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영 번역가는 지금까지 번역서 100권을 낸 과학책 전문 번역가다. ⓒ시사IN 이명익
노승영 번역가는 지금까지 번역서 100권을 낸 과학책 전문 번역가다. ⓒ시사IN 이명익

노승영은 과학책 전문 번역가다. 영문과를 나와서 대학원 인지과학협동과정에 진학해 언어학·철학·심리학·신경과학·컴퓨터공학을 공부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고 환경단체에서 일하다 2007년부터 번역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번역서 100권을 냈다. 1년에 6권, 하루에 200자 원고지 45장을 우리말로 옮긴다.

‘AI가 대체할 직업 1순위’로 번역가·통역사가 꼽히는 시대(90.9%,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 온라인 설문조사, 2023), 과학적 태도가 서로를 구할 것이라고 믿는 ‘이과 출신’ 번역가가 인공지능을 바라보는 시선이 궁금했다. 의외로 비관적이고, 놀랍도록 단호했다.

최근 〈조선일보〉에 “이미 AI 때문에 타격을 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번역의 범위가 굉장히 넓다. 단행본도 있지만 정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실용적인 부문이다. 관광 통역이나 기업의 매뉴얼, 각 정부의 법률 문서, 홈페이지, 프로그램이나 애플리케이션의 설명들…. 그런 것이 다 번역의 대상인데, 대부분 이미 기계번역이 장악한 것 같다. 마이크로소프트도 기술문서를 기계번역한 지 오래다. 몇 년 전부터 번역회사들은 먼저 기계번역을 한 뒤 사람에게 포스트 에디팅, 즉 감수를 맡기고 있다. 중국 드라마를 서비스하는 한 업체는 들여올 작품을 정할 때 기계번역을 쓴다. 출판 쪽은 아직 판권이란 게 있어서 덜하지만, 출판사가 박리다매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번역 말고 감수만 하라’고 요청해올지 모른다.

구글, 파파고에 이어 딥엘(deepL) 번역 성능이 화제가 됐다. 챗지피티는 따로 훈련하지 않았는데도 번역을 한다. 이런 서비스를 사용해봤나?

일에는 전혀 쓰지 않는다. 직접 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나는 나의 번역을 하는 거니까. 저작권이 만료된 책을 번역할 때 기존 한국어판을 참고하는데, 그 이유가 똑같은 번역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번역가는 정답을 찾아야 하지만 그건 자신만의 정답이지, 다른 번역가들에게는 또 다른 정답이 있다. 번역가마다 해석하는 게 다르다. 기계번역은 표절에 무관심하다. 사람과는 접근법이 반대다. 다만 영어가 아닌 다른 외국어 자료를 볼 때는 내용 파악을 위해 기계번역을 쓰고, 도움이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최종적 근거로 쓰진 않는다. 오역을 해도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번역은 실력이 아니라 속력에 따라 보상받는다”라고 쓴 적이 있다. AI는 빠른 데다 무료다.

사람들은 싸고 빠른 번역을 찾겠지만 나까지 그 방향으로 갈 순 없다. 나의 쓸모가 점점 없어지다가 나중에는 필요 없어질 것 아닌가. 산업혁명 이후로 숙련공들이 자신의 기술을 매뉴얼로 만들면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과정이 반복돼왔다. 이제 인간의 정신적 노동까지도 대체하는 단계에 와 있다. 창의력이 필요한 부분이 마지막에 남을 텐데, 과연 인간의 창의력이란 게 기계와 질적으로 다른지는 탐구해봐야 한다.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 자체도 물질로 이뤄진 존재니까. 앨런 튜링은 인간의 마음이 컴퓨터가 계산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봤다(그는 앨런 튜링의 글 모음집 〈지능에 관하여〉를 번역했다). ‘계산주의적 마음 이론’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인간의 두뇌도 정보처리 기계에 불과하고, 특별한 자유의지나 의식이란 건 없을지도 모른다.

번역가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권하겠나?

한국법제연구원이라는 기관이 있다. 한국의 법령을 영어로 번역해서 제공한다. 지금까지는 거기 계신 번역사분들이 직접 번역을 했는데, 이제 인공지능 번역을 도입하려고 한다더라. 나는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이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해서 다 거기에 넘겨버리는 데 동의할 것인지, 아니면 개발을 그만하고 수작업으로 돌아갈지. 이대로라면 인간의 가치, 노동의 가치가 없어지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렇게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그렇게 안 가면 된다.

기술개발을 멈추자는 뜻인가?

그렇다. 물론 못할 것이다. 인류는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해왔고, 자본 증식을 위해 신기술을 계속 도입할 테니까. 우리는 에너지 위기나 전쟁으로 인류의 종말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만, 인공지능에 의해 인간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식의 종말 시나리오도 가능하지 않을까. 의도적으로 피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고 본다.

한 강연에서 기본소득을 언급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빅데이터로 기여하는데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빼앗기기만 하고. 인간 번역가와 AI를 비교하는 게 의미가 없는 것이, 우리가 수백 년 동안 번역해놓은 걸로 학습을 한 거다. 기본소득이라는 형태로 그런 노고를 인정해줘야 한다는 논의에 귀 기울일 만하다. 번역가는 원래부터 좀 아슬아슬한 직업이었고, 출판 자체가 사양산업이어서, 이제 기계와 경쟁하는 상황이 됐다. 인간 번역가가 지금처럼 노동의 대가를 받으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게 안 되면 다들 번역을 그만둘 것이다. 그러면 언어의 발전도 끝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정부에서 쌀농사를 보호하는 것처럼, 이제는 인간의 정신노동도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장 논리로는 도태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시간과 비용이 사실상 0이므로, 소비자에게 필요한 수준만 넘어선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기계번역을 쓸 것이다. 자생력을 갖기 어렵다.

노승영 번역가는 하루에 200자 원고지 45장을 우리말로 옮긴다. ⓒ시사IN 이명익

번역가가 멸종하면 언어의 발전이 끝나나?

일할 때 어떤 단어를 무엇으로 번역해야 할지, 다른 사람은 뭐라고 번역했는지 검색을 해보는데, 이미 기계번역이 된 문장이 너무 많이 나온다. 사실 출처를 알 수 없다. 사람이 했는지도 구별하기 어렵다. 여러 번역 엔진이 제각기 다른 번역을 하는데, 기계에게는 왜 이렇게 번역했는지 물어볼 수가 없다. 그렇게 수많은 번역들이 쏟아져 나와 우리의 정보공간을 가득 메우면, 어떤 것도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지도 모른다. 보르헤스가 말하는 ‘바벨의 도서관’처럼, 가능한 모든 정보들이 존재함으로써 어떤 정보도 의미가 없어지는 상태다.

챗지피티가 블로그 글을 쓰는 시대다.

이미 기계가 만들어낸 문장을 다시 기계가 학습하고, 그걸 또 다른 기계가 학습 데이터로 쓰고 있다고 의심한다. 일종의 자가발전인데, 이러면 세상에는 점점 뭉뚱그려진 정보만 남게 될 거다. 무엇보다 기계번역은 평균을 만드는 작업이다. 우리가 책에서 얻고자 하는 ‘탁월함’이라는 관점은 빠져 있다. 원리를 파악하는 게 아니라 통계로 예측하다 보니, 통계상에 있는 잡음이 계속 쌓이면 신호 자체가 틀리게 된다. 챗지피티가 엉뚱한 얘기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AI가 대체할 직업’에서 번역가·통역사가 1순위로 꼽혔다.

효율성 때문에 우리가 기계한테 상대가 되지 않는데, 사실 모든 걸 효율적으로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살 수도, 일부러 더 오랜 시간 걸려서 무언가를 할 수도 있다. 그게 의미 있는 일이라면 말이다. 번역할 때 독자를 상정하고 그 독자와 대화를 한다. 살아온 인생이 있고, 살과 피를 가지고 있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 번역이다. 기계는 문장을 이해하지 않고 텍스트를 변환한다. 글자만 보면 똑같아 보이지만 관계 자체가 다르다. 예술가들이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굉장히 오랜 시간이 지나면 차이가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생성 AI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공들이는 걸 포착해주는 독자들이 있길 바란다. 사실 번역가로서 엄밀한 표현을 쓰려고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고 시간을 들인다. 그런데 요즘 신문을 보면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문장들, 특히 정치 영역에서 의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하는 말들이 난무한다. 거기에 대해서 별다른 문제 제기가 없다. 당연하다고 여기고 넘어간다. 말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 자체가 사회적으로 의미가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면, 특히 기자들이 끝까지 질문했으면 좋겠다. 말의 의미에 대해서.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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