀리면 패배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지지 않으려고 총력을 경주했다.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 국보법 폐지 등 정치·군사 문제 우선 해결을 내세웠고, 우리는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해 쉬운 것부터 합의 이행하자는 실질적·기능적 접근을 견지함으로써 때로는 ‘회담을 위한 회담’으로 비춰지기도 했지만 회담의 주도권은 항상 우리가 갖고 있었다.

우리 정부가 남북회담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던 것은 남북회담이 상호 이해와 신뢰 형성, 화해와 협력, 긴장완화, 상호의존 심화 그리고 국민 여망에도 부응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회담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북한을 대화의 틀 속에 묶는 것이 평화의 출발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봉조(전 통일부 차관)
북한은 지난 8월부터 대남 유화 공세를 계속하고 있다. 개성공단 억류 근로자 석방, 현정은 현대 회장과 공동보도문 채택,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사절단 파견 및 이명박 대통령 예방, 추석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고, 이어 우리 측이 제의한 임진강 수해방지 실무회담과 남북적십자 실무접촉에 즉각 호응해 임진강 방류로 인한 우리 측의 인명피해에 대해 사과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최근에는 북한 측 제안으로 남북 정상회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접촉이 제3국에서 진행되었다. 북한의 대남 유화 공세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남북 정상회담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번 접촉은 북핵 문제와 회담 장소 문제에 대한 우리 측의 ‘원칙적 입장’에 북한이 난색을 표함으로써 접점을 찾지 못했고 이러한 접촉 사실이 언론에 유출됨으로써 정상회담 개최 논의는 당분간 표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사실 원자바오 총리의 방북 결과와 미국 고위 관리의 정상회담 관련 언급 등 작금의 정세 추이를 보면 북한의 유화 공세가 남북 정상회담을 겨냥했음을 예측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물론 북한도 우리 정부가 이를 쉽게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판단 아래 제안했을 것이다. 그동안 이명박 정부가 남북대화에 소극적인 것을 북한이 역이용하는 부분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북한의 대남 유화 공세는 북·미 대화가 본궤도에 진입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회담의 주도권을 그들이 가지면서 우리 정부가 대화 테이블에 나오도록 다양한 형태의 대화 공세를 계속할 것이다.

북한이 남북대화에 적극적인 것은 북핵을 둘러싼 미국·중국 간의 협력구도 정착과 연관돼 있다. 지난 7월 말 열린 미·중 전략대화에서 북한 문제는 이제 미·중의 G2가 협의·해결해야 할 과제로 인식되었다. 북한은 과거의 북·미 대화와 남북대화라는 두 가지 통로를 활용한 생존전략을 북·미·중 3자 구도로 전환하면서 남북관계를 보조 수단으로 하려는 전략적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남북관계의 진전 또는 그것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 3자 구도 진전에 도움이 되리라 보았기 때문이다.

북한, 통미협중(通美協中) 전략 추진에 주력

그동안은 남북대화가 정체된 상황에서 중국의 역할 증대가 불가피했다. 북·미 양자 대화가 회담의 형식 문제로 답보 상태에서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자 중국은 다이빙궈 국무위원과 원자바오 총리가 나서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북핵 문제를 “양자 또는 다자 대화를 통해 해결하기를 희망하며 다자회담에는 6자회담도 포함돼 있다”라는 대답을 이끌어낸다. 미·중 간의 협력을 통해 북한을 6자회담에 복귀시키겠다는 미국의 북핵 해결 접근법에 북한이 가깝게 다가선 것이다. 북한은 남북대화가 열리더라도 남북관계가 당장 진전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통미협중(通美協中) 전략 추진에 역점을 두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상 추진을 최우선 과제로 하면서 과거 남북관계의 진전 과정에서 획득했던 경제 협력·지원을 중국을 통해서 확보하려는 것이다.

최근의 한반도 역학구도는 종전의 3자(한·미·일) 축과 새로운 양자(미·중) 축의 중층 구도로 볼 수 있다. 향후 한반도에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것과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우리가 기회를 틀어쥐고 이를 적극 이용함으로써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선도적 구실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북한과의 대화 창구를 여는 것이 주도권 확보에 관건이 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정상회담의 기회를 살려나가는 전략적 결단이 요구된다.

기자명 이봉조 (전 통일부 차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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