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병의 비밀, 예전엔 몰랐네
  • 김은남 기자
  • 호수 100
  • 승인 2009.08.10 13:3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자 체험 ‘끊고 살아보기’ 8탄 -페트병 생수 ① 왜 페트병 생수인가
“이 여름에 꼭 그걸 끊어야 해?” 주변에서 듣는 야유다. 아, 생수! 지친 몸으로 귀가해 냉장고를 열고 페트병 표면에서 살얼음이 살짝 녹아내리는 생수를 꺼내 마실 때의 그 행복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더위가 반은 날아갈 것 같은 녀석을 끊겠다니, 도대체 왜?

돌이켜보면, 지난해 미국의 한 대학 캠퍼스에서 만난 젊은 여성 실비아가 자극이 됐다. 실비아를 처음 만난 날, 그녀가 어깨에 멘 가방 한귀퉁이에 유리병이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어릴 적 먹던 우유병처럼 투박한 500ml짜리 유리병에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그게 뭐야? 특수 음료야?” 묻자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이라고 답했다. “왜 물을 그런 데 담아 가지고 다녀? 무겁게. 생수 파는 데는 얼마든지 있잖아.” 캠퍼스 곳곳에 있는 생수 자판기를 가리키며 내가 진심으로 의아해하자 실비아는 씩 웃었다. 그리고 답했다. “페트병이 지구를 망가뜨리잖아.” 알고보니 미국에는 이런 이유로 페트병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와서 고백건대, 그때 내 머릿속을 스쳐간 생각은 이거였다. ‘참 유난을 떤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실비아를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집앞 슈퍼마켓에 갔다가 깜짝 놀랄 만한 광경을 목격했다. 쨍쨍 내리쬐는 한낮 뙤약볕 아래 ‘생수 대(大)바겐세일’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즐겨 마시는 ㅅ브랜드 생수였다. 2ℓ짜리 6병을 7000 얼마엔가 준다며, 생수통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있었다. 성인 남자 키보다 높이 쌓여 있는 이 생수통들을 햇볕으로부터 보호하는 건 앙증맞은(?) 파라솔 하나뿐.

머리가 어질했다. 그 며칠 전 KBS TV <소비자 고발>을 본 터라 충격이 더했다. 이 프로그램 제작진은 직사광선에 사흘간 노출된 생수와 서늘한 곳에 보관한 생수의 성분을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서늘한 곳에 보관했던 생수에 비해 직사광선에 노출된 생수에서는 발암물질의 일종인 아세트알데히드가 최고 3배, 포름알데히드가 최고 6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잠시 나의 물 식습관을 소개하자면, 내가 이제껏 집에서 마셔온 물은 100% 생수였다. 밥을 짓거나 국을 끓일 때는 수돗물을 사용했지만 직접 마시는 물은 늘 생수였다. ㅅ생수 2ℓ짜리 6병 세트를 사놓고 1~2주를 마셨다. 결혼 초기에는 정수기를 쓰기도 했으나 아이를 낳은 뒤 생수로 바꿨다. 툭하면 터져나오는 정수기 위생 사고가 찜찜했기 때문이다(워낙 게을러 정수기를 깨끗이 관리할 자신도 없었다). 회사에서도 이른바 13ℓ짜리 말통(대용량 통)에 담긴 생수를 마셨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방치된 생수병

그런데 이렇게 마셔온 생수가 저렇게 함부로 보관되고 있었다니…. 소비자가 눈앞에서 활보하는 슈퍼마켓에서도 저럴진대 도매·유통 단계에서는 오죽할까. 심란한 생각이 물 밀듯 밀려들었다. 어디 발암물질뿐인가. 페트병을 잘못 보관할 경우 프탈레이트 같은 환경호르몬이 녹아 나온다는 것은 상식이다. 자칫하면 뜨거운 차 안에 놓아두었다 생각 없이 먹인 페트병 음료 때문에 우리 아들딸들이 훗날 생식기 암 내지 불임에 시달릴 수도 있는 판이다. 설상가상, 환경부는 국내 시판 생수의 7.9%에서 브론산염이라나 뭐라나, 왕년의 액션 배우 찰스 브론슨을 연상케 하는 생소한 이름의 물질이 검출됐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국제 기준으로 관리하는 잠재성 발암물질이라는데, 이건 또 관리·유통 단계가 아닌 소독 과정에서 생성된단다.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그게 또 잠시였다. 고민스럽기는 했지만 당장 페트병 생수를 끊어야겠다는 결심은 하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번거로울 것 같아서였다. 미적대던 내게 결정적인 충격을 안긴 것이 <보틀마니아>(사문난적 펴냄)이다.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집어든 이 책에는  ‘20세기 최대의 마케팅 성공작, 생수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그날 밤, 서점에서 사온 책을 읽은 나는 살짝 우울해졌다. 환경 전문 작가 엘리자베스 로이트가 쓴 이 책은 미국 북동부 메인 주 프라이버그라는 소도시에서 벌어진 ‘물 전쟁’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쟁 당사자는 마을 주민과 다국적기업인 스위스 네슬레 사. 2004년 이 회사가 마을에 처음 생수공장을 건립할 때만 해도 주민들은 기뻐했다. 그러나 불과 2~3년 뒤 마을 전체는 혼돈에 빠진다. 매일 대형 트럭으로 퍼가는 이 물이 결국 외부로 팔려나가며 생수회사 배만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런 생수회사들이 이미 거쳐간 지역에서 벌어진 일을 알게 되면서 주민들의 분노는 더 커진다. 말라버린 우물, 오염된 지하수, 과잉 생장하는 식물. 이는 자칫하면 자신들에게도 닥쳐올 미래였다.

예나 지금이나 물을 둘러싼 싸움은 과격 양상으로 치닫는다. 생존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유엔은, 가뭄이 늘고 지하수 보유량은 감소하는데 인구와 오염은 심해져 2025년이 되면 전 세계 인구 3명 중 2명은 깨끗한 물을 얻지 못하는 곤경에 처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가뜩이나 깨끗한 물은 부족해지는데 이를 사유화하려는 기업들의 시도는 갈수록 노골화 한다. 옛 조상이 살기 위해 물을 놓고 싸웠다면 지금의 거대 기업은 ‘21세기 가장 돈 되는 사업’을 위해 물을 선점하려 든다.

그뿐인가. 미국 태평양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 한 해 소비되는 페트병이 290만 개가량인데, 이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석유가 1700만 배럴 정도라고 한다. 이 정도 양이면 미국에서 자동차 100만 대가 한 해 소비하는 연료량과 맞먹는다. 페트병 생산 과정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만도 250만t이다. 어마어마한 양이다.   

내가 이런 물을 마시고 있었구나. 안전한지 확신하지 못하는 물을 마시면서 심지어는 지구를 망가뜨리는 데까지 일조하고 있었구나. 이런 깨달음이 들자 퍼뜩 실비아가 떠올랐다. 실비아, 소리. 무식해서 미안했어.

Magazine
최신호 보기 호수별 보기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