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입양인들과 함께하는 문화예술협회(KADU)'의 박찬호 대표. ⓒ시사IN 신선영
'해외 입양인들과 함께하는 문화예술협회(KADU)'의 박찬호 대표. ⓒ시사IN 신선영

아직 팬데믹이 한창이던 2년 전, 어느 ‘화상 대화’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박찬호 사진가는 한국 고유의 제의 문화를 사진으로 기록해왔다. 2018년 한국 사진가로는 드물게 ‘죽음의 공포, 그리고 죽음을 둘러싼 의식을 사진에 담다’라는 제목으로 〈뉴욕타임스〉에 소개되었다. 이후 미국에서 사진 에세이집 〈귀-RETURN〉이 출간되었다. 온라인으로 독자와의 대화를 하는데 머리가 희끗한 남성이 질문을 던졌다. “나는 한국말을 할 줄 모르고 한국 문화를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라고 말해도 될까?”

사진과 관련된 질문은 아니었지만 그는 성심껏 답했다. “한국 사람이 맞지 왜 아닌가, 보낸 사람 잘못이지 당신 잘못이 아니다.” 그날 밤 잠이 안 왔다. 눈물 흘리며 질문하던 남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해외 입양인에게 관심을 갖게 된 날이다. 이후 숱한 사연을 접했다. 인종차별이 심한 텍사스에 입양된 누군가는 마을의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다. 흑인과 결혼해 세 아이를 낳았지만 첫째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미국으로 입양되고도 시민권을 얻지 못해 한 번도 해외에 나가본 적 없는 이도 있었다.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촛불 이벤트’를 열고 한국 이름 지어주는 작업을 했다. 어느 날 벨기에에 사는 한 해외 입양인이 한국에 가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전시회를 열 계획이라고 했다. 눈물 흘리는 소녀의 그림에서 상처받은 당사자의 마음이 읽혔다. 개인이 전시회를 열려면 비용이 많이 들었다. 조그맣게 전시회를 열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참여 작가가 한두 명은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어 물었다. 미술, 사진, 영상 작업을 하는 해외 입양인 30명이 손을 들었다. “입이 방정이었다.” 박찬호 작가가 그 순간을 회상했다. 그가 대표로 있는 ‘해외 입양인들과 함께하는 문화예술협회(KADU)’가 주최한 ‘KADU 대동예술제’의 판이 그렇게 커졌다.

관객으로 전시회에 참석한 젬마 어빙 씨와 전시 참여 작가 키무라 별 씨, 김은애씨(왼쪽부터). ⓒ시사IN 신선영

13개국 해외 입양인 작가 30여 명의 작품이 4월9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여의도 국회에 전시되었다. 주제는 ‘마더랜드(motherland, 모국)’. 서울 인사동 마루아트센터에서 4월19일부터 5월2일까지 전시가 이어진다. ‘해외 입양 70년, 해외 입양을 다시 생각한다’라는 주제로 국제입양인포럼을 개최하고, 전통 예술 대동굿 공연도 열린다. 박찬호 작가는 “지금도 한 해에 300여 명이 해외에 입양되고 있다. 못 먹고 못 입힐 때의 얘기가 아니라는 의미다. 작품을 통해 해외 입양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현재 진행형인 일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국회에서 오프닝 행사가 열린 날, 키무라 별 작가가 자신의 작품 앞에 섰다. #6261이라는 숫자가 적힌 종이를 여러 장소에서 들고 찍은 사진이다. 한국 고아원에서 시작해 홀트아동복지회 임시보호소, 벨기에 입양 기관, 벨기에의 첫 번째 집으로 이어졌다. 완성하기까지 10여 년이 걸렸다. ‘뿌리’를 찾는 여정이 간단치 않았다. 6261은 그의 입양 번호다. 그는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태어나, 1969년 벨기에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그해 일본산 벚나무로 유명한 벨기에 브뤼셀의 한 지역은 한국 아이들로 넘쳐났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백인 구세주 의식은 자신들의 부유함에 대한 기독교적인 죄책감으로도 작용하고 있었다”. 일종의 유행처럼 잡지에도 광고가 실렸다. 그의 부모는 국내 입양에 실패하고 그와 만났다. 한국인은 동남아 출신에 비해 피부가 희고 얌전하면서 순종적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일본인을 선호했지만 한국인은 일본인과 ‘비슷’하면서도 비교적 ‘싸고’ 알선 기관의 일처리도 ‘빨리빨리’ 진행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해외 입양이 시작된 지 70년이다. 1950년대 전쟁고아, 혼혈 아동 등을 해외 양부모와 연결시켜주는 데서 시작된 해외 입양은 1970~1980년대에 절정이었다. 한국은 ‘세계 최대의 아동 수출국’이었다. 약 20만명이 입양됐고 입양 기관은 수수료를 챙겼다. 초창기 유럽으로 건너간 아이들 중 키무라 별 씨가 있었다. 백인들 사이에서 자라며 한국인, 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이 부끄러웠다. ‘성 상품화’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복종하는 존재로 취급됐다. 양부모에게 유대감을 갖지 못한 그는 10대에 독립했다. 미술학교에 다니며 오히려 ‘아시아인스러움’을 발견했다. 그간의 증오를 표현주의 양식에 담았다.

키무라 별 씨의 작품. 첫 번째 작품의 6261은 그의 입양 번호다. ⓒ시사IN 신선영
키무라 별 씨의 작품. 첫 번째 작품의 6261은 그의 입양 번호다. ⓒ시사IN 신선영

1988년 스무 살 여름, 단편영화 〈입양〉을 만들었다. 해외 입양을 주제로 아시아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담은 작품이다. 이듬해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았다. 성공한 해외 입양인을 위해 만들어진 고국 방문 행사였다. 벨기에로 돌아오며 어딘가 이용당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한국을 방문한 1991년 그는 친가족을 만났다.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그 만남을 계기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벨기에로 돌아와 한국 입양인 단체 ‘유로-코리안 리그(EKL)’를 만들었다.

‘세계 최대의 아동 수출국’ 한국

25세에 한국을 다시 찾았다. 소속 단체의 한국 지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많은 아이들을 해외로 보낸 한국을 이해하고 어머니로서, 시민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데 실패한 생모가 소속된 사회를 이해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해외 입양을 중단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어느 날 스스로 ‘백인 구세주’처럼 행동했다는 걸 깨달았다. 한국 사회의 운동가로부터 한국의 사고방식, 관습을 배우고 이해했다. 체류 기간은 13년으로 늘었다.

1990년대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베를린 리포트〉 같은 영화가 실화를 토대로 제작되면서 입양 가정에서의 학대를 묘사했지만 입양 관행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해외 입양인의 국적이나 정체성 문제, 친부모 찾기의 어려움 등 그간의 사정이 조금씩 알려지기는 했다. 그는 활동가로서 발언하고 행동했다. 동포에게만 주어지던 F4 비자를 입양인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힘썼고 ‘입양아’가 아니라 ‘입양인’이라는 말을 쓰자고 제안했다.

입양인 900여 명이 자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자신이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지 아는 일은 중요했다. 그도 생일과 이름을 알지 못해 한참 괴로웠다. 그의 친모가 지어준 별이라는 이름도 나중에야 만났다. 입양인, 입양 기관, 양부모, 친부모, 사회복지사들을 만났고 고아원(보육원)과 시청을 오갔다. 입양 단체 직원들은 기록이 불탔다고 말하면서 공개를 꺼리기도 했다. 어떤 친부모는 입양 보낸 아이의 정보를 얻기 위해 기부금을 내야 했다. 입양인 개인의 기록이 기관의 ‘재산’인 것처럼 굴었다.

캐나다에 거주하는 그는 이제 30년 차 해외 입양 운동가, 예술가, 아카이비스트(기록보관 담당자)이다. 입양인이라는 정체성은 20·30대 젊은 시절 그의 작품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 첫 전시회 〈서양에서 동양까지〉를 열기도 했다. 40대에는 디아스포라, 강제 이주, 탈식민주의로 주제를 확대했다. 한국에서 성소수자로 차별받을 때는 성별과 성적 지향에 대한 주제로 관심이 옮아갔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또 다른 작품은 팬데믹 기간 많은 아시아인들이 직면했던 ‘아시안 혐오’에 대한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해외 입양인 2세대 자놀린 감독(맨 왼쪽)이 키무라 별 씨의 인터뷰를 촬영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해외 입양인 2세대 자놀린 감독(맨 왼쪽)이 키무라 별 씨의 인터뷰를 촬영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그를 인터뷰하는 내내 누군가 장면을 촬영했다. 입양인 2세대 자놀린 감독이다. 그의 어머니는 네 살 때 프랑스에 입양됐다. 어머니의 모국에 대한 관심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해외 입양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준비 중이다. 부모의 정체성이 다음 세대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키무라 별 씨는 “이번 전시 작품에 해외 입양인들의 정서적 고통과 트라우마가 드러난다. 작품을 통해 입양인들의 고충을 이해한다면 해외 입양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중년의 해외 입양인으로서 죽기 전 보고 싶은 풍경이 있다. 해외 입양이 종식되는 것, 그게 어렵다면 아시아계 가정에 우선순위를 둔 ‘공개 입양’이다. 출생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고 접근성을 보장하는 일이 그 기본이다.

인터뷰를 하던 키무라 별 씨가 누군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김은애(도핀 김) 작가였다. 이번 전시회 참여 작가 중 한 명이다. 주로 입양의 상처나 아픔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작품들 사이에서 그의 그림은 시선을 끈다. 한국의 풍경과 전통문화 등의 요소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그의 명함에도 ‘한국에서 영감을 받는 아티스트’라고 적혀 있다. 한국을 방문한 건 10여 차례, 한국은 그에게 창작의 원천이 되고 있었다.

김은애 작가. 한국의 전통문화와 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1968년 5월1일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아들 둘과 딸 한 명이 있는 벨기에 가정에 입양되었다. 1970년 8월14일 인구 1만명이 안 되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을 때, 한국에서 온 아이들 30명과 함께였다. 그가 오고 1년 뒤 또 다른 한국 소녀가 동생으로 입양되었다. 가정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지만 감사하다고 여기는 편이다. 특히 돌아가신 양부와 애틋했다. 관용이 부족한 어머니와는 부딪쳤다. 다른 사람에게 그가 길거리에서 발견되었다고 말하는 어머니에게 소문 내는 걸 그만두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브뤼셀의 유럽 기관에서 행정보좌관으로 일하는 그는 1997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부산에서 태어났다는 걸 그때 알았다. 친가족 찾는 일을 돕던 키무라 별 씨도 이때 만났다. 5년 뒤에야 가족을 찾기로 결심하면서 한국에 다시 왔다. 방송에 출연했고 두 가족이 그가 친딸이라 주장했지만 DNA가 일치하지 않았다. 키무라 별은 그를 위해 부산시청에 갔고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한 달 만에 인천에 사는 어머니를 만났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뒤였다.

한국에 대한 기억을 끌어안는 경험

어머니가 젊은 시절 그를 가졌을 때 아버지에게는 이미 아이 세 명과 가정이 있었다. 어머니의 할아버지가 그를 버리기로 결정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복 오빠의 말로는 어머니와 아버지도 합의한 일이라고 했다. 그는 “진실을 결코 알지 못하겠지만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2006년 이탈리아 남부 지역의 자연 풍경에 매료되어 시작한 그림에 대한 열의가 한국을 오가며 무르익었다. 전시회에 참여한 건 세 번째다. 한국에 있을 때 정말 집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그는 언젠가 한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살고 싶다.

김은애 작가의 작품. 한국 전통문화와 풍경이 담겨 있다. ⓒ시사IN 신선영

김은애 작가는 미혼 여성이 아기를 낳았을 때 여러 어려움을 겪는다는 데 주목했다. 실제 해외 입양인 대다수가 미혼 여성의 자녀들이다. “미혼이거나 어릴 때 임신을 해도 가족들이 지지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해 아기를 버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한국 정부도 노력해야 한다. 아기를 키우기 원하는 여성들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전시장을 찾은 관객 중엔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서 온 젬마 어빙 씨도 있었다. 37년 전 입양된 뒤 한국에 온 건 처음이다. 체류 이틀째 마침 전시회가 있어 찾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한국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전혀 아니었다. 그저 동화되기 위해 애썼다. 양부모도 말하길 꺼렸다. 입양되어서 마땅히 고마워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 한국과 입양 과정에 대해 질문을 하면 왜 감사해하지 않느냐는 반응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입양된 젬마 어빙 씨. 37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시사IN 신선영

이번 여행에는 다섯 살, 일곱 살 그의 아이들이 동행했다. 한국을 방문하기로 결심한 데에 아이들의 영향이 컸다. 한국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그로서도 이곳을 찾은 의미가 남달랐다.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한국에 대한 기억을 끌어안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아직 친부모를 찾을 용기는 내지 못했다. 그는 한국어를 못하지만 한국 이름이 있다며 소개했다. ‘박예희.’ 받아적는 걸 보더니 글자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출생증명서에 있던 이름이다. 친부모가 준 이름인지, 입양 기관에서 지은 이름인지는 알 수 없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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