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염 지옥’이 있다면 꼭 이럴 것 같았다. 서울 중구 회현동 일대 쪽방촌. 정영남씨(67)가 사는 쪽방에 들어서니 숨이 턱 막혔다. 한낮을 약간 비껴간 시간인데도 그랬다. 차라리 바깥에 나가 있는 편이 나으련만, 당뇨가 심해 집안에 누워 지내다시피 하는 정씨는 그럴 형편도 아니었다. 방 안에 하나 있는 창은 건물 벽에 막혀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한 대 있는 선풍기는 종일 켜놓기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선풍기 한 대 돌리는 데 필요한 비용이 하루 1000원꼴. 하루 숙박비가 8000원인 것을 감안하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그 다음 들른 곳은 남구로 파랑새 나눔터 공부방(서울 구로구). 초행길이지만 공부방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현관은 물론 문이란 문이 다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데 시끄럽지 않으냐고 묻자 아이들이 입을 모아 투덜댔다. “문 열어놓고 공부하기 싫어요. 자동차 빵빵거리고, 지나가는 사람들 쳐다보고, 먼지도 들어오고….”

그러나 이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아이들이 우글대며 내뿜는 열기를 선풍기 한 대로 감당하기는 어려울 듯했다. 그러니 방문을 열어놓을밖에. 방 안을 둘러보니 에어컨이 설치돼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지원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정말 쪄 죽겠다 싶은 날이 아니면 에어컨을 켜지 않는다”라고 공부방 교사 성태숙씨는 말했다. “한 달 운영비 320만원으로 월세 내고 나면 교사 4명에 대한 인건비 지급하기도 빠듯하다”라는 것이다.

쪽방 내부는 바깥 기온보다 2~3℃ 높기 일쑤이다. 찜통 같은 그곳에서 창문은 제구실을 못한다.
‘여름철 노숙자 객사율, 겨울 못지않다’

없는 이들에게 여름은 가혹한 계절이다. 물론 살아가기는 한겨울보다 낫다. 노숙 생활 8년째라는 장 아무개씨(45)는, 겨울에 비하면 여름은 천국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답답한 ‘센터(노숙자 쉼터)’나 쪽방에서 나와 아무 데서나 잠들 수 있으니 지내기가 한결 수월하다는 것이다. 술에 취해 잠들어도 얼어 죽을 위험이 없는 것 또한 노숙자 처지에서는 축복이다.

그러나 돌발 위험 또한 많은 것이 여름철 특징이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에 따르면, 얼어 죽지는 않겠다고 안도하는 장씨의 바람과 달리 여름철 노숙자 객사율은 겨울 못지않다. 2001년 이 단체가 조사한 바로는, 6월 평균 객사율이 18.8명으로 일년 중 가장 높다. 인의협 주영수 대표는 “폭음한 노숙자들이 무더위에 무방비로 노출됐다가 사고를 당하는 일이 많다”라고 말했다. 반면 이 통계에 이의를 제기하는 쪽도 있다. ‘노숙인 다시서기 상담지원센터’ 이형운 팀장은 “여름철이라고 특별히 치명적인 사고가 많은 것은 아닌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옥탑방 내부는 바깥 기온보다 2~3℃ 높기 일쑤이다. 찜통 같은 그곳에서 창문은 제구실을 못한다.
노숙자 사망 원인에 대한 종합적인 실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어느 쪽 주장이 더 맞는지를 가리기란 쉽지 않다. 단 한 가지, 이것만은 분명하다. 여름 중에도 특히 위험한 시기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가 되면 노숙자뿐 아니라 일반인의 사망률도 크게 높아진다. 바로 폭염이 밀어닥칠 때이다.
국립기상연구소 응용기상연구과 최영진 과장은 “하루 이틀 찌는 듯 무더웠어도 다음 날 비가 와서 기온이 내려간다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며칠씩 고온이 지속될 때 사망자가 급증한다”라고 말했다(38쪽 상자 기사 참조). 폭염이 지속된 기간과 더불어 폭염에 얼마나 대비되어 있는가 또한 사망률을 가르는 변수이다. 열대지방처럼 평소에도 무더운 곳에서는 온도가 몇 ℃ 올라갔다고 사망자가 크게 증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무방비로 있던 사람들은 사정이 다르다. 2003년 급작스러운 폭염으로 3만50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유럽이 그 경우다.  

이런 폭염에 따른 피해는 사회적 약자층에 집중되는 특성이 있다. “극한 고온이나 극한 저온처럼 극한 기상에 따른 피해는 빈부 격차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라고 전상일 한국환경건강연구소장은 말했다. 열악한 주거 조건 탓에 무방비로 폭염에 노출된 노숙자나 쪽방 거주자, 독거노인 등이 최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난한 ‘88만원 세대’ 또한 예외는 아니다. 대구에서 다니던 대학을 휴학한 뒤 취업을 위해 상경한 임승혁씨(26)가 처음 정착한 곳은 옥탑방. 그러나 임씨는 서울 와서 맞은 첫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부동산 중개소에 방을 내놓았다. 말 그대로 온 집이 불구덩이 같았기 때문이다. 기자가 찾아간 여러 거처 중에서도 옥탑방은 최악이었다. 서울 시내 낮 최고 기온이 30℃이던 날, 임씨의 옥탑방 기온은 32℃를 웃돌았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은 밤에도 견디기가 어렵다”라고 임씨는 말했다.
7년 전 전남 해남에서 상경해 반지하 방에 살고 있는 대학원생 고현길씨(28)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년 중 3개월은 집이 없는 셈치고 산다. 여름에 샤워를 하고 나오면 곧바로 땀이 흐른다. 방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라고 고씨는 말했다. 하나 있는 창문은 무용지물. 하수도 냄새가 역류해 문을 열 수 없다.

ⓒ반기웅공부방 내부는 바깥 기온보다 2~3℃ 높기 일쑤이다. 찜통 같은 그곳에서 창문은 제구실을 못한다.
물론 주거 환경이 이렇게 열악해도 신체가 건강한 이들은 사정이 그나마 나은 편이다. 폭염은 특히 심장이나 심혈관계 질환, 뇌졸중을 앓는 환자에게 치명적이다. 날씨가 더워지면 우리 몸이 체열을 방출하기 위해 혈액 순환을 빨리 하면서 심장에 무리를 주기 때문이다. 그간의 연구에 따르면, 일 평균기온이 27~30℃를 초과할 때 이들 질환자의 사망률은 극적으로 증가한다.

정책당국 또한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폭염 대비 관계부처 합동지침’을 정해 실행한다. 폭염특보를 발령하고, 홀로 사는 노인 등 취약 계층에 대해서는 관련 부처와 지방자치단체가 협조해 폭염 발생시 긴밀하게 대응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7~8월에는 이른바 ‘무더위 쉼터’라는 것도 운영한다. 서울시에 따르면, 2008년 7월 현재 무더위 쉼터로 지정된 곳은 2559곳에 이른다.
그렇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니 그 실질은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말이 좋아 무더위 쉼터이지, 쉼터로 지정된 곳의 절대다수는 사회복지관·경로당(1980곳), 주민자치센터(495곳), 마을회관(17곳)처럼 기존 시설을 이름만 바꾼 것이었다. 취약 계층 중 이런 시설을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서울 중구 회현동 쪽방촌에 사는 임병희 할아버지(83)는 걸어서 3분도 안 되는 거리에 경로당이 있지만 이곳에 가본 일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여기 살면서 딱 한 번 가봤어. 근데 눈치 보여서 안 가”라고 임 할아버지는 말했다. 노인들도 처지가 다르면 어울리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폭염, ‘재난’ 차원에서 대응해야

그렇다면 폭염 대책 또한 취약 계층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쪽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고 안준관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말했다. 이를테면 쪽방촌 같은 취약층 집단 거주지에 공동 샤워시설이나 냉방시설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름이면 이들 취약 계층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옅어지는 것 또한 문제이다. 남대문 지역 상담센터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 김솔씨는 “연말연시에 집중되는 기업의 지원이 여름에도 필요하다. 쪽방촌 사람들의 여름나기는 겨울나기 못지않게 힘겹다”라고 말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폭염을 재난으로 규정해 국가 차원의 대응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장재연 교수(아주대·예방의학)는 지적했다. “유럽을 덮쳤던 극심한 폭염이 수년 이내, 아니 바로 올해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라면 그것은 엄청난 사회적 재앙이 될 것이다”라고 장 교수는 말했다.

기자명 김은남 기자·반기웅 인턴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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