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압사 사고가 발생했던 일본 아카시시 육교에 세워진 ‘마음의 상’. ⓒ시사IN 신선영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두 달이 넘었다. 경찰에 이어 검찰도 수사를 시작했다. 유가족협의회가 내건 요구는 거의 모든 참사에서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말이다.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그런데 그게 실제로 무슨 뜻일까? 수사와 처벌이 이뤄졌지만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남긴 상흔은 여전히 깊고, 한국이 안전한 나라가 된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우리는 2022년 이태원 참사 이후 또다시 같은 질문 앞에 설 수밖에 없다. 공동체가 참사를 성실히 애도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먼저 간 이들이 있다. 2001년, 일본 오사카 서쪽에 위치한 효고현 아카시시(市)에서도 압사 사고가 있었다. 아카시 시청은 매년 시청 근처에서 개최하던 불꽃놀이 장소를 그해에 처음 바닷가로 옮겼다. 해안에 도착하려면 JR아사기리 역에서 내려 육교를 건너야 했다. 이 육교에 사람이 몰렸다. 어린이 9명과 70대 여성 2명이 희생됐다. 유족들은 유족회를 결성했고, 이후 15년에 이르는 민형사 재판을 겪었다. 2022년 7월, 참사 21년 만에 그간의 과정을 담은 책을 냈다. 책이 출간되고 석 달 뒤, 이들은 이웃 나라 한국에서 일어난 이태원 참사 소식을 들었다.

〈시사IN〉은 일본 아카시시 육교 사고 유족을 만났다. 이들을 지원한 변호사, 사고 당시 근무한 소방관과 시청 직원도 인터뷰했다. 사고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이들의 입에서 “솟쿠리(꼭 닮았다)” “잇쇼(똑같다)”라는 말이 자주 나왔다. 올여름에 사고 22주기를 맞는 사람들은, 사고가 일어난 지 겨우 두 달이 지난 이태원 참사 유족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아 보였다. 지면을 통해 그 이야기를 전한다.

2001년 7월 21일 사고가 발생했던 육교는 JR 산요 본선 아사기리역과 오쿠라 해안을 연결하는 보도교이다. ⓒ시사IN 신선영
2001년 7월 21일 사고가 발생했던 육교는 JR 산요 본선 아사기리역과 오쿠라 해안을 연결하는 보도교이다. ⓒ시사IN 신선영

2001년 7월21일, 아리마 마사하루 씨(당시 42세)는 아내 유키코 씨(당시 31세)와 딸 치하루(9), 아들 다이(7)를 데리고 불꽃놀이를 보러 갔다. 그날 오후 7시35분께 효고현 아카시시 JR아사기리 역에 내리자 “불꽃놀이 보실 분은 개찰구를 나가서 오른쪽으로 가주세요”라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역 개찰구를 나와 바닷가로 이어지는 육교에 들어섰다. 지붕이 있는 터널처럼, 양쪽이 아크릴 벽으로 막혀 있는 보도교다. 절반 정도 갈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붐비지 않았는데, 절반 이후부터는 조금씩 앞이 막혀서 만원 전철 같은 상태가 됐다. 육교 끝을 3분의 1 정도 남겨놓았을 때쯤에는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거 조금 위험한 것 아닌가’ 생각했어요.” 마사하루 씨가 말했다. 그즈음 바로 뒤에 있던 남성이 110(한국의 112)에 전화해 “이대로라면 큰일 나니까, 누군가 유도하러 와주세요”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고 관련 첫 110 신고였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육교는 병목 구조였다(〈그림〉 참조). 역 개찰구를 오른쪽으로 돌아 약 104m 길이 통로를 지나면 다시 오른쪽으로 난 계단으로 내려가야 한다. 문제는 계단의 폭이 통로(6m)의 절반인 3m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계단 바로 앞의 평평한 곳은 바다 위 불꽃놀이를 보기에 맞춤한 장소여서 사람들이 많이 멈춰 서 있었다. 계단 바로 아래에는 노점 약 180개가 늘어서 있었다. 여기도 인파로 가득했다. “계단 바로 앞에 오자 사방팔방에서 압력이 가해졌어요. 노점에 가려는 사람과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가려는 사람…. (육교를 에워싼 아크릴 벽을 따라 철제 난간이 쭉 설치돼 있었는데) 그 벽과 난간 사이의 공간에 아이들을 넣고 어른들이 막으면서 버티면 안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주위 어른들도 모두 아이들을 난간에 넣고 감싸듯이 서 있었어요.”

하지만 역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압력이 조금 더 강해졌다. 아리마 부부는 서서히 계단 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오후 8시31분쯤 불꽃놀이가 끝난 직후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막혔던 수도꼭지를 팍 하고 튼 것처럼, 한꺼번에 계단 앞 평평한 곳까지 밀려났어요. 그때 소위 ‘군중 눈사태’가 일어난 것 같아요. 그렇게 되기 직전에, 발이 바닥에 붙어 있지 않고 떠 있는데도 전혀 넘어지지 않는 느낌이었거든요. 주변에서 사방팔방으로 압력을 가하니까. 전문가들 말로는 그런 걸 ‘아치 상태’라고 부르는데, 그 상태에서 어딘가 공간이 생기면 우르르 넘어진다는 것 같아요. 아마 이태원 참사도 똑같은 상황이었다고 생각해요. 규모가 우리보다 컸던 거죠.” ‘군중 눈사태(crowd surge)’란, 밀착된 군중끼리 서로를 떠받치고 있던 균형이 어떤 이유로 무너지면서, 버팀목을 잃은 군중이 한꺼번에 쓰러지는 현상을 말한다.

아카시시 육교 사고로 자녀를 잃은 아리마 유키코(왼쪽), 아리마 마사하루 부부. 문 위에 세상을 떠난 두 아이의 사진이 걸려 있다.ⓒ시사IN 신선영

정신을 차린 마사하루 씨는 아이들을 놓쳤던 육교 안으로 돌아갔다. 딸 치하루가 경찰 기동대원에게 안긴 채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놀랐지만, 구호조치를 받을 거라 생각하고 아들 다이를 찾기로 했다. 다이를 넣었던 난간으로 돌아가니, 가장 밑에 있는 다이 위로 아이들 몇 명이 쌓여 있었다. 기동대원의 도움으로 다이를 축제 운영본부 텐트로 옮겨 테이블 위에 눕혔다. “심장마사지와 인공호흡, 할 수 있는 분 안 계십니까?” 구급차가 올 때까지, 본부 스태프와 시민들이 돌아가면서 다이에게 심장마사지와 인공호흡을 했다. 구급차는 한 시간 가까이 걸려 도착했다. 유키코 씨가 다이를 데리고 탔지만 구급차는 좀처럼 출발하지 않았다. 겨우 도착한 병원에서 오후 11시15분 다이는 사망선고를 받았다(구급차를 타고 같이 실려 간 생후 5개월 여자아이도 일주일 뒤 숨졌다).

마사하루 씨는 다이와 아내를 보내고 육교에 남아 다시 치하루를 찾았다. 아무도 치하루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육교 밑에 있던 경찰관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혹시 어디 있는지 알게 되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집으로 가는 도중 전화가 왔다. 어디 옮겨졌는지 모르지만, 지금부터 말하는 몇 개 병원 중에 있을 거라고 했다. 여동생과 조카들이 병원에 전화를 돌렸지만 병원도 패닉 상태였다. 여동생, 어머니와 만나 병원을 하나하나 돌았다. 첫 번째 병원에 없었고, 두 번째 병원에 있었다. 긴 의자에 눕혀진 치하루의 머리카락은 피로 끈적끈적했고 목과 팔에 심한 멍이 있었다. “(병원에 실려 갈 때) 아무도 옆에 있어주지 못했잖아요. 혼자서 눕혀져 있었달까…(마사하루 씨).” 오후 9시31분께 병원으로 옮겨진 치하루 역시 사망 판정을 받았다. 치하루와 함께 병원에 실려온 아이 3명도 모두 숨졌다. 그렇게 0세에서 9세 아이 9명, 70대 여성 2명이 그날 육교에 있다가 희생됐다.

아카시시 육교 사고로 둘째 아들을 잃은 시모무라 세이지 씨. 현재 유족회 회장을 맡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시모무라 세이지 씨가 1월3일 아카시시 육교에서 둘째 아들을 잃었던 사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시모무라 세이지 씨(당시 43세)의 둘째 아들 도모히토(2)도 그 희생자 가운데 한 명이다. 장례를 치르며 아이의 관 옆을 지키던 시모무라 씨의 눈에 한 신문기사 내용이 띄었다. 갈색 머리의 어떤 젊은이가 소란을 피워서 압사 사고가 일어났다고 쓰여 있었다. 시모무라 씨가 목격한 바로는, 오히려 육교 지붕에 올라 사람들을 구하려던 이였다. 이대로는 진실이 은폐될 것 같았다. 원고지 10장에 그날 일을 단숨에 써내려갔다. 보험회사를 오래 다녀 교통사고 현장을 세세히 기억하던 습관이 도움이 됐다. 장례 치른 다음 날인 7월25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요미우리신문〉 기자에게 부탁해 다른 유족들 연락처도 수소문했다. 그해 9월6일, 사고 발생 47일 만에 유족회를 결성했다.

유족들은 유족회 결성 전부터 이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당장 대응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고 발생 12일 뒤인 8월2일, 불꽃축제를 개최한 아카시 시청이 ‘사고조사위원회’를 발족했다. 사고조사위원회란 경찰 수사와는 별개로 독립성과 전문성을 가진 사고 조사기관을 말한다. 일본에서 항공사고나 철도사고가 발생했을 때에 설치하도록 제도화돼 있다. 당시 압사 사고에 사고조사위원회를 설치할 의무는 없었지만, 아카시시 간부의 판단으로 만들어졌다. 법학, 위기관리, 재해·구급의학, 건축인간공학, 도시방재 등의 분야 전문가 6명으로 구성됐다.

아카시시 육교 사고 이후 유족들이 걸어온 길

2001년 7월21일 육교 사고 발생 
2001년 8월2일 아카시시, 사고조사위원회 설치 
2001년 9월6일 유족회 결성 
 2002년 5월9일 현경·지검 합동수사본부,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전 아카시경찰서장과 부서장 등 12명 검찰 송치 
2002년 10월30일 유족, 아카시시·경비회사·효고현경을 상대로 민사소송 제기 
2002년 12월26일 고베지검, 5명 기소. 전 아카시경찰서장과 부서장 불기소 처분 
2003년 3월10일 유족, 검찰심사회에 전 경찰서장과 부서장 기소 신청 
2004년 4월14일 검찰심사회, 전 경찰서장과 부서장 ‘기소 상당’ 의결 
2004년 9월28일 고베지검, 전 경찰서장과 부서장 다시 불기소 처분 
2004년 12월17일 형사재판 1심, 전원 유죄판결(전 경찰서장 책임도 지적) 
2005년 6월28일 민사재판, 유족 승소 판결 
2005년 12월14일 검찰심사회, 전 경찰서장과 부서장에 대해 두 번째 ‘기소 상당’ 의결 
2006년 6월22일 고베지검, 전 경찰서장과 부서장 세 번째 불기소 처분 
2006년 7월21일 사건 발생 5년(공소시효) 
2007년 4월6일 형사재판 2심, 항소 기각 
2007년 7월7일 전 경찰서장 사망 
2009년 5월21일 개정 검찰심사회법 시행 
2009년 7월15일 검찰심사회, 전 부서장에게 세 번째 ‘기소 상당’ 의결 
2009년 9월30일 고베지검, 전 부서장 네 번째 불기소 처분 
2010년 1월27일 검찰심사회, 전 부서장에 대해 기소 의결 
2010년 4월20일 전 부서장 강제 기소 
2010년 5월31일 형사재판 3심, 상고 기각해 형 확정 
2013년 2월20일 강제 기소 1심, 전 부서장 면소 판결 
2014년 4월23일 강제 기소 2심, 전 부서장 면소 판결 
2016년 7월12일 강제 기소 3심, 전 부서장 면소 판결(이후 확정) 
 2022년 7월21일 책 〈아카시 육교 사고 재발 방지를 바라며〉 출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무모하다”

사고조사위원회 발족 당일, 시모무라 씨 등 유족 3명은 시장을 만나 위원회에 유족이 참여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에도 유족들은 ‘경찰을 철저히 조사할 것’ ‘구급활동도 검증할 것’ ‘다각적인 재발 방지책을 제언할 것’ ‘보고서 원안은 유족에게 제시할 것’ 등을 위원회에 요청했다. 사고조사위원회는 유족들에게서 사고 당시 상황을 청취했고, 이듬해인 2002년 1월30일까지 조사를 실시한 뒤 2월11일 유족들에게 설명회를 개최했다. 모든 위원들이 출석해 유족의 질문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사고 반년 만에 나온 142페이지짜리 ‘제32회 아카시 시민축제에서의 불꽃놀이 사고조사보고서’가 나왔다. 이 보고서는 이후 열리는 재판에서 두고두고 중요한 자료가 된다. 보고서 서문은 사고조사위원회를 “공평성·중립성·객관성을 보유하기 위해 누군가로부터의 지시·명령·간섭·압박 등을 받지 않고, 독립되어 직무를 행하는 제3자 기관”이라고 규정했다. 그런 만큼 보고서는 아카시시가 경비를 맡긴 민간 경비회사뿐 아니라, 행사를 주최한 아카시시, 나아가 이 구역을 관할하는 경찰에도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육교가 혼잡해질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는데도, 일방통행이나 우회로 설정 등 필요한 대책을 사전에 취하지 않고 무제한으로 군중을 유입시킨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무모하다”라고 봤다.

보고서는 사고에 대한 과학적 분석도 했다. 사고 당시 육교 위에는 약 6400명이 있었고, 가로 1m×세로 1m, 즉 1㎡ 공간에 최대 13~15명이 밀집해 있었다(이 경우 가해지는 압력은 1m당 300~540㎏이다). 밀집도가 1㎡당 10명이 넘으면 군중 눈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보고서에는 ‘새로운 이벤트 장소 설정은 새로운 환경을 가져오므로 진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주최자, 경찰서, 경비회사가 사전 대응을 조직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등 재발 방지를 위한 제언도 담겨 있다. “경찰이 협력하지 않을 걸 알아서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조사를 굉장히 잘 해주어서 고마웠어요(마사하루 씨).” 문제는 경찰이었다. 사고조사위원회는 경찰에 사실조회를 했지만, 경찰은 “수사 중”이라며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2002년 12월, 고베지방검찰청은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아카시경찰서의 지역관, 경비회사 지사장, 시청 공무원 3명 등 현장 책임자 5명을 기소했다. 아카시경찰서 지역관과 경비회사 지사장은 금고 2년6개월의 실형, 시청 공무원 3명은 금고 2년6개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고 후에 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아카시경찰서의 전직 서장과 부서장은 기소되지 않았다. 유족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였다. 사고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사고 당일 경찰은 폭주족 대책 등에 292명, 혼잡 경비에 36명을 배치했다. 292명 중 폭주족 대책에 투입된 경력은 190명이었다(경찰이 폭주족 단속에 주력했다는 점이 인정된다). 육교 위에는 경찰이 한 명도 없었다.

마사하루 씨는 그날 육교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유도해주는 사람은 전혀 없었어요. 이태원 사고랑 똑같아요. 만약 있었다면 간단하게 막을 수 있는 사고였어요. 나중에 재판에서 알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어난 ‘인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고에서도 어떤 생존자가 나중에 저희한테 메일을 보냈어요. 자신이 밀어서 그렇게 된 것 아니냐고, 죄송하다고요. 하지만 그런 건 전혀 관계없어요. 누가 누굴 밀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압사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가버리면, 전혀 막을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걷는 방향을 일방통행으로 해서 부딪치지 않게 하지 않으면, 이미 무리인 거예요.”

시모무라 씨는 사고 당일 경찰들이 육교 밑을 지나갈 뿐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고 했다. 신고를 해도 “곧 가겠습니다”라는 말뿐이었다. “경찰이 처음에 110 신고가 21건 들어왔다고 했어요. 현장에 있던 사람이 수천 명이고, 저만 해도 일곱 번 했는데 말이 안 되잖아요. 알고 보니 신고가 집중돼서 마비 상태였어요. 110번 신고에 대응하는 본부 기지가 고베에 있어서 저희가 한 번 방문 조사차 갔었거든요. 보통은 신고 녹음한 것을 그대로 둘 텐데, 이미 지워버렸다고 하더라고요. 사고 당일 육교 상황을 찍는 비디오카메라가 육교 옆 호텔 옥상에 설치돼 있었고 아카시경찰서에 전송됐으며 녹화 기능이 있다는 것도 저희 유족들이 밝혔는데, 정작 녹화가 안 됐대요.”

유족들은 경찰의 증거인멸을 놓고 문제를 제기했다. 동시에 검찰의 불기소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2002년 12월 고베지검이 경찰서장과 부서장을 불기소하자, 유족들은 2003년 3월 고베지검의 ‘검찰심사회’에 경찰서장과 부서장의 기소를 신청했다. 검찰심사회란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적정한지를 추첨으로 뽑힌 시민들이 심의하는 기구다. 검찰심사회는 서장과 부서장에 대해 ‘기소가 상당하다’고 의결했으나, 고베지검은 또 두 사람을 불기소 처분한다. 검찰심사회는 재차 ‘기소가 상당하다’고 의결했다. 검찰은 다시 불기소 처분했다. 검찰심사회가 두 번이나 ‘기소 상당’ 의결을 내렸지만 검찰은 요지부동이었다.

아카시시 육교 사고 당시 현장 모습. ⓒ아카시시 사고조사보고서 갈무리
군중의 압력 때문에 쓰러진 펜스. ⓒ아카시시 사고조사보고서 갈무리

일본 최초의 ‘강제 기소’ 사건

그러던 중 사법제도에 변화가 생겼다. 기존에는 검찰심사회가 ‘기소 상당’을 아무리 의결해도 검찰이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검찰심사회가 ‘기소 상당’을 두 번 의결하면 ‘강제 기소’가 되도록 법이 바뀌었다. 법이 바뀐 뒤 검찰심사회는 다시 ‘기소 상당’을 두 번 의결했고, 이 사건은 일본 최초의 ‘강제 기소’ 사건이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경찰서장이 2007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2010년 부서장만 강제 기소되었다. 부서장은 “사고 당일 서장에게 ‘중요한 날이니 현장에 가지 않겠습니까’라고 제안했으나 서장이 ‘카메라가 있으니 괜찮다’고 거부했다”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서장이 숨져서 사실관계를 밝히는 데 한계가 있었다. 부서장이 공소시효(5년)에도 불구하고 유죄판결을 받으려면 앞서 2002년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기소돼 처벌받은 아카시경찰서 지역관과 공범 관계가 인정됐어야 하는데, 이것도 부정되었다. 부서장의 역할은 서장을 보좌하는 것으로 지역관과는 다르다는 이유에서다. 2016년 최고재판소(일본의 대법원)에서 공소시효 만료에 따른 부서장의 면소가 확정됐다. 이렇게 15년에 걸친 형사재판이 마무리됐다.

“결국 서장 탓으로 끝나버렸어요. 죽었으니 더 이상 논쟁할 수 없잖아요. 처음부터 서장의 책임이 인정돼 기소됐다면 공소시효가 지나는 일도 없었을 텐데…. 형사재판은 사고 당일의 대응에 집중할 뿐, 그날 이전의 지휘계통이라든가 경비계획에 대해서는 불투명한 채 종결되었어요.” 시모무라 씨가 말했다.

그나마 형사재판의 빈틈을 메운 것은 민사재판이었다. 유족들은 형사재판과 별개로 2002년 아카시시, 효고현 경찰본부, 경비회사를 상대로 민사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2005년 유족이 승소해 총 5억6800만 엔의 배상 판결이 내려졌다. 원고와 피고 모두 항소하지 않아 판결이 확정됐다.

민사재판에서 쟁점 중 하나는 경비의 책임 소재였다. 경찰은 “혼잡 경비는 원래 주최자 측이 자주적으로 해야 한다. 1차적 책임은 주최자에 있다”라고 ‘자주(自主) 경비’를 주장했다. 이에 대해 판결문은 ‘자주 경비’가 주최 측이 경비 계획을 세우고 당일 경비를 해야 한다는 의미일 뿐, 이로 인해 경찰의 혼잡 경비에 관한 책임이 경감되거나 면제되는 건 아니라고 명시했다. “경찰에게는 참석자의 생명, 신체 등의 안전을 확보해야 할 주의 의무가 있고, (…) 주최자 측의 자주 경비에만 맡길 게 아니라, 스스로도 적정한 계획을 책정해야 할 주의 의무가 있었다.” 관련 문헌에 따르면 혼잡 경비는 계획 단계에서 80%, 경비원 등에게 계획을 주지시키는 단계에서 90%가 완료된다. 당일 대응이 좌우하는 부분은 나머지 10%에 불과하다. 판결문은 피고들이 사고 발생을 사전에 예견할 수 있었으며, “사전 준비 단계에서 혼잡 경비 계획 책정이 준비되지 않은 것이야말로, 압사 사고 발생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형사재판에선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책임이다.

민사재판의 판결문이 유족의 마음에 남는 이유는 또 있다. 시모무라 씨의 말이다. “보통 그런 판결문에는 우리들(유족) 얘기까지 써주진 않는데, ‘아이를 데려간 부모의 책임은 없다’고까지 써주었어요. 그게 가장 남아 있네요. 아무래도 사고 초기부터 ‘데려간 부모가 나쁘다’라든가 ‘TV에 나와서 돈 받는 것 아니냐’는 비방이 많았거든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래요. 이번에도 제가 한국 이태원 사고로 언론에 나오니까 ‘쓸데없는 참견 하지 마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저희 때는 집으로 비난 전화가 10~20통 오거나 편지가 종종 오는 정도였는데, 인터넷이 있는 지금은 1분 만에 몇만 명이 말해버리니…. 한국의 유족분들이 힘들겠어요.”

사고 이후 아카시 시청이 개최하는 불꽃놀이는 중지됐다. 시청은 ‘종합안전대책실’이라는 조직을 새로 만들고, 행사를 개최할 때마다 사전에 체크리스트로 예상 인원과 경비 계획을 검토하게 됐다. 매년 사고가 발생한 기일을 ‘시민 안전의 날’로 지정해 유족 등을 불러 신입사원들에게 강연을 한다. 사고조사보고서는 시 방재센터에 비치돼 있고 인터넷에서도 누구나 볼 수 있다. 아카시소방서도 초동대응 방식을 바꿨다.

아카시시가 위치한 효고현 경찰본부는 2002년 12월 ‘혼잡 경비 매뉴얼’이라는 120페이지의 책자를 만들었다. “지금까지 이 분야에 관한 조사, 연구가 불충분했다는 반성”에서다. 책자는 아카시시 육교 사고를 겪은 이들의 증언과 함께 압사의 원리, 경찰과 주최자의 책임과 대응 요령을 담았다. “사람의 흐름이 부딪치지 않도록 일방통행으로 분리하는 구조를 준비한다” “출구의 폭을 입구보다 넓게 한다” “시차 입장, 시차 퇴장으로 군중 밀도를 시간에 따라 분산시킨다” 등이다. 민사 판결 이후 효고현 경찰본부장은 유족을 만나 한 명 한 명에게 머리 숙여 사죄했다. “시민의 생명, 신체를 지킨다는 경찰의 책무를 다하지 못해, 정말로 죄송합니다.” 사고 당시 재임 중이던 아카시 시장과 후임 시장도 유족을 만나 사죄했다.

긴 형사재판이 끝나고 유족들과 변호단은 사고 21년 만에 이 모든 과정과 결과를 담은 책을 냈다. 2022년 7월에 출간된 〈아카시 육교 사고 재발 방지를 바라며-숨겨진 진상 포기하지 않은 유족들과 변호단의 싸움의 기록〉(고베신문사)이다.

아카시시 육교 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시라이 요시미치 씨. ⓒ시사IN 신선영

그로부터 3개월 뒤, 한국에서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다. 아카시시 육교 사고로 어머니 시라이 도미코 씨(75)를 잃은 시라이 요시미치 씨는 “한국 이태원 압사 사고의 원인과 배경이 아카시시 육교 사고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실은 ‘사고’가 아니라 ‘사건’입니다. 경찰이 시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보다도, 폭주족이나 마약 단속으로 실적을 쌓으려 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 “‘혼잡한 장소에 간 사람이 나쁘다’라는 사람도 있지만, 큰 착각입니다. 핼러윈이나 불꽃놀이를 즐기려고 현장에 간 것이지,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는 누구도 상상도 하지 않겠지요. 사고를 예견해서 혼잡 경비 대책을 세우는 것은 ‘경찰’의 최대 사명입니다. 주최자가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에서 발생한 일은 아니지만, 똑같은 압사 사고가 발생한 것은 한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태원 참사에서 일본인 2명도 희생됐다. 육교 사고 유족들은 이태원 참사의 일본인 유족에게도 책을 보냈다. 앞으로의 일에 참고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현재 유족회장을 맡고 있는 시모무라 씨는 오는 4월에 그들을 만날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사고 이후인 2012년 일본 국토교통성에 설치된 대중교통 사고 피해자 지원실 소속으로 ‘어드바이저’ 활동도 하고 있다. 여러 종류의 사고를 당한 유족 등 피해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상담을 지원하는 정부 조직이다. “한국의 이태원 유족분들은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일 거예요. 저희들도 그랬지만 1년 지나면 1년 지난 나름의 슬픔이 찾아와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더 힘들어져요. 그런 의미에서 유족의 마음을 돌보는 시설이나 조직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다른 나라의 유족까지도 포함해, 모여서 이야기할 수 있는 창구를 정부 주도로 만들기를 바랍니다(시모무라 씨).”

육교 사고의 유족들은 동시에 생존자이기도 하다. 시모무라 씨는 여름이면 숨이 막히는 느낌에 넥타이를 잘 매지 못한다. 사고 당일 군중 눈사태 때 뒤로 넘어져 기절하면서 가슴 위에 안고 있던 둘째 딸 유이나(8)를 잃은 미키 기요시 씨(당시 32세)도, 사람들로 붐비는 곳에 가거나 불꽃놀이를 볼 때면 사고 당일의 기억이 선명히 되살아난다고 했다. “유족도 그렇지만, 그 안에 있다가 구조된 사람들도 무척 힘들 거예요. 저희도 실제로 눈앞에서 아이를 잃었으니까요. 이태원 참사에서도 친구나 가족과 갔다가 살아남은 분들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목숨을 끊은 분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 분들의 마음도 국가 차원에서 ‘케어’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딸을 잃은 미키 기요시 씨. ⓒ시사IN 신선영
미키 기요시 씨가 1월3일 아카시시 육교에서 둘째 딸을 잃었던 사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20년 넘는 싸움을 해오는 과정에서 유족들에게 가장 위로가 된 것은 다른 유족들과의 만남과 연대였다. 1956년 일본 니가타현 야히코 신사에서 124명이 사망한 압사 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로 18세 딸을 잃은 할머니는 사고 50년이 되도록 딸의 온기를 손이 기억한다고 미키 씨에게 들려주었다. “우리 때의 교훈이 활용되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그 유족의 사과가 아카시시 유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줬다. 1991년 시가라키 고원철도 사고(열차 무단 개조와 장치 오작동으로 두 열차가 정면충돌해 42명이 죽고 614명이 부상당한 사고), 1995년 한신 아와지 대지진과 지하철 사린 살포 사건, 1985년 일항기 추락 사고의 유족들도 아카시시 유족들에게 조언과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장소에 세워진 ‘마음의 상’에 기도하는 시민들. ⓒ시사IN 신선영

“유족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변호단이 결성된 것도 큰 힘이었지만, 유족회 결성부터 지금까지 언론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좀처럼 사고 이야기를 타인이랄까, 친구에게도 별로 할 수 없거든요. 역시 그쪽도 마음을 쓰니까. 기자들이 가장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줬어요, 그때의 제 마음을. 그러니까,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엄청 도움 받았거든요. 역시 말할 곳은 거기밖에 없는 거예요.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마음이 개운해지는 부분도 있고…. 미디어에 계신 분들이 유족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세요(아리마 유키코 씨).”

1월3일 찾은 아카시시 육교는 평온했다. 육교 끝 계단 옆에 작은 소녀 동상이 놓여 있었다.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장소다. ‘마음의 상’이라 불리는 이 동상에 누군가가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혀 준다고 한다. 유족은 연말마다 와서 청소를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따금 동상 앞에서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어린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발길을 멈추고, 비석에 새겨진 제 또래 아이들의 이름을 골똘히 바라봤다. “사고의 풍화는 막을 수 없겠지만, 여기서 큰 사고가 있었다는 걸 모두 잊지 않아주었으면 좋겠어요. 두 번 다시 같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미키 씨).”

아리마 마사하루 씨의 두 자녀가 아빠에게 선물했던 물건. ⓒ시사IN 신선영
미키 기요시 씨의 딸이 썼던 감사장. ⓒ시사IN 신선영

딸 유이나가 떠난 뒤 미키 씨는 유이나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쓴 ‘나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일기 노트를 발견했다. 마지막 페이지의 ‘감사장’에는 아빠와 할머니에게 “지금까지 키워줘서 고마워”라고 적었다. 마치 유언 같아서, 일 때문에 곁에 많이 못 있어준 게 미안해서 좀처럼 잘 읽지 못한다. 유이나가 살아 있다면 서른이다. 사고 당시 30~40대이던 유족들은 이제 50~60대가 됐다. 아리마 마사하루 씨는 사고 직전 아빠의 날에 치하루, 다이가 손수 만들어준 티슈케이스와 카드케이스를 지금도 가방에 넣고 다닌다. 삐뚤빼뚤한 바느질로 만든 천 케이스는 20년을 쓰는 동안 너덜너덜해지고 보풀이 잔뜩 생겼다.

치하루와 다이의 장례식 날 마사하루 씨는 약속했다. “우리가 죽었을 때 너희한테 ‘아빠, 엄마 무척 애썼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힘껏 살아가겠다”라고. “그렇게 말해주지 않을까 생각해요”라고 마사하루 씨는 말했다. 납득할 수 있는 결과는 아니지만, 지금의 행정과 사법체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해왔다는 생각이다. 일본에서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사후의 이름을 지어준다고 한다. 치하루와 다이의 사후 이름인 ‘샤쿠세이교’ ‘샤쿠다이고’가 새겨져 있는 불단 앞에서 마사하루 씨가 말했다. “한국의 이태원 참사 유족분들에게 잘 전해주세요. 앞을 보고 힘내주시길 바란다고. 앞을 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무리 힘들어도. 응원해주는 사람도 분명 있으니까요.”

육교 사고로 두 자녀를 잃은 (왼쪽) 아리마 유키코 씨는 미디어가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
치하루와 다이의 사후 이름인 ‘샤쿠세이교’ ‘샤쿠다이고’가 쓰여 있는 불단. ⓒ시사IN 신선영

참사는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참사 이후 대응에 따라 사회는 달라집니다. 일본 아카시시 참사와 이태원 참사는 유사합니다. 국내 일본인뿐 아니라 일본의 시민들에게도 참사의 기록을 알리기 위해 하단에 이 기사를 일본어로 번역 게재합니다.

번역: 전혜원 기자
감수: 문성희 〈슈칸 긴요비〉 편집장

惨事は、どの社会でも起きます。惨事後の対応によって、社会は変化します。日本の明石市歩道橋事故と韓国の梨泰院事故は似ています。韓国内の日本人の方だけでなく、日本の市民の方々にも、惨事の記録をお伝えするために、下段にこの記事を日本語に翻訳・掲載いたします。

翻訳:ジョン・ヘウォン記者
監修:文聖姫(ムン・ソンヒ)<週刊金曜日>編集長

 

2001明石の遺族が、2022梨泰院の遺族に

●日本の明石/文 ジョン·ヘウォン記者·写真 シン·ソンヨン記者

●梨泰院惨事発生から2ヵ月経った。 「真相究明、責任者処罰、再発防止」とは実際にどういう意味だろうか。 誠実な哀悼はどうすべきであろうか。 〈時事IN〉が日本の歩道橋事故の遺族に会った。

2001年に圧死事故が発生した明石市の歩道橋に建てられた「想いの像」。ⓒ時事INシン·ソンヨン

梨泰院惨事が発生してから2ヵ月経った。 警察に続き、検察も捜査を開始した。 遺族会が掲げた要求は、ほぼすべての惨事で共通して繰り返される言葉である。 「真相究明、責任者の処罰、再発防止。」ところで、それは実際にどういう意味だろうか? 捜査と処罰が行われたが、2014年セウォル号惨事が残した傷跡は依然として深いし、韓国が安全な国になったようでもない。 それで私たちは2022年の梨泰院惨事以降、再び同じ質問の前に立つしかない。 共同体が惨事を誠実に哀悼するためには、何をどうすればいいのか。

私たちが歩まなければならない道を先に歩んだ人たちがいる。 2001年、大阪の西側に位置する兵庫県明石市でも圧死事故があった。 明石市役所は毎年市役所の近くで開催していた花火大会の場所を、その年に初めて海辺に移した。 海岸に到着するにはJR朝霧駅で降りて歩道橋を渡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この歩道橋に人が殺到した。 子供9人と70代の女性2人が犠牲になった。 遺族たちは遺族会を結成し、以後15年に及ぶ民事·刑事裁判を経験した。 2022年7月、惨事から21年ぶりにこれまでの過程を盛り込んだ本を出した。 本が出版されて3ヶ月後、彼らは隣国の韓国で起きた梨泰院惨事のニュースを聞いた。

〈時事IN〉は日本の明石市歩道橋事故のご遺族に会った。 彼らを支援してきた弁護士、事故当時勤務していた消防署と市役所の職員たちもインタビューした。 事故を直接·間接的に経験した人たちの口から「ソックリ(そっくり)」 「イッショ(一緒)」という言葉がよく出てきた。 今夏に事故22周忌を迎える人たちは、事故が起きてわずか2ヶ月の梨泰院の惨事の遺族に伝えたい話がとても多く見えた。 誌面を通じてその話を伝える。

2001年7月21日に事故の発生した歩道橋はJR山陽本線朝霧駅と大蔵海岸を結ぶ歩道橋である。ⓒ時事INシン·ソンヨン
2001年7月21日に事故の発生した歩道橋はJR山陽本線朝霧駅と大蔵海岸を結ぶ歩道橋である。ⓒ時事INシン·ソンヨン

2001年7月21日、有馬正春さん(当時42歳)は妻の友起子さん(当時31歳)と娘の千晴さん(9)、息子の大さん(7)を連れて花火を見に行った。 その日の午後7時35分頃、兵庫県明石市のJR朝霧駅で降りると「花火を見る方は改札を出て右側に行ってください」というアナウンスが聞こえた。 駅の改札を出て海辺につながる歩道橋に入った。 屋根のあるトンネルのように、両側がアクリル壁で塞がれている歩道橋である。 半分くらい行くまではそれほど混んでいなかったが、半分以降からは少しずつ前が塞がって満員電車のような状態になった。 歩道橋の先端を3分の1ほど残した頃には全く動けなくなった。 「その時初めて、『これはちょっと危ないんじゃないかな』と思いました。」 正春さんが言った。 そのころすぐ後ろにいた男性が110番(韓国の112)に電話し「このままだと大変なことになるから、誰か誘導に来てください」と言う声が聞こえた。 事故に関連する初の110番通報だった。

後で分かった事実だが、歩道橋はボトルネックの構造であった(〈図〉参照)。 駅の改札を右に曲がって約104mの長さの通路を過ぎると、再び右のほうに出ている階段で降りなければならない。 問題は階段の幅が通路(6メートル)の半分の3メートルに縮小するということである。 階段のすぐ前の平らなところは海の上の花火を見るのにぴったりの場所で、人がたくさん止まっていた。 階段の真下には夜店約180個が並んでいた。 ここも人でいっぱいであった。 「階段のすぐ前に来ると四方八方から圧力がかかってきました。 露店に行こうとする人と電車で家に帰ろうとする人…. (歩道橋を取り囲むアクリル壁に沿って鉄製の手すりがずっと設置されていましたが)その壁と手すりの間の空間に子供たちを避難させ大人たちが庇いながら耐えていれば安全だと思いました。 周りの大人たちもみんな子供たちを手すりの中に入らせて庇うように立っていました。

しかし、駅から出る人々の圧力がもう少し強くなった。 有馬夫妻は徐々に階段の方に押し出されていた。 午後8時31分ごろ、花火大会が終わった直後、状況はさらに深刻になった。 「なぜかわからないのですが、急にふさがっていた蛇口をポンと開けたように、一気に階段の前の平らなところまで押し出されました。 その時、いわゆる「群衆雪崩」が起きたようです。 そうなる直前に、足がついていなくて浮いているのに全然倒れない感じだったんですよ。 周りから四方八方に圧力をかけるから。 専門家の話ではそういうことを「せりもち状態」と呼ぶんですが、その状態でどこかスペースができるとどっと倒れるということらしいですね。。 多分梨泰院の惨事も同じ状況だったと思います。 規模が私たちより大きかったのです」「群衆雪崩(crowd surge)」とは、密着した群衆同士が互いを支えていたバランスが何らかの理由で崩れ、支えを失った群衆が一度に倒れる現象をいう。」

気がついた正春さんは、子どもたちを逃していた歩道橋の中に戻った。 娘の千晴が警察機動隊員に抱かれたまま頭から血を流していた。 驚いたが、救護措置を受けると思って息子の大を探すことにした。 大を入れた手すりに戻ると、一番下にいる大の上に子供たちが何人も積まれていた。 機動隊員の助けで大を祭りの運営本部テントに移しテーブルの上に寝かせた。 「心臓マッサージと人工呼吸、できる方はいませんか?」 救急車が来るまで、本部スタッフと市民が順番に大に心臓マッサージと人工呼吸をした。 救急車は約1時間後に到着した。 友起子さんが大を連れて乗ったが、救急車はなかなか出発しなかった。 やっと到着した病院で午後11時15分、大は死亡の宣告を受けた(救急車に乗って一緒に運ばれた生後5ヵ月の女の子も1週間後に死亡した)。

明石市の歩道橋事故で子どもを亡くした有馬友起子(左)、有馬正春夫婦。 ドアの上に亡くなった2人の子供の写真がかかっている。ⓒ時事INシン·ソンヨン

 

正春さんは大と妻を送り、歩道橋に残って、再び千晴を探した。 誰も千晴がどこにいるのか知らなかった。 歩道橋の下にいた警察官に電話番号を教えて、「もしどこにいるのか分かったら連絡をください」と言った。 家に帰る途中、電話がかかってきた。 どこに運ばれたのか分からないが、今から言ういくつかの病院の中にいるはずと言った。 妹と甥たちが病院に電話をかけたが、病院もパニック状態だった。 妹、母親に会って病院を一軒一軒回った。 最初の病院にはおらず、2番目の病院にいた。 長い椅子に寝かせられた千晴の髪の毛は血でべたべたして、首と腕にひどいあざができていた。 「(病院に運ばれる時)誰もそばにいてあげられなかったじゃないですか。 一人で寝かせられていたというか…(正春さん)」 午後9時31分頃、病院に運ばれた千晴も死亡判定を受けた。 千晴と一緒に病院に運ばれた子供3人も全員死亡した。 そうやって0歳から9歳の子供9人、70代の女性2人がその日歩道橋にいて犠牲になった。

明石市歩道橋事故で次男を亡くした下村誠治さん。 現在遺族会の会長を務めている。ⓒ時事INシン·ソンヨン
下村誠治さんが1月3日、明石市歩道橋の上で次男を亡くした事故当時の状況を説明している。ⓒ時事INシン·ソンヨン

下村誠治さん(当時43歳)の次男、智仁さん(2)も犠牲者の一人である。 葬儀を行いながら、子どもの棺のそばを守っていた下村さんの目に、ある新聞記事の内容が入った。 茶髪の若者が騒いで雑踏事故が起きたと書かれていた。 下村さんが目撃したところでは、むしろ歩道橋の屋根に上って人々を助けようとしていた人だった。 このままでは真実が隠蔽されそうだった。 原稿用紙10枚に当日のことを一気に書きすすめた。 保険会社に長く勤め、交通事故の現場を詳しく覚えていた習慣が役に立った。 葬儀翌日の7月25日、記者会見を開いた。 〈読売新聞〉記者に頼んで他の遺族たちの連絡先も調べた。 同年9月6日、事故発生から47日ぶりに遺族会を結成した。

遺族たちは遺族会結成前からすでに声を出し始めていた。 直ちに対応すべきことがあったからである。 事故発生12日後の8月2日、花火大会を開催した明石市役所が「事故調査委員会」を発足した。 事故調査委員会とは、警察の捜査とは別に、独立性と専門性を持った事故調査機関をいう。 日本で航空事故や鉄道事故が発生した際に設置するよう制度化されている。 当時は雑踏事故に対し事故調査委員会を設置する義務はなかったが、明石市幹部の判断で作られた。 法学、危機管理、災害·救急医学、建築人間工学、都市防災などの分野の専門家6人で構成された。

 

明石市歩道橋事故以降、遺族たちが歩んできた道

2001年7月21日 歩道橋事故発生

2001年8月2日 明石市、事故調査委員会を設置

2001年9月6日 遺族会の結成

2002年5月9日 県警・地検合同捜査本部、業務上過失致死傷の疑いで元明石警察署長と副署長ら12人を検察送致

2002年10月30日 遺族、明石市・警備会社・兵庫県警を相手に民事訴訟を起こす

2002年12月26日 神戸地検、5人起訴。元明石警察署長と副署長を不起訴処分

2003年3月10日 遺族、検察審査会に元警察署長と部署長の起訴申

2004年4月14日 検察審査会、元警察署長及び部署長「起訴相当」議決

2004年9月28日 神戸地検、元警察署長と副署長が再び不起訴処分

2004年12月17日 刑事裁判一審、全員有罪判決(元警察署長の責任も指摘)

2005年6月28日 民事裁判、遺族勝訴判決

2005年12月14日 検察審査会、元警察署長及び部署長に対して2度目の「起訴相当」議決

2006年6月22日 神戸地検、元警察署長と副署長3度目の不起訴処分

2006年7月21日 事件発生5年(公訴時効)

2007年4月6日 刑事裁判2審、控訴の棄却

2007年7月7日 元警察署長死去

2009年5月21日 改正検察審査会法施行

2009年7月15日 検察審査会、元部署長に3回目の「起訴相当」議決

2009年9月30日 神戸地検、元部署長4回目の不起訴処分

2010年1月27日 検察審査会、元部署長に対して起訴議決

2010年4月20日 元副署長を強制起訴

2010年5月31日 刑事裁判3審、上告棄却で刑確定

2013年2月20日 強制起訴1審、元部署長免訴判決

2014年4月23日 強制起訴2審、元部署長免訴判決

2016年7月12日 強制起訴3審、元部署長免訴判決(以後確定)

2022年7月21日 本「明石歩道橋事故 再発防止を願って」を出版

 

「信じられないほど無謀だ」

事故調査委員会の発足当日、下村さんら遺族3人は市長に会い、委員会に遺族を参加させてほしいと要請した。 以後も遺族たちは「警察を徹底的に調査すること」「救急活動も検証すること」「多角的な再発防止策を提言すること」「報告書の原案は遺族に提示すること」などを委員会に要請した。 事故調査委員会は遺族から事故当時の状況を聴取し、翌年の2002年1月30日まで調査を実施した後、2月11日に遺族に説明会を開催した。 すべての委員が出席し、遺族の質問を受けた。

こうして事故半年ぶりに出された142ページの「第32回明石市民祭りでの花火大会事故調査報告書」が出された。 同報告書は、その後開かれる裁判で長らく重要な資料になる。 報告書の序文は事故調査委員会を「公平性·中立性·客観性を担保するために誰かから指示·命令·干渉·圧迫などを受けず、独立して職務を行う第三者機関」と規定した。 それだけに報告書は明石市が警備を任せた民間の警備会社だけでなく、イベントを主催した明石市、ひいてはこの区域を管轄する警察にも責任があると指摘した。 歩道橋が混雑することは容易に予測できたのに、一方通行や迂回路の設定など、必要な対策を事前に取らず無制限に群衆を流入させたことは「とうてい信じられないほど無謀だ」と見た。

報告書は事故に対する科学的な分析も行った。 事故当時、歩道橋の上には約6400人がいて、横1m×縦1m、すなわち1㎡の空間に最大13~15人が密集していた(この場合に加えられる圧力は1m当たり300~540㎏である)。 密集度が1㎡当たり10人を越えれば群衆雪崩が起きかねない。 報告書には「新しいイベント場所の設定は新しい環境をもたらすので慎重に検討すべきだ」「主催者、警察署、警備会社が事前対応を組織的に実施すべきだ」など、再発防止のための提言も盛り込まれている。 「警察が協力しないことを知ってあまり期待していなかったが、調査をすごくちゃんとしてくれてありがたかったです(正春さん)。」問題は警察だった。 事故調査委員会は警察に事実照会をしたが、警察は「捜査中」として調査に応じなかった。

2002年12月、神戸地方検察庁は業務上過失致死傷の疑いで明石警察署の地域官、警備会社の支社長、市役所の公務員3人など現場責任者5人を起訴した。 明石警察署の地域官と警備会社の支社長は禁錮2年6カ月の実刑、市役所の公務員3人は禁錮2年6カ月に執行猶予5年を言い渡され、後に刑が確定した。 しかし、明石警察署の元署長と副署長は起訴されなかった。 遺族としては、受け入れがたい結果だった。 事故調査報告書によると、事故当日、警察は暴走族対策などに292人、雑踏警備に36人を配置した。 292人のうち暴走族対策に投入された経歴は190人だった(警察が暴走族の取り締まりに力を集中していたことが認められる)。 歩道橋の上には警察が一人もいなかった。

正春さんはあの日、歩道橋の状況についてこのように語った。 「誘導してくれる人は全くいませんでした。 梨泰院の事故と一緒です。 もしいたら簡単に防げる事故でした。 後に裁判で知ったのですが、何もしなかったから必然的に起きた「人災」だと思います。 私たちの事故でも、ある生存者が後で私たちにメールを送りました。 自分が押したからそうなったんじゃないかって、すみませんって。 でも、そんなことは全然関係ありません。 誰かが誰かを押してそうなるのではありません。 雑踏事故が起きる直前まで行ってしまうと、まったく防げません。 最初から歩く方向を一方通行にして、お互いにぶつからないようになんとかしない限り、もう無理なんですよ。」

下村さんは事故当日、警察が歩道橋の下を通るだけで、上に上がってこなかったと語った。 通報をしても「すぐ向かいます」という言葉だけだった。 「警察が最初110番通報が21件入ってきたと言いました。 現場にいた人が数千人で、私だけでも7回電話をかけたのに話にならないじゃないですか。 調べてみたら通報が集中して麻痺状態でした。110番 通報に対応する本部基地が神戸にあって、私たちが一度訪問調査に行ったんですよ。 普通は通報を録音したものを保存しておくんですけど、もう消してしまったといわれました。 事故の当日、歩道橋の状況を撮るビデオカメラが歩道橋の隣のホテルの屋上に設置されていて、明石警察署に送られ、録画機能もあったことを私たち遺族が明らかにしたにもかかわらず、録画されていないといっていました」

遺族たちは警察の証拠隠滅をめぐって問題を提起した。 同時に検察の不起訴にも黙っていなかった。 2002年12月、神戸地検が警察署長と副署長を不起訴すると、遺族は2003年3月、神戸地検の「検察審査会」に警察署長と副署長の起訴を申請した。 検察審査会とは、検察の不起訴処分が正しいかどうかを、くじで選ばれた市民たちが審議する機構である。 検察審査会は署長と部署長に対して「起訴が相当である」と議決したが、神戸地検はまた2人を不起訴処分にする。 検察審査会は再び「起訴が相当である」と議決した。 検察は再び不起訴処分にした。 検察審査会が2度も「起訴相当」議決を下したが、検察はびくともしなかった。

明石市歩道橋事故当時の現場の様子。ⓒ明石市事故調査報告書
群衆の圧力で倒れたフェンス。ⓒ明石市事故調査報告書

日本初の「強制起訴」事件

そうした中、司法制度に変化が生じた。 従来は検察審査会が「起訴相当」をいくら議決しても検察が無視すればそれで終わりだった。 ところが検察審査会が「起訴相当」を2回議決すれば「強制起訴」になるという法律が変わった。 法律が変わった後、検察審査会は再び「起訴相当」を2度議決し、この事件は日本初の「強制起訴」事件となった。

しかし、この過程で警察署長が2007年、病気で亡くなった。 2010年、副署長だけが強制起訴された。 副署長は「事故当日、署長に『重要な日だから現場に行きませんか』と提案したが、署長が『(監視)カメラがあるから大丈夫』と拒否した」として無罪を主張した。 署長が死亡し、事実関係を明らかにするには限界があった。 副署長が公訴時効(5年)にもかかわらず有罪判決を受けるためには、2002年に業務上過失致死傷罪で起訴され処罰された明石警察署の地域官と共犯関係が認められないといけなかったが、これも否定された。 副署長の役割は署長を補佐することで、地域官とは違うという理由からである。 2016年、最高裁判所(日本の大法院)で公訴時効満了にともなう副署長の免訴が確定した。 このように15年にわたる刑事裁判が終わった。

「結局署長のせいということで終わってしまいました。 死んでしまったら、これ以上議論できないじゃないですか。 最初から署長の責任が認められて起訴されたとすれば、公訴時効が過ぎることなんて起きなかったはずなのに…。刑事裁判は事故当日の対応に集中するだけで、あの日以前の指揮系統とか警備計画については不透明なまま終結しました。」 下村さんが語った。

それでも刑事裁判の隙を民事裁判が埋めたことは幸いだった。 遺族らは刑事裁判とは別に、2002年に明石市、兵庫県警察本部、警備会社を相手に民事損害賠償訴訟を起こした。 2005年、遺族が勝訴し、計5億6800万円の賠償判決が下された。 原告も被告も控訴せず、判決が確定した。

民事裁判で争点の一つは警備の責任の所在であった。 警察は「雑踏警備はもともと主催者側が自主的に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 一次的な責任は主催者にある」とし「自主警備」を主張した。 これに対して判決文は、「自主警備」が主催側が警備計画を立て当日警備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意味に過ぎず、これによって警察の雑踏警備に関する責任が軽減されたり免除されるわけではないと明示した。 「警察には出席者の生命、身体などの安全を確保する注意義務があり、(…)主催者側の自主警備だけに任せるのではなく、自らも適正な計画を策定する注意義務があった」。 関連する文献によると、雑踏警備は計画段階で80%、警備員などに計画を周知させる段階で90%が完了する。 当日の対応が左右する部分は残りの10%に過ぎない。 判決文は被告らが事故発生を事前に予見できたとし、「事前の準備段階で雑踏警備計画の策定が用意されていなかったことこそ、雑踏事故が発生した最も大きな原因」と指摘した。 刑事裁判ではまともに扱われなかった責任である。

民事裁判の判決文が遺族の心に残る理由は他にもある。 下村さんの話である。 「普通、そのような判決文には私たち(遺族)の話まで書いてくれませんが、『子供を連れて行った親の責任はない』とまで書いてくれました。 それが一番残っていますね。 どうしても事故当初から「連れて行った親が悪い」とか「お金がほしくてテレビに出ているんじゃないか」という誹謗中傷が多かったんですよ。 20年経った今でもそうです。 今回も私が韓国の梨泰院の事故でテレビに出たら、「余計なおせっかいするな」と言っていました。 それでも私たちの時は家に誹謗の電話が10~20通かかってきたり、手紙がたびたびきたくらいだったのに、インターネットのある今は1分で何万人も言ってしまうから…。韓国の遺族の方々は大変でしょうね」

事故以降、明石市役所が開催する花火大会は中止となった。 市役所は「総合安全対策室」を新たに組織し、イベントを開催する度に事前にチェックリストで予想人数と警備計画を検討するようになった。 毎年事故が発生した日を「市民安全の日」に指定し、遺族などを呼び新入職員に講演する。 事故調査報告書は市の防災センターに備えられており、インターネットでも誰もが見られる。 明石消防署も初動対応方式を変えた(20~21ページの記事を参照)。

明石市の位置する兵庫県の警察本部は2002年12月、「雑踏警備の手引き」という120ページの冊子を作った。 「これまでこの分野に関する調査、研究が不十分だったという反省」からである。 冊子は明石市歩道橋事故を経験した人たちの証言とともに、圧死の原理、警察と主催者の責任と対応要領を盛り込んだ。 「人の流れがぶつからないように一方通行で切り離す仕組みを用意する」 「出口の幅を入口より広くする」「時間差入場、時間差退場で群衆密度を時間ごとに分散させる」などである。 民事判決の後、兵庫県の警察本部長は遺族に会い、一人一人に頭を下げて謝罪した。 「市民の生命、身体を守るという警察の責務を果たせず、誠に申し訳ありません」。事故当時在任中だった明石市長と後任の市長も遺族に会い謝罪した。

長い刑事裁判が終わり、遺族と弁護団は事故から21年ぶりにこのすべての過程と結果を盛り込んだ本を出した。 2022年7月に出版された『明石歩道橋事故 再発防止を願って-隠された真相 諦めなかった遺族たちと弁護団の戦いの記録』(神戸新聞社)である。

明石市歩道橋事故で母親を亡くした白井義道さん。ⓒ時事INシン·ソンヨン

それから3ヶ月後、韓国で梨泰院の惨事が発生した。 明石市歩道橋事故で母親の白井トミコさん(75)を亡くした白井義道さんは「韓国の梨泰院雑踏事故の原因と背景が、明石市の歩道橋事故と同じだと思います。 実は「事故」ではなく「事件」です。 警察が市民の命を守ることよりも、暴走族や麻薬取締で実績を積もうとしたという点でそうです」と語った。 「混雑した場所に行った人が悪い」という人もいますが、大きな間違いです。 ハロウィンや花火大会を楽しもうと現場に行ったのであって、そんなことが起こるとは誰も想像もしないでしょう。 事故を予見して雑踏警備の対策を立てることは「警察」の最大の使命なのです。 主催者がいなくても同じです。 日本で発生したことではありませんが、同じ雑踏事故が発生したのは残念でなりません。

梨泰院事故で日本人2人も犠牲になった。 歩道橋事故の遺族たちは梨泰院の事故の日本人遺族にも本を送った。 今後のことの参考になることを願う気持ちからである。 現在遺族会長を務めている下村さんは4月に彼らに会う予定だと語った。 彼は事故以後の2012年、日本の国土交通省に設置された公共交通事故の被害者支援室の所属で「アドバイザー」としても活動している。 様々な事故に遭った遺族など被害者に情報を提供し、相談を支援する政府の組織である。 「韓国の梨泰院の遺族の方々はまだ現実を受け入れられない状態であろうと思います。 私たちもそうでしたが、1年経つと1年経ったそれなりの悲しみがやってきます。 消えるのではなく、精神的にもっと大変になります。 そういう意味で遺族の心をケアする施設や組織が絶対に必要です。 他国の遺族までも含め、集まって話しあえる窓口を政府主導で作ればと思います(下村さん)。」

歩道橋事故の遺族は同時に生存者でもある。 下村さんは夏になると息が詰まる気がしてネクタイを締めることができない。 事故当日、群衆雪崩の時、後ろに倒れて気絶し、胸の上に抱いていた次女の優衣菜(8)を亡くした三木清さん(当時32歳)も、人でにぎわうところに行ったり、花火を見たりすると、事故当日の記憶が鮮明によみがえると語った。 「遺族もそうですが、その中にいて救助された方々もとても大変であろうと思います。 私たちも実際に目の前で子供を亡くしましたからね。 梨泰院の事故でも友人や家族と行って生き残った方がたくさんいると思いますが、どうような扱いを受けているのかはわかりませんけど、命を絶った方もいらっしゃると聞いています。 そういう方々の心も国レベルで「ケア」してほしいです」。

次女を亡くした三木清さん。ⓒ時事INシン·ソンヨン
三木清さんが1月3日、明石市歩道橋の上で次女を亡くした事故当時の状況を説明している。ⓒ時事INシン·ソンヨン

20年以上戦い続ける中で、遺族に最も慰めになったのは、他の遺族との出会いと連帯だった。 1956年、新潟県の弥彦神社で124人が死亡した雑踏事故が起きた。 この事故で18歳の娘を亡くしたおばあさんは、事故から50年なるまで娘の温もりを手が覚えていると三木さんに聞かせた。 「私たちの時の教訓が生かされなくてごめんね」というその遺族の謝りが明石市遺族たちの心を慰めてくれた。 1991年信楽高原鉄道事故(列車の無断改造と装置の誤作動で両列車が正面衝突し42人が死亡、614人が負傷した事故)、1995年阪神淡路大震災と地下鉄サリン事件、1985年日航機墜落事故の遺族たちも、明石市の遺族たちに助言と応援を惜しまなかった。

最も多くの犠牲者が出た場所に設置された「想いの像」の前で手を合わせて祈る市民たち。ⓒ時事INシン·ソンヨン

「遺族の話を聞いてあげてください」

弁護団が結成されたのも大きな力であったが(22~24ページの記事を参照)、遺族会の結成からこれまでメディアからも多く助けられたという。 「なかなか事故の話を他人というか、友達にもあまりできないんですよ。 やっぱり話を聞いた方も気を遣うし。 記者たちが一番うなずいて聞いてくれました、あの時の私の気持ちを。 だから、話を聞いてあげてください。 すごく助けてもらったんですよ。 やっぱり言うところはそこしかないんですよね。 受け入れてくれる人が一人でもいると心がすっきりする部分もあるし…。メディアにいらっしゃる方々が、遺族の話をたくさん聞いてあげてください」(有馬友起子さん)。

1月3日に訪れた明石市の歩道橋は平穏だった。 歩道橋の端の階段のそばに小さな少女の銅像が置かれていた。 最も多くの犠牲者が出た場所である。 「想いの像」と呼ばれるこの銅像の服を、誰かが季節ごとに替えてくれるそうだ。 遺族は年末ごとに来て掃除をする。 通りすがりの人々が時々銅像の前で手を合わせて祈った。 子供たちは好奇心に満ちた目で足を止め、碑石に刻まれていた自分と同じ年頃の子供たちの名前をじっくりと眺めた。 「事故の風化は防げませんが、ここで大きな事故があったことを皆忘れないでほしいです。 二度と同じ事故が起こらないように(三木さん)。」

有馬正春さんの2人の子供が事故直前の「父の日」にお父さんにプレゼントしたもの。ⓒ時事INシン·ソンヨン
三木清さんの次女が書いた感謝状。ⓒ時事INシン·ソンヨン

娘の優衣菜さんが亡くなった後、三木さんは優衣菜が小学2年生の時に書いた「私のものがたり」というタイトルの日記帖を発見した。 最後のページの「感謝状」には、父親と祖母宛てに「今まで育ててくれてありがとう」と書かれていた。 まるで遺言のようで、仕事でそばにたくさんいてあげられなかったのが申し訳なくて、なかなか読めない。 優衣菜が生きていたら30歳である。 事故当時、30~40代だった遺族たちは今や50~60代になった。 有馬正春さんは事故直前、父の日に千晴、大が手作りしてくれたティッシュケースとカードケースを今もかばんに入れて毎日使っている。 くねくねとした縫い物で作った布のケースは、20年間使ってボロボロになり、毛羽がいっぱいできた。

千晴と大の葬式の日、正春さんは約束した。 「私たちが死んだ時に、あなたたちから、「お父さん、お母さんよく頑張ったね」と言われるように精一杯生きていく」と。 「そう言ってもらえ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と正春さんは語った。 納得できる結果ではないが、今の行政と司法体系の中でできることは全部やってきたという考えである。 日本では死者の名前を一文字ずつ取って、戒名をつけるという。 千晴と大の死後の名前である「しゃくせいきょう」「しゃくだいご」が刻まれている仏壇の前で正春さんが語った。 「韓国の梨泰院事故の遺族の方々によろしくお伝えください。 前を向いて頑張ってくださいと。前を向くしかないんですからね、どんなに辛くても。 応援してくれる人も絶対いますから。」

歩道橋事故で2人の子供を亡くした有馬友起子さんは、「メディアにいらっしゃる方々が、遺族の話をたくさん聞いてあげてください」と言った。ⓒ時事INシン·ソンヨン
千晴ちゃんと大ちゃんの戒名である「しゃくせいご」「しゃくだいご」が書かれている仏壇。ⓒ時事INシン·ソンヨ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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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発防止のために明石市がしたこと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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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일본 아카시/글 전혜원 기자·사진 신선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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