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지난 9월 마지막 주 어느 저녁, 집 앞의 단골 식당에서 동태탕을 시켰다. 보통은 늘 막걸리 한 병과 함께 먹었는데, 그날은 도저히 술을 마실 수 없었다. 화가 난 상태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이미 화에 취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난생처음으로 스마트폰을 개통했다. 나는 지금까지 ‘삐삐’나 ‘핸드폰’을 가진 적이 없었고, 스마트폰도 영영 소지할 생각이 없었다. ‘자유로운 영혼’이어서도 아니고, 기계문명이나 자본주의에 저항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여기서 길게 말할 수 없지만, 내가 통신기기를 갖지 않는 이유는 심리적 장애가 있어서다.

다음(Daum)은 올해 여름부터 한메일 사용자에게 이런 공지를 내보냈다. “2022년 10월1일 이후 Daum 로그인 기능이 카카오 계정으로 일원화됩니다. 카카오 계정으로 통합하지 않으시면 10월1일 이후 Daum 아이디 로그인은 불가합니다.” 내 명의의 스마트폰 없이 카카오톡에 가입하는 방법을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았는데. 다들 방법을 몰랐다.

다음이 공지를 보내기 시작한 것과 같은 때, 네이버도 똑같은 공지를 내보냈다. 네이버는 카카오와 같은 회사가 아닌데, 담합이 없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까. 다음과 네이버를 포기하고 지메일로 옮겨가려고 했으나, ‘이걸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 전철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시고 헤어진 뒤, 스마트폰 없이는 택시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몇 번이나 실감하고 나서, 스마트폰이 필수품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심 끝에, 친구가 폐기한 삼성 A5 스마트폰을 거저 얻어 집 앞 가게에서 개통했다.

신념을 지키지 못하고 반강제적으로 신념을 빼앗긴 것도 수치스럽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내 신념을 지키기 위해 내가 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변명을 하자면, 나는 인터넷이나 스마트폰과는 거리가 먼 아날로그 시대의 사람이라서 인터넷이나 컴퓨터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런 데다가 기계치이기까지 해서, 내가 여태까지 좋아서 끼고 살았던 기계는 타자기와 오디오, 자전거가 전부다.

꽤 오래전에 헌책방에서 ‘철학자가 스마트폰을 버리고 월든 숲으로 간 이유’라는 부제에 혹해서 윌리엄 파워스의 〈속도에서 깊이로〉(21세기북스, 2011)를 사서 읽은 적이 있다. 지은이는 지난 몇십 년 동안 인류는 스마트폰 때문에 더 많이 바빠졌고, 외향적이 되었으며, 인간의 바닥짐(배의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바닥에 놓는 무거운 물건) 같은 내면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외적인 삶과 내적인 삶 사이의 균형”을 잡을 것과 주말에 모뎀을 끄는 ‘인터넷 안식일(the Internet Sabbath)’을 해결책으로 내어놓았다. 실용적인 충고이기는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거대 권력과 인터넷 전체주의를 조감하기에는 너무 나이브하다.

그래서 새로 찾아본 것이 만프레드 슈피처의 〈노모포비아〉(더난출판사, 2020), 제임스 볼의 〈21세기 권력〉(다른, 2021), 박승일의 〈기계, 권력, 사회〉(사월의책, 2021), 롭 라이히·메흐란 사하미·제러미 M. 와인스타인의 〈시스템 에러〉(어크로스, 2022)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가리켜 ‘세계-내-존재’라고 했지만, 그가 지금 살았다면 세계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큰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현재 세계는 오프라인(인터넷 바깥) 세계와 온라인(인터넷 안) 세계로 나뉘어 있다.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상용화되기 시작한 30여 년 전만 해도 온라인 세계가 오프라인 세계에 딸려 있었으나, 30억 넘는 인구가 인터넷에 목매달고 있는 현재는 온라인 세계에 오프라인 세계가 부수되어 있다. 코로나 사태는 이처럼 전도된 세계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세계는 온전히 ‘온라인 세계’ 안에 담겼다. 비대면 가운데서도 온라인 세계가 있었기에 오프라인 세계가 겨우 건사될 수 있었다.

더 이상 사적 영역이라고 할 수 없다

박승일에 따르면 인간은 더 이상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 안에 있지 않고, 매개(Mediation) 안에 있다. 여기서 매개는 인터넷·와이파이·스마트폰·클라우드·빅데이터·사물인터넷뿐만 아니라 구글과 페이스북의 검색 알고리즘을 모두 아우른다. 이들 각각이 저마다 기술적 특징과 역사적 발전 과정을 갖고 있지만, 결국 이 모두는 별개의 것들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일정한 경향성과 상호 관련성 속에 위치해 있다. 지은이는 인터넷이 우리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지만, 매개의 사용자가 행사하는 자유가 곧바로 사용자를 구속하는 환경관리 권력과 정신관리 권력을 생성한다고 말한다. 전자는 일상적 환경을 인터넷의 상시적·잠재적·자동적 매개 안에 있도록 구성하고 관리하는 권력의 벡터(vector)를 뜻하고, 후자는 사용자의 정신을 특정한 방향과 형태로 인도해내는 권력의 벡터를 뜻한다.

매개가 있기 전에, 세계의 주인은 신이라고 가정되었다. 성직자들은 기껏해야 신의 대리인일 뿐이었고, 성직자를 뒤이은 권력인 왕이나 대통령도 극히 적은 일부 지역에서만 주인 노릇을 했다. 반면 구글이나 페이스북은 국가가 아니면서 국가이고, 세계가 아니면서 실질적으로 세계를 대리하고 있다. 예전의 국가는 시민의 감독을 받고, 여론을 따라야 했으며, 국가의 주요 결정은 공개되었다. 하지만 매개의 주인은 온갖 독점과 검열을 하고 여론을 조종하기까지 하면서 자신들의 일을 사적(기업) 영역으로 포장한다.

스마트폰이 있기 전에 시민의 신원 증명은 국가에서 발급하는 주민등록증으로 완전히 해결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주민등록보다 스마트폰(번호)이 더 필수적인 신원 증명 수단이다. 이처럼 국가가 자신이 해왔던 공적 임무를 매개에 아웃소싱하고 있고 매개가 거기에서 이득을 취하고 있다면, 매개는 더 이상 사적 영역이라고 할 수 없다. 카카오 계정을 통해서만 인터넷 로그인을 가능하게 했기에 그동안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은 인터넷 요금과 스마트폰 요금을 이중으로 내야 한다(스마트폰을 쓸 일이 없는 나는 카카오 계정을 만들고 나서 스마트폰을 곧바로 책장 위의 구석에 올려놓았다. 곧 그 위치를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인터넷이 물이나 공기처럼 공공재가 된 지금, 시민의 권리를 제약하는 다음의 로그인 변경 정책은 당연히 공론에 부쳐져야 했고 시민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시스템 에러〉의 지은이들은 매개가 세계를 점거한 지금,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민들이 매개를 기반으로 한 기업의 여러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술이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면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엔지니어, 기업 리더, 벤처투자가에게 넘겨야 한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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