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김경준씨(오른쪽 가운데)가 11월16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청사에 들어오고 있다. 김씨는 의식적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경준아, 아이들이 널 놀려서 그렇게 속상했니? 하지만 괜찮아. 왠지 알아? 넌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야. 네가 바보가 아니란 걸 모르는 그 애들이 진짜 바보란다. 그리고 이걸 언제나 명심해라.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진짜 이기는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이제부턴 절대로 울어선 안 돼. 다시 한번 울면 넌 정말 바보야. 알겠니?”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김경준씨의 누나 에리카 김이 1995년 쓴 자서전 〈나는 언제나 한국인〉에 나오는 구절이다. 11월16일 저녁 6시 인천공항 아시아나 비행기 201편에서 내리던 김경준씨는 아버지의 이 말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8번 게이트를 통해 나온 그가 사진 기자들과 마주치며 보인 첫 번째 반응은 미소였다. 

수건으로 가린 김씨의 두 손은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건너편 입국장 A 게이트에는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김경준은 국제 사기꾼’이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김경준 규탄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검찰 수사관들에 양팔을 잡힌 채 포토라인에 섰을 때 플래시가 연방 터졌고 김씨는 감정이 흔들리는 듯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하지만 이내 김씨는 다시 얼굴을 펴며 표정을 다듬더니 웃는 듯 마는 듯 복잡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시간 뒤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에 들어올 때는 기자들에게 분명한 웃음을 지어줬다. 자연스럽지는 않았지만 웃으려는 의지는 분명했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진짜 이기는 사람이다.’ 그는 입국 전아버지와의 전화통화에서 “아직 죽지는 않았으니까, 가서 싸우겠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이명박 후보(위 가운데) 측은 자신과 BBK와의 관계를 입증하는 문서와 홍보물은 모두 김경준씨가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김경준씨가 왔다. 옵셔널벤처스 주가조작 사건으로 2001년 12월 미국으로 도피한 지 6년 만이고, 2004년 5월 FBI에 체포된 지 3년6개월 만이다. 대통령 선거를 33일 앞둔 때다.

마치 팝스타처럼 ‘환대’를 받으며 입국한 김경준씨는 한국에서 이미 유명 인사가 되었다. 올해 대통령 선거가 그의 한마디에 달려 있다는 식이다. 여권에는 그가 입을 열면 이명박 후보는 ‘한 방’에 무너질 것으로 기대한다. 반면 한나라당에서는 그를 ‘제2의 김대업’이라고 부른다. 대통령 선거 시기를 맞춰 기획 입국해 이명박 후보에게 흠집을 주려는 ‘공작 정치’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기획 입국설을 의식해서인지 김경준씨는 서울중앙지검 엘리베이터에 타기 직전 고개를 돌려 기자들에게 “일부러 이때 온 거 아니에요. 민사 소송 끝나서 온 거예요”라고 말을 던졌다. 

김경준씨는 그를 욕하는 이명박 지지자에게나 그의 ‘한 방’을 믿는 신당 진영에게나 모두 오해를 받는 면이 있다. 이명박 지지자에게는 과소평가되고, 반이명박 진영에게는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다.

한나라당 이명박 지지자들은 그를 ‘제2의 김대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김대업과 김경준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김대업씨가 이회창 후보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던 반면 김경준씨는 이명박 후보와 명색이 동업을 했던 사람이다. 김대업과는 처음부터 위치가 달랐다.

한편 이명박 후보를 날릴 ‘한 방’을 믿는 범여권은 김경준씨가 입을 열면 이명박 후보에게 치명타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김경준씨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여권 후보에 유리한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고 본다.
 

ⓒ한겨레MAF 펀드 홍보물에는 이명박 후보가 회장으로 등장(오른쪽)하며, 이 후보가 BBK 전 직원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도 실려 있다.

BBK-옵셔널벤처스 사기 사건은 워낙 복잡한 금융 사건이라 쉽게 이해하기가 힘들다. 몇 몇 언론이 BBK 자금 흐름도를 정리한 도표는 전자회로도를 연상시킬 정도다. 〈시사IN〉은 BBK를 둘러싼 문제들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봤다. 첫째는 이미 이명박 후보의 책임이 드러난 문제다. 김경준이 뭐라고 하든 이미 드러난 자료와 증거를 통해 진위를 가릴 수 있고 이 후보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부분이다. 둘째, 앞으로 풀릴 의혹이다. 김경준의 진술 및 검찰 수사를 통해 진위가 갈릴 수 있는 의혹들이다. 셋째, 이명박 후보의 책임을 밝히기가 어려운 사안이다. 검찰 수사가 어떻게 끝나든 이명박 후보 측에서 쉽게 관련성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이다.

 

1.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BBK 사건은 ‘논란’과 ‘의혹’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어 뭐 하나 확실한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이미 의혹이라고 하기에는 그 수준을 넘어선 내용이 있다. 이명박 후보가 과거 ‘BBK 전도사’ 구실을 했고 (법적 사실 여부를 떠나) ‘BBK 회장 노릇’을 했다는 점이다.

BBK는 펀드를 운영하는 투자자문 회사였다. MAF라고 불린 펀드를 주요 상품으로 내세웠고 이 펀드에 심텍·장로회신학대학장학재단(장신대재단)·삼성생명·오리엔스캐피탈·다스 등이 투자했다. 우연인지 이 모든 투자자가 이명박 후보와 인연이 있다. 당시 삼성생명과 심텍 사장은 고려대 동문이었고 장로회신학대장학재단은 이명박 후보가 감사로 있었다. 다스(옛 대부기공)은 이명박 후보의 형이 회장으로 있는 기업이다.
 

2001년 BBK가 입주하고 있던 서울 테헤란로 코스모타워 빌딩.

이명박 후보는 지난 7월19일 한나라당 경선 청문회 때 장신대재단 장학기금 4억원을 BBK에 투자하도록 소개했다고 시인했다. 간단한 답변이었지만 실은 주목할 만한 말이었다. BBK 투자 권유를 자신이 했다는 걸 처음 인정한 사례였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BBK 투자를 지인에게 권유한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코스닥 기업 (주)심텍  투자가 대표적인 경우다. BBK 펀드에 50억원을 투자했던 (주)심텍은 이명박·김경준·김백준씨를 사기 혐의로 검찰에 고소한 적이 있다. 2002년 3월 필자와 만난 심텍 김영구 부장(현 이사)은 2000년 9월 서울 중구 순화동 삼성생명빌딩 지하1층 중국음식집에서 이명박 후보를 만난 일을 기억했다. 그는 당시 이명박 후보가 BBK를 자기 회사라고 소개했고 믿고 투자하라고 보장했다고 말했다. 2002년 3월은 이미 심텍이 이명박·김경준 측과 분쟁을 끝냈을 때라 김영구씨가 굳이 과장이나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었다.

한나라당 측은 심텍 건의 경우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린 사안이라고 반박한다. 실제 검찰은 2002년 1월29일 이명박·김경준·김백준 씨 모두에 대해 무혐의 처분했다. 심텍이 한  달 전 고소를 자진 취하한 뒤였다.

당시 무혐의 처분을 내린 이석환 검사는 현재는 미국에 유학 중이다. 11월16일 그에게 당시 상황에 대해 물었다. “이명박 후보가 주변에 투자 권유를 했다는 주장이 거짓인가? BBK 실소유주에 대한 판단을 한 것인가?”라고 묻자 이 검사는 “심텍이 제기한 사기 혐의에 대해 무혐의 처분했다. 나머지 수사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라고 답했다. 이명박 후보 측은 심텍이 BBK에 투자한 것은 이명박 후보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소개를 해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장신대장학재단에 투자를 권유했던 사람이 자신 아파트 이웃에 살고, 아내와 친분이 있는 전세호 사장 회사의 BBK 투자는 모른 척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명박 후보는 2000~2001년께 최소 네 군데 이상 언론사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BBK 회장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한나라당 측은 이 보도가 모두 오보라고 주장한다.


이명박 회장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명박 후보를 BBK 혹은 범BBK 그룹의 회장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BBK가 만든 펀드 홍보 브로셔에는 이명박 후보가 BBK 직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한나라당 측은 이 모든 것이 김경준씨의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한나라당 고승덕 변호사는 11월7일 기자회견에서 “이명박 후보가 김경준이라는 사기꾼에게 속아 투자를 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이명박 후보는 자신이 ‘속았다’라든지 ‘사기당했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최근 한 발짝 물러났다. 이 부분은 다른 당 후보로부터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설사 이명박 후보가 BBK의 ‘얼굴 마담’으로 팔렸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명박 후보 지지율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2. 검찰 수사로 진위가 밝혀질 것들

다스(옛 대부기공)가 BBK에 투자한 돈이 실질적으로 이명박 돈이었다는 의혹과 도곡동 땅 차명 소유 의혹은 검찰 수사로 진위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되는 부분이다. 다스는 BBK 펀드에 190억원을 투자했고 아직 140억원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김경준씨는 이 돈이 다스의 돈이 아니라 이명박 후보의 돈이라고 말해왔다. 나아가 신당은 이 돈이 도곡동 땅 매각 대금이라고 주장한다. 한나라당 측은 도곡동 땅 매각 시점과 다스의 BBK 투자 시점에 날짜 차이가 난다며 의혹을 부정하고 있다.

3. 앞으로도 밝히기 힘든 것들

대통합민주신당 측은 옵셔널벤처스 주가조작에 이명박씨가 개입했다고 주장한다. 주가조작 계좌 가운데 LK이뱅크 계좌가 쓰인  것이 이 의혹을 부추겼다. 이명박 후보의 다른 의혹과는 달리 주가조작은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사실로 입증될 경우 이 후보에게 가장 타격을 줄 만한 문제다. 하지만 이는 검찰이 쉽게 입증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BBK의 회사 운영에 이명박 후보가 개입했거나  혹은 이명박 후보의 이름이 팔린 흔적이 다수 보이지만 옵셔널벤처스 쪽은 아직 정황 증거조차 부족하다. 김경준씨 스스로도 이명박 후보가 옵셔널벤처스 주가조작에 이명박 후보가 개입되었다는 주장은 한 번도 편 적이 없다.

기자명 신호철 기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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