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기획한 안주란 섭식장애 치료사, 박지니 〈삼키기 연습〉 작가, 남지영 ‘밤의 서점’ 점장(왼쪽부터)이 한자리에 모였다.ⓒ시사IN 조남진

섭식장애를 경험한 사람들은 섭식장애에 ‘걸린다’가 아니라 섭식장애로 ‘미끄러진다’고 표현했다. 어느 날 눈 떠보니 걸려 있는 병이 아니었다. 위험신호가 서서히 쌓이다가 어떤 순간에 툭 미끄러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식증이나 폭식증 등 섭식장애는 정신적인 문제로 음식 섭취에 장애가 생기는 질환이다. 다이어트 강박부터 우울증, 트라우마, 억압적 양육 환경 등 여러 요인이 거론되었지만, 어느 것 하나로 명확히 설명되지 않았다. 오해와 편견도 그만큼 컸다.

박지니씨는 1997년 고등학교 3학년이던 시절 거식증으로 미끄러졌다. 거식증이란 병명이 낯설 때였다. 소화가 안 되고 불편감이 커지더니 어느 순간 ‘밥을 안 먹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우울증이 있었다. “일종의 자가 처방이었죠.” 그 후 몇 년간 폭식 욕구와 구토가 반복되었다. 몸이 급격히 쇠약해졌고 가끔 의식을 잃었다. 결국 20대 초반 섭식장애 병동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25년이 흘렀지만 섭식장애는 ‘깨끗이’ 낫지 않았다. 증상은 호전과 악화를 반복했다. 박지니씨는 이제 섭식장애와 “함께 산다”라고 말한다. “입원 병동에 있을 때 ‘4-3-2-1’ 법칙에 대해 들었어요. 섭식장애 환자 중 40%는 완전히 회복해 정상적인 삶을 살고, 30%는 부분적으로 회복해 생활에 적응하며, 20%는 고질적인 환자로 남고, 10%는 사망한다고 해요. 저는 30%에 해당되는 것 같아요.” 섭식장애는 몸에 달린 혹을 떼어내듯 간단히 치료되는 게 아니었다. 잘 치료된 경우라도 몸에는 ‘몸무게 강박’ 같은 후유증이 남았다.

스무 해 넘게 거식증과 씨름하는 동안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그는 자신을 ‘산증인’이라 소개했다. 특히 국내에 섭식장애에 대한 인식과 의료 시스템이 “얼마나 부실한지”에 대해서였다. 신경정신과 안에서도 섭식장애는 비주류였다. 섭식장애 전문병원은 극소수인 데다, 어렵사리 찾은 입원 병동에서는 ‘까다롭고 예민한 환자’라며 난색을 표하기 일쑤였다. 의료보험은 물론 실손보험도 보장되지 않아서 경제적 부담을 오롯이 감내해야 한다. “섭식장애 환자 100명 중 99명은 아마 불합리한 경험이 있을 거예요.” 박지니씨의 말이다.

2월24일부터 3월2일까지 열리는 ‘섭식장애 인식주간’은 그렇게 기획됐다. 뿔뿔이 흩어진 당사자들의 경험을 모아보고자 했다. 인제대학교 섭식장애건강연구소 주최로 서울 곳곳의 독립서점과 강남 백상식이장애센터 등에서 섭식장애를 주제로 한 여러 강연이 준비돼 있다. 당사자들과 치료진,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기획자인 박지니씨가 섭외 단계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왜 이제야 이런 자리가 열렸는가”였다.

섭식장애 당사자들이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행사의 주제는 ‘납작하지 않은 섭식장애’다.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거식증의 모습은 수십 년째 제자리였기 때문이다. “폭식과 구토 행위, 창백한 얼굴과 앙상한 몸만을 강조해요. 그 자리에 남는 건 ‘다이어트를 하려는 여자들’에 대한 윤리적 비난뿐이죠. 하지만 제 삶은 그렇게 1차원적이지 않거든요.” 박지니씨는 치료 과정에서도 병에 대한 오해가 크다고 했다. 젊은 여성들의 유난스러운 신경증이거나, 의지력만 발휘하면 빠져나올 수 있는 중독 문제로 오인되곤 했다.

깡마른 몸을 동경하는 ‘프로아나’ 관련 게시글을 SNS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더 많아지고 더 어려지는 섭식장애 환자

그런 사이 심상찮은 숫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섭식장애 환자들은 더 많아지고, 연령은 더 낮아졌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7~2021년) 신경성 폭식증(과식에 대한 불안으로 설사약이나 이뇨제 등의 약물을 사용하거나 구토와 같은 제거 행동을 하는 증상)으로 진료받은 인원은 총 1만1630명이다. 2021년 2998명으로 2017년에 비해 40.9% 증가했다. 여성 환자(1만792명)가 남성보다 약 13배 많았다. 섭식장애 환자가 가장 많은 집단은 20대 여성(44.4%)이었고 10대 여성(8.3%)도 적지 않았다.

김율리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인제대 섭식장애건강연구소 소장)는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으리라 추정한다. 섭식장애로 병원에 오는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인 데다 오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 섭식장애인데도 무월경이나 빈혈, 복통으로 오진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요.” 영국의 경우 섭식장애를 앓는 이들이 2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 섭식장애 임상연구의 권위자인 그는 이번 행사를 주최했다. 국내 섭식장애 환자들이 ‘진료권’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섭식장애는 초기에 개입하면 만성화되는 걸 막을 뿐만 아니라 완치도 가능해요. 의료진에겐 그 시기를 놓치지 않을 책임이 있고요. 그만한 사회적 노력을 들일 가치가 충분히 있어요.”

진료 현장에서는 일찌감치 위기감을 감지했다. 이번 행사에 강연자로 나선 안주란씨는 백상정신건강의학과 부설 백상식이장애센터 센터장이다. 주로 심리상담과 식사 치료를 병행한다. 20년 넘게 섭식장애 환자를 치료해온 그는 환자 연령이 계속 낮아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1년 전쯤 초등학교 3학년 여학생이 섭식장애 치료를 받으러 왔어요. 큰 스케치북을 들고 와서는 먹고 싶은 음식을 빽빽하게 써 내려가던 모습이 기억나요. 얼마 전에는 아홉 살 여아가 밥을 안 먹는다며 부모님과 함께 찾아왔고요. 거식증 초기였어요.”

식사 치료는 하루에 세 번 식사와 간식을 소화시키도록 돕는 치료 방법의 하나다. 식사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 많지 않아 그의 환자들은 강원 원주와 경남 거제 등 전국에서 온다. 안주란 치료사는 섭식장애가 몸과 마음과 음식이 뒤엉켜서 나타나기 때문에 정상 식사에 대한 패턴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다들 음식을 씹고 삼키는 데 저항감이 커요. ‘네가 먹는 한 숟가락은 밥이 아니라 자신감이다. 내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고 설득해요.” 식사 치료로 씨름하고 나면 ‘한 명을 살렸다’ 하고 안도했던 이유다.

그러나 치료에 임할수록 근본적 의문이 든다. ‘왜 갈수록 거식증 환자들이 더 많아지는가.’ 안주란 치료사가 보기에 사회적 원인이 분명 있었다. 10~20대 중심으로 ‘프로아나’ 현상이 번지는 것이 대표적이다. 찬성을 뜻하는 프로(Pro)와 거식증을 뜻하는 ‘애너렉시아(Anorexia)’의 합성어로 깡마른 몸을 동경하는 것을 말한다. SNS마다 ‘굶으면 예뻐지고 집중도 잘 된다’는 식의 ‘자극 짤’을 손쉽게 찾을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먹토(먹고 토하기)’ ‘씹뱉(씹고 뱉기)’ ‘무쫄(무식하게 쫄쫄 굶기)’ 등 체중을 감량하는 구체적 방법을 공유하기도 한다.

온라인에서만 존재하는 현상이 아니었다. 고등학생 딸을 키우는 남지영씨는 급식을 먹지 않는 학생들이 점점 늘고 있다고 전했다. 독립서점 ‘밤의 서점’ 점장인 그도 기획에 참여했다. 딸의 친구들이 겪는 문제를 조금이나마 돕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프로아나’ 게시물을 가리거나 못 보게 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지 남지영씨는 의심스러웠다. 다른 정신질환과 달리 굶주림이 개인에게 주는 ‘혜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뻐졌다, 날씬해졌다는 외부의 피드백부터, 내가 내 몸을 통제하고 있다는 성취감, 가벼워진 느낌 등을 주거든요. 그저 모든 게 와장창 깨지는 경험만은 아니에요(안주란).” ‘다이어트 강박’으로만 섭식장애를 설명할 수 없는 이유였다.

섭식장애 당사자이자 김보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주인공 박채영씨. ⓒ시사IN 조남진

“숨길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됐으면”

섭식장애 당사자들은 ‘왜 몸을 통제하게 되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했다. 박채영씨는 오랫동안 섭식장애가 자극적 소재로 사용될 뿐, 당사자의 경험은 고립돼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 또한 오랜 기간 섭식장애를 겪어왔다. “몸을 통제한다는 느낌이 중요한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이거든요. 특히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게 내 몸인 거예요. 식사를 굶으면 1㎏이 빠지는 게 즉각적으로 확인되니까요. 한편으론 그게 정말 안심을 줬어요.” 그 밖에 섭식장애 당사자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망망대해에 혼자 빠졌는데 겨우 잡은 구명보트” “억압적 부모에게 내 의사를 전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라고 표현했다. 의료 중심적 관점에선 배제되어온 당사자 경험이었다.

그러므로 섭식장애를 치료하려면 개인의 서사가 충분히 발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병을 갖고 살아도 괜찮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병을 갖고 사는 것은 힘들고, 더 이상 숨길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면 좋겠어요.” 박채영씨는 주변인들의 굳건한 이해와 지지도 필요하다고 했다. “섭식장애를 겪는 이들은 음식이 몸에 흡수될 때까지 참아내는 연습이 필요해요. 기회가 계속 주어진다면 어떤 날은 실패하더라도 다시 힘이 생겼을 때 시도해볼 수 있어요.” 그가 말하는 ‘회복’의 의미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섭식장애로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섭식장애 인식주간’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2월24일 첫 세션의 주제는 섭식장애 당사자 다섯 명의 질병 서사다. 박지니씨와 박채영씨 외에 당사자 패널 세 명은 심리상담가, 유튜버, 전자음악 프로듀서로 활동한다. 박지니씨는 섭식장애 환자를 교화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병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당사자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지금까지 당사자 목소리를 진지하게 들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납작하지 않은’ 서사가 충분히 모이면, 더 많은 이들이 섭식장애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지지대’가 되어줄 것이라 이들은 기대했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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