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구

젊은 사람이 손잡고 가는 걸 오랜만에 본다고 정지아 작가(57·사진)가 말했다. 노인 비율이 높은 전남 구례에서 서울로 올라온 참이었다. 대학로 마로니에공원도 단풍 든 은행나무로 운치 있었지만 워낙 풍경이 탁월한 곳에서 왔기 때문에 감흥이 덜했다. 그는 2011년 서울 생활을 접고 귀향했다. 어머니와 둘이었다가, 그냥이·저냥이 커플에 새끼인 애플과 구글까지 고양이 식구가 네 마리 늘었다.

정 작가의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출간된 지 두 달 지났다. 10만 권 이상 팔리면서 대부분의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1~2위를 기록했다. 딸의 시선에서 ‘전직 빨치산’ 아버지의 장례식 3일을 다룬 소설이다. 이념과 지향이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하는 장례식장은 묘하게 평화롭다. 아버지의 옛 동지들, 교련 선생이자 〈조선일보〉 애독자로 살아온 우파 친구, ‘빨갱이 형 때문에 집안이 망했다’며 평생 형을 원망한 작은아버지, 아버지의 담배 친구였던 노랑머리 소녀까지 다양하다. 이들과 아버지 사이 얽힌 사연 속에 한국 현대사가 함축되어 있다. 작가의 서사적 역량과 사투리 입말을 살린 해학적 문체가 호평받으며 입소문을 탔다. 유시민 작가와 문재인 전 대통령의 추천도 분위기를 거들었다.

스물다섯 살, 남로당 빨치산 출신 부모의 삶을 기록한 〈빨치산의 딸〉을 출간했다. 이적표현물로 분류돼 판금 조치를 당했고 작가 본인도 수배되었다. 5년 뒤 등단했고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을 냈다. 그사이 〈빨치산의 딸〉도 복간되었다. 이번이 사실상 첫 장편소설이다. 실제 작가의 아버지를 닮았다는 소설 속 고상욱은 먼 친척의 보증을 서서 떠안은 빚을 딸에게 전가하면서도 친척을 두둔하며 “오죽흐믄 글것냐”라고 말한다. 툭하면 사회주의를 말하고 먼지 한 톨에도 유물론을 운운하지만 고추밭에서의 두 시간 노동도 잘 못 견딘다. 11월7일 대학로에서 열린 ‘문학주간 2022–둘, 사이’ 개막 토크에서 작가는 이 작품이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냐’고 말하던 딸이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냐’고 말하는 아버지를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요즘은 아무리 밀쳐내도 계속해서 들이대는 저냥이 같은 ‘오지라퍼’형 인물에 시선이 간다는 그를 만났다.

아흔일곱 어머니와 자주 싸운다고.

연세가 드니 점점 아이가 되셔가지고…. 큰 싸움은 아니다. 이를테면 당신은 고기를 좋아하는데 나는 별로 안 좋아한다. 고기 먹으라고 하면 나는 안 먹어도 된다 하고, 나는 매운 걸 좋아하니까 엄마에게 그럼 매운 무생채를 드셔보라고 한다(웃음).

이번 소설의 반응이 좋다. 이유를 짐작한다면?

운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책이 좋아도 처음에 불씨가 안 댕겨지면 지난번 내 책들처럼 됐을 텐데, 여러분들이 잘 살려주었다. 놀랍긴 하다. 빨치산이 주인공이라 먹히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했던 세대에게는 옛날 감성을 불러일으킨 것 같고, 20~30대 독자들은 이데올로기에 아무 관심이 없어서 안 받아들일 이유도 없는 것 같다. 아버지라는 보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웃기게 쓰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인상적인 리뷰가 있는지?

〈경향신문〉 기자 출신인 김택근씨가 쓴 칼럼이 있다. 집안이 좌익 때문에 망했다고 했다. 가족이 빨치산에 죽임을 당해 아버지가 평생 웃은 적이 없다고. 나와 정반대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고 있는 점이 놀랍고 감사했다. 페미니스트로 추측되는 20대 독자들이 자신의 아버지와 평생 반목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했다. 그런 반응이 뿌듯했다. 소설이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구나 싶어서.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이었던 아버지 정운창씨와 정지아 작가, 남부군 정치지도원이었던 어머니 이옥남씨(왼쪽부터). 1997년 정지아 작가의 석사학위 수여식 때 모습이다. ⓒ정지아 제공

소설 속 부모의 일화는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했다고 들었다.

어머니 아버지 이야기는 대체로 사실이지만 똑같지는 않다. 이를테면 엄마가 (소설과 달리) 집에서 1인자다. 당연하잖나. 아버지가 돈을 제대로 못 벌고 매일 사고를 치는데. 돈 버는 사람이 1등이라 엄마가 소설에서처럼 아버지에게 ‘깨갱’하지는 않았다. 또 화자의 경우 지금의 나와는 굉장히 다르다. 아버지와 친했고 아버지를 되게 좋아했다. 관계를 소설적으로 재배치했고 화자의 태도는 일부러 그렇게(냉정하게) 만들었다. 빨치산을 불편해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부모에게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 설정이다. 완전히 새로 만들어낸 캐릭터가 많다. 작은아버지 일화도 그렇고 내가 겪은 일은 아니지만 어디엔가 있는 이야기다. 실제 그런(연좌제를 겪은) 집들이 많았다.

“아버지가 죽었다”로 시작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가 아닌데.

그것도 객관화의 일환이다. 카뮈의 〈이방인〉이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한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그에 대해 묻는 사람도 있는데 그걸 생각한 건 아니다. 죽음으로 시작한 이유는 있다. 아버지 동료 몇 분이 살아 있긴 하지만 저물어가는 세대이고, 보내놓고 시작하면 이야기가 좀 더 편안하게 진행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성적으로 고민이 많았다. 살아 있는 순간부터 쓸까 했는데 장례식 3일로 압축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2008년, 실제 아버지 장례식장의 풍경은 어땠나?

친척들도 있고 내 손님도 많았는데 아버지 손님에게 초점을 맞추자면 일단 우파 친구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동지들보다 더 좋아했다. 신념이나 이데올로기보다 사람이 먼저였다. 제일 놀랐던 것은 옛 동료들이다. 이념적으로 아직도 굉장히 견고하다. 아버지는 굉장히 현실주의자다. 거기다가 상이용사가 와서 화를 내며 (빨갱이 장례식장이라고) 막 때려 부수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다들 너무 멀리 가 있고, 지나치다. 그들이 한 장례식장 안에 있었다. 아버지는 그 모두를 보고 살아온 셈인데 참 묘하다는 생각을 했고 오래 마음에 남아 있었다.

구례에 내려간 지 11년째다.

엄마가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스트레스에 약한 편인데 말년에 아버지에게 치매기가 있었다. 남들은 잘 몰랐지만 엄마는 안달복달하느라 혈압이 올라가고 오만 병이 다 있었다. 서울로 모실까 하다가 엄마에게 감옥살이일 것 같아서 2년이면 너끈히 가시겠지 하고 내려왔다. 그랬더니 어느 날 검은 머리가 나기 시작했다(웃음). 아버지가 가니 병이 나았다. 식사도 평생 아버지 입맛에 맞춰 하다 이제 당신 입맛대로 드신다.

작품에서처럼 아버지를 적으로 생각했던 사람도, 아버지가 적으로 생각한 사람도, 같이 산에 올라갔다 죽은 동료의 가족도 한곳에 살았다. 구례는 어떤 곳인가?

내 얘기부터 하자면 처음에(2011년) 구례로 내려가는 게 싫었다. 지내는 기간이 늘면서 한동안 힘들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인데 서울에서 멀어지니까 나를 안 찾는 것 같고 점점 잊혀진 존재가 된 것 같은 시기도 있었다. 갱년기 증상도 같이 왔다.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는 편인데 되게 우울하더라. 어느 날 친한 제자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보냈다. 그 후 외로울 새가 별로 없다. 고양이들 때문에 힘든 시기를 넘긴 것도 있고, 또 하나, 엄마 아빠의 인연이 다 내게로 이어졌다. 책에 등장하는 떡집 언니 같은 인물이 달에 한두 번씩 꼭 엄마를 찾아온다. 소설 속 김상욱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인물도 있다. 항상 참기름이며 쌀을 가져오면서도 미안하다고 한다.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겠다고 내 아버지와 약속했는데 자주 못 와 미안하다고 했다. 처음에는 ‘자식도 아니면서…’ 했는데 어쨌든 그런 사랑을 받고 사니까 깊은 마음에 대해 좀 느끼게 된다.

아버지에게는 어떤 공간이었을까?

사회주의라는 게 뭐겠나. 가난한 사람도 부자랑 똑같이 공부할 수 있고 여자도 남자하고 똑같이 공부할 수 있는 세상이다. 지금은 사회주의나 이데올로기가 ‘추상’이지만 아버지에게는 현실이었다. 만들고 싶었던 세상이 구례에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현실을 버리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만 그런 게 아니라 그 시기를 견뎌온 사람들이 구례에 많다. 적이든 아니든 속으로는 싫어도 이웃집인데 어쩌겠나. (장사를 한다고 가정하면) 빨갱이라고 안 팔 수 없고 경찰 가족이라고 안 팔 수 없다. 생활로서의 이데올로기다. 지금은 이데올로기가 너무 관념적이다. ‘태극기부대’도 그렇고, 그래서 과격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는가’가 고상욱의 삶을 관통하는 말이다.

정치사상일 뿐 사회주의 쪽에도 나쁜 사람이 있다. 우파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고. 어쨌든 사회주의자 중에 공동체적인 것을 지향하는 사람이 더 많았을 거다. 한 개인을 놓고 보면 장단점이 있다. 내 아버지도 써놓으니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제로 엄마는 괴로웠다. 아파도 병원을 못 가는데 아버지가 남한테 돈을 주니까. 그런데 사실 나는 아버지가 그런 사람인 게 좋았다. 어느 날은 두 분이 (소설에서처럼 빚보증 문제로) 싸워서 내가 갚을 테니 싸우지 말라고 했다. 나는 내 아버지가 돈 받아내려고 쫓아다니며 욕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꺼이 그 돈을 갚으려고 하는 사람이라 자랑스럽다고 했다.

실제 빨치산의 딸로 사는 건 어땠나?

어릴 때는 힘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중학교 때 제일 힘들었다. 가까웠던 아버지가 (수감되어) 곁에 없었다. 두 분 다 여전히 빨치산의 자세였다. 가난한 게 당신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산에서 집도 이불도 없이 살았으니까. 선택하지도 않았던 나는 한창 사춘기 때 화장실도 없는 집에서 요강에 볼일을 봐야 했다. 국가와 부모에 대해 다 냉소적이었다. 이런 얘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게 가장 힘들었다. 아버지가 감옥에 있는데 죄목이 빨갱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나. 진실을 말하지 못하면 사람 얼굴이 좀 이상해진다. 그때 사진을 보면 그런 상태가 드러나서 얼굴이 삐딱하다. 아버지가 돌아오고 나서는 옛날만큼 친하지 않지만 일반인으로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며 조금 풀어졌고 대학에 가서는 완전히 이해했다.

관계가 좋은 편인 것 같다.

한겨울에도 차가운 신발을 신어본 적이 없다. 엄마가 심장에 품어서라도 따뜻하게 녹였다. 아버지는 나만 보면 예뻐서 어쩔 줄 몰라 발이 땅에 닿지 않게 했다. ‘어디 여자가.’ 이런 말 한번 들어본 적 없다. 부모의 절대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자랐다. 가난이나 부모의 이데올로기 같은 건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면 이해할 수 있다. 부모가 미성숙해 아이를 학대하고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건 다르다. 다 커서 언제까지 부모 탓을 할 거냐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는데 지나고 보니 나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스스로 교정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거고 누구의 사랑이나 지원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그걸 극복할 힘이 없는 게 아닌가 싶더라. 그래서 어디 가서 고생했다는 말 안 한다.

학생운동을 했는데 아버지의 반응이 궁금하다.

반대를 하진 않았고 노선에 대해 비판을 했다. 급진주의가 혁명을 망친다고 해서 그때는 싸웠는데 결과적으로 아버지 말이 맞았다.

‘작가의 말’에서 소설이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냥 현실을 살았던 사람이다. 어느 순간 사회주의를 믿지 않았으니까. 다만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애썼다. 환경운동 단체를 만들고 젊은 친구들이 뭘 하면 거기에 가고 눈 오면 눈을 치우고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산 것 같다. 빨갱이라서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이데올로기는 옛날부터 생활이었는데 나만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정지아 작가가 스물다섯 살 때 출간한 〈빨치산의 딸〉(왼쪽)은 당시에 이적표현물로 분류돼 판금 조치를 당했다.〈아버지의 해방일지〉(오른쪽)는 작가의 사실상 첫 장편소설이다.

32년 전 나온 〈빨치산의 딸〉은 개인적으로 어떤 작품인가, 그때와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나?

묘사를 조금 멋들어지게 한 것일 뿐 100% 사실에 입각해 썼다. 해방 정국에서 사회주의자의 활동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시절이라 역사적 책무에 가까웠다.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문학이 아니라 기록물인데 사람들이 나더러 소설가라고 했다. 좋은 글이 아닌데, 그렇다면 좋은 글은 뭘까 생각했다. 유명해져봤기 때문에 명성에 취하지 않고 좋은 글을 쓰려고 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세월이 지났고 여전히 빨치산이라는 말만 들어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책이 잘 팔리는 게 사회가 그렇게 경직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반증인 것 같다. 세상이 예전보다는 좋아졌다.

사실상 첫 장편소설인데 어려움은 없었나?

왜 이렇게 오랜만에 썼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는데, 못 쓴 거다. 잘 썼으면 썼겠지. 입체적  캐릭터를 잘 못 만들었다. 진지한 자세로만 사람을 보고 속된 걸 혐오하고 그러다 보니 단편은 나오는데 장편으로 확장이 잘 안 되었다. 몇 번 쓰다 엎었고 900장 넘게 써서 연재도 했는데 포기했다. 나는 내가 깨달은 만큼밖에 못 써낸다. 인간을 이해하는 폭이 지금까지 되게 좁았던 것 같다. 소설에 나오는 떡집 언니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 조용히 티내지 않고 알아서 다 해놓는 사람. 그런데 요즘은 ‘오지라퍼’들에 시선이 간다. 이들이 없으면 세상이 얼마나 삭막할까. 구례에서 ‘엄마와 아버지의 사람들’을 만나며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조금 넓어졌다. 장편을 쓸 수 있게 됐다. 내가 ‘성장애주의자(成長愛主義者)’인데 변화가 시작됐으니 더 빨리, 더 넓어질 수 있지 않을까.

전작들에도 현대사를 겪어낸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역사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미 이름에서부터 부여받았다(그의 이름은 지리산의 ‘지’와 백아산의 ‘아’에서 따왔다). 태생도 그렇고 구례라는 공간 자체도 그렇다. 이를 짐스럽게 여긴 때도 있지만 어떤 개인이든 자신의 특수한 상황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내게는 역사성일 것이다. 얼마나 잘 살려낼 수 있을지는 내 역량이지만 작가로서는 기회다.

오랫동안 대학에서 문예창작 강의를 했다.

성장애주의자라고 하지 않았나. 크는 걸 보는 게 너무 좋다. 굉장히 신난다. 고양이도 그렇고 호박 같은 식물도 비 온 뒤에 쑥쑥 큰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호박만도 못하다고 그러는데. 성장하는 데 내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그게 좋았다. 좋은 글을 쓰는 것보다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는 게 흐뭇했던 것 같다. 월급의 거의 반을 애들 밥 먹이는 데 썼다. 제자들이 건실한 직장인이 되어 나에게 좋은 술을 사주고 있다(웃음).

대하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는데.

현대사를 다룬 대하소설이 내 마지막 작품이면 좋겠다. 서울에 전기가 들어오던 날부터 시작해 우리의 근대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유쾌하게, 무겁지 않게 입체적 인물을 등장시켜서 쓰고 싶다. 아마 한 70세쯤에 쓰지 않을까. 우리 집안이 장수 집안이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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