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간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맨 왼쪽부터 APOKI, 한유아, 로지, 이마, 릴 미켈라. ⓒ인스타그램 갈무리

지난해 국내에서는 ‘가상 인간(Virtual Human)’과 관련해 두 가지 의미 있는 일이 있었다. 7월, 신한라이프 TV광고에 싸이더스 스튜디오 엑스에서 만든 가상 인간 로지가 출연해 대중과 만났다. 자연스러운 춤 동작과 표정 때문에 신인 배우일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로지가 3D 컴퓨터그래픽(CG)으로 만들어진 가상 인간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신기함은 관심으로 이어졌다. 두 달 만에 유튜브 조회수가 1100만 회를 넘겼고, 로지의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도 7월 2만여 명에서 10월에는 10만명으로 증가했다.

제작사에 따르면 로지는 지난해 수익을 10억원가량 거뒀다. 전기자동차부터 간식, 뷰티 제품과 의류 등 다양한 브랜드와 전속계약을 맺었으며 100여 건의 협찬을 받기도 했다. 올해에는 이미지와 동영상에만 머물지 않고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로지는 AI 음성합성 기술로 자신의 목소리를 갖게 된 이후 지난 5월 SBS 라디오 〈컬투쇼〉에 출연했다. 스스로를 “사이버 가수 아담의 후배”라고 소개한 로지는 다른 게스트들과 함께 청취자 사연을 소개하며 30여 분간 방송을 했다.

국내에서 가상 인간은 주로 광고 시장에서 활약 중이다. 상황과 필요에 맞게 외모를 디자인할 수 있다는 점이 주요한 이유다. 제품의 판매 대상(타깃)을 설정한 뒤, 그들이 선호하는 이미지와 가치관을 가상 인물에 자유롭게 세팅할 수 있다. 얼마 전 스포츠 의류 브랜드 푸마는 동남아 시장을 겨냥해 20대 여성 가상 인물 ‘마야’를 제작했다. 마야는 동남아시아인 수백만 명의 얼굴과 음성, 심리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로지 역시 MZ 세대가 선호하는 유명인들의 특징을 조합해 만든 얼굴이다. 171㎝의 큰 키에 동양적인 이목구비, 뛰어난 패션 감각과 제로 라이프에 대한 관심까지. 제작사는 MZ 세대가 선호할 만한 요소들을 구체화해 로지의 외형과 가치관을 구성했다. 칠성사이다는 얼마 전 디제잉과 프로듀싱을 즐기고 얼굴에 타투를 한 남성 가상 인간 류이드를 TV 광고모델로 선택했다. 여성들이 즐겨 마시는 광동제약 옥수수수염차의 광고모델도 가상 뮤지션으로 활동 중인 한유아다. 롯데홈쇼핑이 개발한 가상 인간 루시 역시 광고를 비롯해 하반기에는 TV 드라마 출연까지 예정돼 있다.

가상 인간의 활약으로 증명된 것은 CG 기술 수준만이 아니다. 대중이 ‘비인간’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 않다는 점을 확인한 것 역시 의미 있다. 최근 가상 인간 시장은 빠른 속도로 성장 중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2021년 전 세계 2조4000억원이던 가상 인플루언서 시장 규모가 2025년에는 6배 이상 성장해 14조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인간 인플루언서 시장(13조원)을 넘어서는 규모다. 영향력도 커지고 있다. 지난 3월, 미국의 SNS 통계분석 업체 IMF(Influencer Marketing Factory)에서 18세 이상 미국인 1044명을 대상으로 가상 인간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다. 전체 응답자 중 58%가 가상 인플루언서의 SNS를 팔로하고 있었다. 특히 18~24세의 경우 75%가 이들을 팔로하고 있어서 평균보다 높은 관심도를 보였다.

전 세계에서 사람의 모습을 한 가상 인간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인물은 미국 스타트업 브러드(Brud)에서 2016년에 만든 릴 미켈라다. 미켈라는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19살 여성으로 유튜브와 틱톡,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의 음악과 관심사, 고민 등을 나눈다. 미켈라의 전체 소셜미디어 팔로어 수는 800만명이 넘으며 광고와 협찬, 콘텐츠 수입으로 지난해 130억원에 이르는 수입을 거둔 것으로 알려진다.

‘이세계 아이돌’ 오디션 현장. 구독자 수만 명이 참여했다. ⓒ이세계 아이돌 갈무리

가상 인간의 성장과 도전

하지만 릴 미켈라의 인기는 개성 있는 얼굴이나 ‘힙’한 라이프스타일 때문만은 아니다. 계정을 운영하고 2년이 지난 2018년, 미켈라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컴퓨터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는다. 많은 팬들은 미켈라를 위로하고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응원했다. 이후 실제 사람인 닉과 연애를 하고, 이별하는 과정 역시 SNS로 공유하며 팬들은 미켈라의 일상을 ‘가상’이 아니라 ‘현실’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미켈라의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 중 하나는 ‘고민 상담’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플루언서 뒤에는 이렇게 탄탄한 스토리가 존재한다.

많은 가상 인플루언서 전문가들은 가상 인간의 매력을 ‘실사에 가까운 외형’이 아니라 스토리와 캐릭터에 있다고 말한다. 실제 릴 미켈라는 여러 명으로 구성된 작가 군단을 따로 두고 있다. 이들은 미켈라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결정한다. 최초의 가상 흑인 슈퍼모델 슈두의 제작자는 백인 남성이다. 하지만 슈두의 목소리가 되어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은 흑인 작가 아마 바두이다. 그는 한국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82년생 김지영〉을 흥미롭게 읽었다는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가상 인간 정보 사이트 ‘버추얼휴먼스(Virtualhumans.org)’의 수석 작가 마케나 라스무센 씨는 “가상 인플루언서에게 부여되는 매력적인 스토리는 마치 마술처럼 사람들을 연결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꼽은 매력적인 스토리의 주요 키워드는 ‘성장’과 ‘도전’이다. 예를 들어 바비 인형을 3D로 구현한 버튜버(버추얼 유튜버) 바비는 2015년 자신의 첫 브이로그를 유튜브에 올리며 데뷔했다. 바비 채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는 사회 이슈와 관련되어 있다. 바비는 우울증부터 인종차별 문제까지 예민한 이슈에 대해 말하고, 사람들과 고민을 나눈다.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강화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바비라는 캐릭터가 팬들과 상호작용하며 더 나은 사회를 궁리하는 인물로 ‘성장’하고 팬들과 그 과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바비는 2020년 흑인 인권 시위를 촉발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 때에도 “우리는 모든 흑인 커뮤니티와 연대할 것이고,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의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버추얼휴먼스’ 사이트에 따르면 BLM 운동에 가상 인플루언서 30% 이상이 지지와 연대의 목소리를 냈다. 이들이 그저 ‘가상’ 세계에만 살지 않고 현실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일깨운 의미 있는 일화였다.

현실과의 경계가 흐려지는 경험

이에 비해 국내에서 가상 인간은 스토리보다 외모로 주목받는다. 팬덤을 일으킬 만큼 매력적인 스토리나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는 의미다. 인플루언서 마케팅 업체의 한 관계자는 국내 가상 인플루언서 시장이 호기심 효과 이후에도 커질 수 있을지 우려했다. “인플루언서는 수명이 짧다. 3~4년 이상 유지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지속적인 팬덤을 만드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이다. 가상 인플루언서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콘텐츠를 제작해야 팬들과 상호작용하며 세계관을 넓힐 수 있을까 연구해야 한다. 지금 광고에서 볼 수 있는 국내 가상 인플루언서들은 주로 젊고, 예쁜 ‘닮은꼴’ 여성 캐릭터를 상업화하는 데 그치고 있다.”

그런 와중에 가상 걸그룹 ‘이세계 아이돌(이세돌)’은 흥미로운 사례를 남겼다. 이들은 뛰어난 기술력이나 마케팅 없이 콘텐츠만으로 팬들과 소통하며 지난해 데뷔한 가상 아바타 걸그룹이다. 올해 3월, 두 번째 싱글 앨범을 냈다. 지난해 7월, 팔로어 수가 국내 3위 트위치(인터넷 방송 중계 플랫폼) 스트리머 ‘우왁굳’이 ‘사이버 아이돌 프로젝트’를 기획해 참가 신청자를 받기 시작했다. 참가자 200여 명이 가상 공간에서 네 차례 오디션을 거쳤고 8월, 최종 멤버 6명이 선발되었다. 오디션은 구독자 수만 명이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참여하는 가운데 이루어졌으며 참가자들은 실제 사람의 얼굴 표정이나 몸짓을 그대로 구현하는 VR(가상현실) 아바타를 통해 자신의 노래·춤 실력을 선보였다. 팬들은 그 모든 과정을 함께했다. 이세돌은 지난 12월27일 디지털 싱글앨범 〈리와인드(RE:WIND)〉를 발매하며 정식으로 데뷔했는데, 이 곡은 공개되자마자 벅스·가온 등 온라인 음원 차트 사이트에서 실시간 1위를 차지했다. 7월7일 현재 공식 유튜브 뮤직비디오 조회수는 785만 회. 멤버 개인 유튜브 구독자 수는 모두 합해 100만여 명에 이른다.

무엇보다 그룹을 비롯해 멤버 개인의 캐릭터와 데뷔 서사, 즉 ‘스토리’가 팬들과 함께 만들어지면서 이들의 세계관이 확장된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세돌의 팬인 정민수씨(가명)는 팬들과 멤버들이 방송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인격을 가지고 있으면 소통할 수 있고 교류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오디션을 보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실제 사람이든, 가상 아바타든 구분 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그는 덧붙였다.

가상 인간은 다가올 미래가 아니라 눈앞의 현실이다. 우리는 이들과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을까? IT 개발자 조경숙씨는 온라인에 접속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가상 인간의 삶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중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가상 인간뿐만 아니라 실제 사람들도 포토샵이나 카메라 필터 등으로 자신의 외형을 다듬고 고치며 살고 있다. 때로는 자신의 소비 수준이나 배경 등을 조작해 현실이 아닌 것을 진짜처럼 보여주는 인플루언서들도 있다. 어쩌면 우리도 정체성의 일부는 이미 가상화된 게 아닐까?” 가짜가 아닌, 가상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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