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취재진 카메라에 곧 도축당할 운명의 ‘서러브레드’ 품종의 경주용 말이 포착됐다. 숨진 경주마는 말고기, 동물 사료 등으로 쓰인다고 알려졌다. ⓒ시사IN 신선영

담장을 넘은 말 울음소리가 들판에 퍼졌다. 7월7일 오전 전국에서 말 도축이 가장 많이 이뤄지는 제주축산농협 축산물 공판장으로 말을 태운 트럭들이 들어갔다. 10여 분 후 빈 차로 나오는 트럭 뒤로 어김없이 말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국내에서 말 도축은 불법이 아니다. 하지만 식용을 목적으로 길러진 ‘비육마’ 외에도 경주마를 위해 개량된 ‘서러브레드(Thoroughbred)’ 품종이 도축장으로 오기도 한다. 〈시사IN〉은 7월7일 퇴역 경주마가 축산물 공판장에서 도축되기 직전 장면을 포착했다.

퇴역 경주마 식용 문제는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된 바 있다. 2019년에는 국제동물권리단체 페타(PETA)가 10개월 동안 도축장 내부를 잠복 취재한 동물학대 영상이 세상에 드러났다. 당시 영상에는 경주에서 뛴 지 72시간이 지나지 않은 서러브레드종 ‘케이프매직’이 포함되어 있었다. 케이프매직은 부상으로 ‘페닐부타존’ 100㎖를 투약한 상태였다. 페닐부타존은 신체에 유입되면 백혈구 억제 및 재생불량성 빈혈이 나타날 수 있다. 현재 제주축협에서 근무하는 A 검사관은 “3년 전까지 검사 횟수 실적만 채우던 방식이었지만, 현재는 전수조사를 하고 있다. 한라마나 제주마를 포함해 품종에 상관없이 마주가 신청만 하면 도축이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김란영 (사)생명환경권행동 제주비건 대표는 퇴역 경주마 문제가 단순히 식용 문제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사료로 경주마 활용이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은 이미 드러났다. 더 심각한 문제는 동물을 이용해 사행산업을 하는 마사회와 농림부가 책임 있게 관리하지 않는 점이다.”

퇴역 경주마에 대한 실태 파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국마사회 ‘말 산업 정보 포털’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퇴역한 말 전체 1776마리 가운데 퇴역 후 ‘용도 미정’은 1080마리(60%)다. 국내 동물단체와 말 전문가 등이 ‘정부 이력제 도입’ ‘퇴역 경주마 식용 금지’ 등을 촉구하는 이유다. 올해 초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 촬영 현장에서 고꾸라진 후 사망한 경주마 출신 ‘까미’ 사건 이후 국회에서도 동물보호법 일부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다.

퇴역 경주마 복지를 위한 제주 시민들의 움직임도 눈에 띈다. 전국 최초로 제주에 ‘말 생추어리(sanctuary)’를 만든 김남훈 대표는 승마장에서 학대를 당한 경주마 출신 아다지오를 보살피고 있다. 아다지오는 유정훈씨(45) 가족에게 입양되었다. “승마 목적이 아니라, 가족으로 입양한 거예요.” 7월7일 오후 말과 산책을 하던 유씨가 아다지오의 마른 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매달 둘째 주 토요일에는 퇴역 경주마 복지를 촉구하는 행진이 이어진다. 7월9일 행진에 참여한 김지영씨는 “승마장에서 내가 탄 말이 임신 중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돈벌이 수단으로 동물을 이용하는 데 오랫동안 문제의식이 있었다”라며 참가 이유를 설명했다. 이날 참가자들은 제주 렛츠런파크 앞에서 도축당한 경주마의 이름이 쓰인 조끼를 입고 행진했다. 그들 뒤로 한국 경마 100주년을 알리는 현수막이 펄럭였다.

7월9일 생명환경권행동 제주비건과 제주동물권행동 나우가 공동주최한 ‘도축장 가는 길’ 행진이 진행되었다.ⓒ시사IN 신선영
제주시 곶자왈 인근 부지 약 60만 평에 만들어진 ‘말 생추어리’에서는 김남훈 대표가 구조해온 말들이 무리 지어 다닌다.ⓒ시사IN 신선영
김남훈 대표(맨 왼쪽)와, 유정훈씨(가운데)의 가족이 승마장에서 구조해온 말 아다지오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시사IN 신선영
김남훈 대표가 제주시 한림읍 목초지에서 아다지오를 산책시키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유정훈 씨의 딸 정세라 양이 입양한 아다지오를 돌보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김남훈 대표가 운영하는 생추어리에는 도축되기 직전 구조되거나 승마장에서 방치되었던 말 32마리가 지내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7월9일 열린 ‘도축장 가는길’에 참가한 시민들이 제주축협 축산물공판장 앞에서 마무리 집회를 진행했다. ⓒ시사IN 신선영

 

 

기자명 제주·신선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ssy@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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