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부 런던의 루이셤에 위치한 루이셤 기부 허브(Lewisham Donation Hub)는 코로나19 이후에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프로젝트다. 생필품과 음식 등을 기부받아 이민자나 난민처럼 정부의 손이 닿지 않아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아무 대가 없이 돕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엘살바도르에서 온 가족은 지난 몇 주간 중고 노트북을 수소문했다. 열한 살인 딸 달하가 학교에서 과제를 내지 못해 매번 방과후에 남는 벌을 섰기 때문이다. 아버지 라파엘 씨(34)와 어머니 다니아 씨(35)는 엘살바도르 폭력 조직의 범죄를 피해 영국 런던으로 떠나온 난민 신청자(asylum seeker)이다. “아이들이 영국에서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라파엘 씨는 두 아이가 더 있다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난민 신청자에게 제공하는 임시 숙소에 다섯 달째 머무르고 있지만, 다섯 식구가 미래를 꿈꾸기에 영국은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지금 영국에 산다면 난방과 음식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물가 폭등 때문이다. 지난 7월 영국 통계청(ONS)은 영국의 소비자물가지수가 전년 대비 10.1% 올랐다고 보고했다. 40년 만의 최고 기록이다. 우유, 밀가루, 버터 같은 주요 식자재는 물론이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가스와 전기 요금이 눈에 띄게 치솟았다. 10월 기준 가구당 에너지 연간 최대 부담액이 3549파운드(약 563만원)에 이른다. 〈더타임스〉 8월16일 보도에 따르면, 영국 성인 16%가 돈을 아끼려고 정기적으로 끼니를 건너뛰었다.

라파엘 씨는 아마 그 16%에 속할 것이다. 그를 만난 건 9월28일 런던 루이셤에 위치한 ‘루이셤 기부 허브(Lewisham Donation Hub·이하 루이셤 허브)’에서였다. 다양한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루이셤 지역은 이방인들의 ‘피난처’로 불릴 만큼 자선단체와 푸드뱅크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이다. 루이셤 허브도 그중 하나다. 코로나19 이후 식량난과 빈곤에 대응하기 위해 2020년 6월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프로젝트다. 생필품을 무료로 구할 수 있어 아프가니스탄과 우크라이나 난민들에겐 꽤 유명했다. 라파엘 씨 가족은 이곳에서 15인치 ‘델’ 노트북과 세 아이를 위한 운동화, 여벌옷을 구했다. 지난 2년간 하루 평균 100여 명이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전기를 쓰지 못해 초를 가져가는 경우도 있었다. 취재진이 놀라자 루이셤 허브 대표인 로런스 스미스 씨(36)가 농담조로 말했다. “영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9월28일 엘살바도르 난민 가족이 루이셤 기부 허브를 찾았다. 딸 달하, 라파엘·다니아 부부(왼쪽부터). ⓒ시사IN 신선영

〈시사IN〉은 ‘세계의 코로나 대응, 현장을 가다’ 기획의 취재지 중 한 곳으로 9월24일부터 10월1일까지 영국 런던을 찾았다. 영국은 팬데믹의 상흔이 깊은 나라다. 2020년 초기 코로나19 유행 통제에 실패하며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인구 100만명당 코로나19 누적 사망자 수는 3084.49명으로 미국의 뒤를 이었다(10월10일 기준, 한국은 553.89명). 영국은 공공의료 체계인 국가보건서비스(NHS)와 과학자문단(SAGE) 등 공중보건 위기 발생 시 대응체계가 갖춰져 있음에도 피해가 컸다. ‘이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회 각 분야에서 통렬한 반성을 담은 보고서가 쏟아졌다. 불평등 문제는 하나의 챕터였다.

2021년 10월12일 영국 하원 보건사회복지위원회와 과학기술위원회는 ‘코로나바이러스:지금까지 배운 교훈’이라는 147쪽짜리 보고서를 내놓는다. 역학자부터 NHS 의료진, 간병인 단체, 장애 아동을 돌보는 가족 등의 의견을 모아 영국 정부가 코로나19 대응에서 무엇을 놓쳤는지 6개 주제로 평가했다. 그중 재난 불평등을 조명한 점이 눈에 띈다. 보고서에 따르면, 아프리카계·아시아계 및 그 외 소수인종 출신(BAME:Black, Asian and Minority Ethnic)의 코로나19 사망률이 백인보다 현저히 높았다. 또 빈곤한 지역일수록 코로나19 사망률도 올라갔다. 같은 기간 학습장애·자폐증을 가진 이들의 사망률도 비교적 높게 나타났다. 의료 접근성이 크게 제한된 것이 이유였다.

재난이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전 세계가 동시에 경험했지만, 모두가 이 피해를 측정하진 않았다. 영국에서는 지역·인종·성별·장애 유무 등 사회경제적 요인에 따른 코로나19 사망률 차이를 파고들었다. 어떤 이유였을까? 소매업, 배달업 등 코로나19에 감염될 위험이 높은 ‘최전방(Frontline)’ 업종에서 일하는 소수인종의 비율이 높았다. 강력한 봉쇄 조치가 시행되던 때에도 대면 업무를 지속해야 했던 필수 노동이다. NHS 의료진 사망자의 70%가 아프리카계·아시아계·소수인종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영국 사회를 떠받치는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물었다. 영국 공중보건국은 조사에 착수했다. 개인보호구(PPE)가 이들에게 충분히 제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근거로 제시되었다. “향후 어떠한 형태의 위기에서라도 흑인, 아시아인 및 소수인종 출신 NHS 직원이 정부 의사결정 구조에 포함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영국 의회가 보고서에 남긴 권고다.

가난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건강 불평등 분야 석학인 마이클 마멋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역학·공중보건학 교수도 이 문제에 골몰했다. 마멋 교수가 보기에 영국과 미국 같은 ‘고소득 국가’에서 유독 높은 코로나19 사망률을 보였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했다. “건강을 우선시하지 않는 정치 문화, 심화된 사회경제적 불평등, 공공의료 서비스에 대한 예산 감축이 코로나19의 높은 초과 사망률로 이어지게 했다. 우리는 이 공중보건 위기에 대응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마멋 연구팀은 교육 공백, 실업, 정신 건강, 아동학대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코로나19가 끼친 영향을 조사했다. 2020년 12월 발표된 ‘더 공정하게 재건하기(Build Back Fairer)’ 보고서에 따르면, 가난할수록 팬데믹의 상흔도 더 컸다.

그러나 2022년 가을, 런던에서 감염병이란 단어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버킹엄 궁전에서 열리는 근위병 교대식을 보기 위해 수천 명이 거리낌 없이 모이는가 하면 비좁은 지하철 안에서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지도에 표시된 코로나19 검사소를 찾아가봤지만 닫혀 있었다.

팬데믹의 영향은 지역사회 깊숙한 곳에 조용히 새겨져 있었다. 루이셤 허브가 그런 곳이었다. 이곳 대표인 스미스 씨는 원래 패스트푸드를 배달하는 자전거 배달 기사였다. 코로나19 확산 초기, 학교와 요양원에 스무디를 나눠주는 자선사업에 동참했는데 예상 외로 규모가 커졌다. 봉쇄 조치로 일자리를 잃거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저소득 계층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음식을 데울 수도, 심지어 불을 켤 수도 없는 사람들을 수없이 마주한다. 팬데믹 이후 영국의 복지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망가졌다.” 지난 2년간 스미스 씨는 감염병이 취약계층의 삶을 어떻게 위기로 내몰았는지 목격했다.

루이셤 난민&이민자 네트워크에서는 지역사회 취약계층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거주·건강 문제를 상담해준다. ⓒ시사IN 신선영

지난 2년간 루이셤 허브가 한 주된 역할 중 하나는 ‘열려 있기’였다. 코로나19 봉쇄 조치는 바이러스 확산을 줄이는 데 기여했지만 사회복지 서비스 대부분이 중단되었다. 2021년 2월 루이셤 허브 또한 폐쇄 위기에 놓였다. 영국 정부는 2020년 3월부터 2021년 3월까지 세 차례 봉쇄 조치를 시행했다. 이 기간 NHS, 대중교통, 보육교사 등 필수 영역을 제외한 활동을 제한했다.

그 시기 가정폭력을 피해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온 한 여성이 루이셤 허브의 문을 두드렸다. 유아차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때로 런던에서 몇 시간이 걸리는 리버풀과 웨일스, 심지어 스코틀랜드에서도 생필품을 구하러 왔다. 그는 인터뷰 내내 ‘충격적(scandalous)’이라는 표현을 여러 번 썼다. “영국의 코로나19 규제는 생필품을 조달할 능력이 가장 적은 사람들을 부당하게 차별했다. 그들에게 보호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시민 4000여 명이 루이셤 허브의 폐쇄 결정에 항의하는 청원에 서명을 했고, 결국 시의회는 청원을 받아들였다.

루이셤 허브에서는 도움을 얻기 위해 가난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물건 개수에도 제한을 두지 않았다.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세요’ ‘폭력은 용납되지 않습니다’라고 쓰인 큼지막한 안내 문구가 전부였다. 기부받은 베개와 이불을 정리하는 저스티나 씨(48)의 손과 발이 바빴다. “등록된 사람들은 정부에서 지원을 받지만, 등록되지 않은 사람은 여기서 도움을 얻는다. 루이셤 허브가 우리의 정부 같다.” 그는 나이지리아 출신 난민 신청자다. 처음 이곳에 생필품을 구하러 왔다가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학교 대신 아이들에게 노트북을 나눠주고, 구청 대신 위기 가정에 약과 음식을 배달했다. “여기가 아니었으면 지난 2년 동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저스티나의 이야기이기도 했고, 지역사회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루이셤 기부 허브 대표인 로런스 스미스 씨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한때 배달 기사였던 대표 스미스 씨는 지난 2년간 주 100시간을 일했다. 다른 자원봉사자들도 마찬가지다. 루이셤 허브가 정부로부터 받는 보조금은 없다. 대부분 개인들의 기부가 허브를 떠받치고 있다. 스미스 씨는 사람들의 선의로 버텨온 위기 대응 방식이 이제 ‘압박’을 받는 단계라고 했다. “우리가 모든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응답은 ‘부자감세’ 정책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이후 공중보건에 재정을 투자하고 건강 불평등을 개선해야 한다고 정부에 요구했다. 영국 정부가 대량 해고를 막기 위해 ‘고용유지 계획’ 등을 도입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벌어진 격차를 복구하기 어렵다고 봤다. 고용주가 노동자를 해고하지 않으면 노동자 월급의 80%까지 부담하는 정책이다.

크리스티나 파겔 UCL 임상연구교수는 2021년 초부터 코로나19가 ‘빈곤의 질병’으로 자리 잡을 실제적 위험이 있다고 정부에 경고해왔다. 그는 ‘독립 과학자문단(Independent SAGE)’에서 활동한다. 시민들에게 코로나19 유행에 대한 정보를 알기 쉽게 전하기 위해 모인 과학자 그룹이다. “2020년부터 코로나19의 불평등한 영향을 추적하는 다양한 보고서가 나왔다. 정부도 이 현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당장 올겨울만 해도 위기다. NHS가 1년 넘게 포화상태로 고군분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겔 교수는 이런 상태로 ‘세 번째 겨울’을 맞게 될 것을 크게 우려했다. 인플레이션과 에너지 위기는 이전에 없던 난관이다.

10월1일 영국 런던 러셀스퀘어 인근에서 생활비 급증에 대한 해결책을 요구하는 시위대. ⓒ시사IN 신선영

정치권의 응답은 ‘부자감세’ 정책이었다. 9월23일 리즈 트러스 당시 영국 총리는 경제성장을 이유로 소득 상위 1%에 대한 최고세율(45%) 인하안을 발표했다. 팬데믹 대응 현장에서 호소하던 요구와는 분명 배치되는 응답이었다. 트러스 총리의 감세 정책 발표 이후 영국 파운드화의 가치는 떨어지고 전 세계 금융시장은 혼돈에 빠졌다. 

지지율이 급락하자 트러스 총리는 10월3일 최고세율 인하안을 백지화했다. 그러나 복지지출 삭감안은 논쟁거리로 남았다. 스미스 씨는 루이셤의 현실을 봤다면 나올 수 없는 구상이라고 비판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영국 정부는 부자를 더 부유하게 만들면 그것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많은 사람들이 극복하기 어려운 빈곤 상태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취재진이 방문한 9월28일에도 루이셤 허브 앞엔 여행 가방과 배낭을 끌고 온 사람들이 줄 지어 있었다. 엘살바도르 가족이 떠나자, 이번에는 이란 출신 대가족이 이곳을 찾았다.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피난처를 찾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는 쉽다. 하지만 문명화된 국가라면 이 비참함에 무심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영국은 과연 문명국가라 할 수 있는가.” 스미스 씨가 팬데믹을 겪으며 품게 된 질문이다. 형광색 조끼를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스미스 씨를 호출하느라 인터뷰가 자주 끊겼다. 이른 월동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다가올 겨울은 예년보다 추울 전망이다. 

[세계의 코로나 대응,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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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런던·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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