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4일 우크라이나 보로디얀카에서 러시아군 공격으로 집을 잃은 시민이 부서진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다.ⓒAP Photo

우크라이나 북부에 위치한 하르키우는 수도 키이우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한때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의 수도였던 곳이라 유서 깊은 대학과 성당, 박물관 등 문화유산이 풍부하다. 지난 2월 러시아 침공 전의 얘기다. 앞 세대가 물려준 유산은 폭격을 당했고 민간인 사망자 수는 가늠하기 어렵다. 전쟁 초, 러시아에 함락된 후 우크라이나가 일부 탈환하기도 했지만 최근 다시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 러시아에서 거리가 30㎞에 불과한 요충지라 전쟁 전부터 푸틴의 관심이 높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스베틀라나 씨(35)는 하르키우의 한 아파트에 산다. 심장내과 전문의로 일하다 딸 베라를 낳고 출산휴가를 보내던 중 전쟁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된 2월24일, 그는 갓 태어난 딸 베라와 여섯 살 아들 료샤, 남편, 부모와 함께였다.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되도록 뉴스를 읽지 않으려 했고,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나갔다가 이웃 여자에게 경고를 받았지만 총탄과 폭격음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 전쟁 열흘 만에 주민의 4분의 3이 떠난 아파트, 밤까지 이어지는 공습 속에서 그는 일기를 썼다.

그 글은 SNS 메신저를 통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는 러시아인 친구 사샤 씨에게 전해졌다. 사샤는 매일같이 보내온 그의 일기를 한 편의 글로 엮은 다음 러시아의 여성인권 운동가이자 기자인 나스차 크라실니코바 씨에게 전달했다. 나스차 기자는 전쟁 직후부터 자신의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전쟁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여성들의 사연과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전쟁이라는 십자가를 품위 있게 지고 싶었던 스베틀라나 씨는 돈도 물도 식료품도 곧 바닥나고 죽음을 피하기 어려울 거라는 절망 속에서 자주 무너진다.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폭격이 시작되면 언제든 아이를 안고 뛰어나갈 수 있는 ‘대기 상태’의 일상을 비롯해 ‘사람의 가면을 벗겨버리는 전쟁’ 중에도 많은 이들이 서로를 구원하기 위해 애쓴 흔적을 수집한다.

〈시사IN〉은 그가 남긴 2월24일부터 4월26일까지의 일기를 공개한다. 나스차 기자는 “평범한 가정이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전쟁을 겪는지 간단하고 정확하게 이야기한다. 나는 그의 일기가 이 시대의 중요하고 강렬한 기록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의 일기를 번역한 정소은씨는 “전쟁을 겪고 있는 이들은 나와 같은 작고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고통과 두려움을 인지하고, 부디 크고 작은 반전의 목소리를 내주길 부탁드린다”라고 전했다.

하르키우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전장이었다. 이번처럼 나치 독일에 함락을 당했다가 러시아가 되찾길 수차례,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안네의 일기’는 시작된다. 1942년 유대인인 안네 프랑크는 부모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키티라는 이름을 붙였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독일군이 도시를 점령하자 낡은 건물의 은신처에 숨어, 긴박하면서도 작고 사소한 하루하루를 기록한다. 책을 읽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는 ‘안네의 경험이 그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 그의 생애와 전 세계의 혼란에 우리가 연대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고 말했다. 스베틀라나의 일기 또한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전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개인의 기록이자 우크라이나인(스베틀라나)과 러시아인(사샤, 나스차)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고, 결국 ‘우리’의 이야기다. 스베틀라나와 그 가족의 안전을 위해 이후의 동선이나 인적 사항, 사진은 공개하지 않는다. 다만 전쟁 초 4개월 아기였던 베라는 이제 8개월이 되었고 6세 료샤는 7세가 되었다.

6월1일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의 파괴된 건물 근처를 한 부부가 유모차를 밀며 걷고 있다.ⓒEPA

2월24일

노인들이 불쌍해. 우리가 아는 한 할머니는 3월에 91세가 되는데 가족도 없이 혼자이셔. 그분은 인생 초반에도 폭격으로부터 숨었는데, 지금 또다시 이 일을 겪고 계셔. 정말 많은 이들이 안쓰러워.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내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거리를 두어야 해. 무언가를 잃거나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야 해.

오랜 시간 내게 문제가 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았어. ‘누군가 나를 좋아해주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곳에서 살지 못한다’ 등등. 지금은 나에게 있는 것들로 인해 기뻐. 없을 수도 있는 것들이니까. 부모님도, 남편도, 아이들도, 집도 말이야.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나는 되도록이면 뉴스를 읽지 않으려 하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삶을 즐기려고 노력해. 부디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돌봐주시기를. 그리고 나 자신이 짐승 같아지지 않기를 노력해.

2월25일

사샤, 아니? 나는 단 한 번도 강했던 적이 없어. 그런데 만약 내가 히스테리를 부린다면 아이들이 많이 놀랄 거고, 부모님과 남편이 정말 속상해할 거야. 지금 그건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아. 아주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닉에 빠지거나 낙심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어. 지금 그렇게 행동하거든. 내 한 지인은 집에서 13㎞ 떨어진 가게에서 일해. 도시의 반대편이야. 그런데 지하철이 운행되지 않아. 대중교통도 안 다녀. 그래서 그녀는 출근할 때는 택시를 타고 가고, 퇴근할 때는 공습이 이어지는 도시를 걸어왔어. 그러다 보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강해질 수밖에 없어.

2월26일

오늘 우리의 다른 친구들도 지하실에서 잤다고 해. 낮에는 빵, ATM기의 현금, 그리고 약을 찾으러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어. 지금 엄마는 한 시간 반 이상 약국에 줄을 서 있어. 어떤 약들은 서로 교환을 해. 예를 들어 내가 가진 안정제를 필요한 이에게 주고, 그에게서 나와 료샤를 위한 호르몬제를 받아.

나는 이 십자가를 품위 있게 지고 싶어. 그런데 아마 그럴 수 없을 거야. 난 워낙 감정적으로 불안정하거든.

오늘 유모차를 끌고 산책하는데, 이웃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어. 창문으로 나를 봤다고. “당신, 겁 없는 거 알겠는데, 그래도 집에 들어오지 그래요!” 내가 산책하는 동안 저 멀리 어딘가에서 계속 폭격 소리가 들렸거든. 그런데 나는 하루에 4시간씩 산책하는 게 익숙해. 그리고 폭격도 저 멀리에 있잖아. 그래서 계속 산책을 하는 거지. 나에게 걷는 것은 ‘휴식’의 방법이야. 물론 이웃 여자가 볼 때 나는 미친 여자겠지.

5월10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한 공립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실로 옮겨지고 있는 부상자. ⓒAP Photo

2월27일

오늘 나는 자폐를 가진 내 친구의 아들을 위해 좁쌀을 구하러 다녔어. 그 아이는 오로지 좁쌀죽만 먹거든. 우리 모두 서로서로를 돕고 있어. 오늘 난 이웃들에게 콧물 약을 줬고, 그들은 나에게 감자와 약간의 설탕을 나눠주었어. 바로 이게 진정한 화폐거든! 설탕도 감자도 모두 정말 귀해.

이러한 작은 일들. 같이 물을 길어오는 것, 아이를 위한 좁쌀 구하기, 서로 빵 레시피 공유하기, 물 정화하는 방법 터득하기 등 이러한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들을 하다 보면 신경을 분산해 미쳐버리지 않을 수 있어. 며칠 전 하차푸리(조지아 치즈빵)를 만들어보았어. 물론 너에게도 레시피를 알려줄 거야. 부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견딜 수 있게 해주시기를.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게 해주시기를.

2월28일

나는 레닌그라드의 봉쇄(또는 레닌그라드 포위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1년 9월8일부터 1944년 1월27일까지 872일 동안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독일과 핀란드 군으로 포위되었던 일을 말한다. 당시 사상자는 약 400만명 이상이다) 시작과 끝 날짜를 아주 잘 기억해. 그 비극은 나에게 매우 인상 깊었거든. 아주 간단하고 무시무시한 고문. 우리는 아직 5일밖에 지나지 않았고, 굶지 않아.

내 친구는 4일째 지하실에서 보내고 있고 이미 아프대. 그곳 지하실에서는 다들 기침한다고 하더라고. 아무튼 현재 시각은 아침 9시, 그리고 나는 이미 미쳐가고 있어.

지금 창 밖에는 총소리와 폭파 소리가 들려. 나는 집에 있어. 부모님이 물을 길러 샘(여기서 ‘샘’은 시민 자원봉사자들이 지하수를 끌어올려 만든 ‘우물’을 말한다)에 다녀오시는 동안 나는 백발이 될 뻔했어. 너무 무서워. 민간 지역이 폭격되고 있어. 포탄이 일반 주택에 떨어지고 있어. 여기의 현재 상황이 이래. 1분, 한 시간, 하루를 살았으면 이미 나쁘지 않은 거야. 사방이 웅웅거렸어. 어디로 도망갈지도 모르겠어. 어떡하지. 지금 나는 히스테리 상태라서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어.

6월14일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 사이 치열한 교전이 이어지는 우크라이나 세베로도네츠크 상공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AFP PHOTO

나는 종일 울고 있어. 나 자신과 나의 모든 것들이 한없이 가엾어서.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민간 주택 폭격과 사상자들에 대한 뉴스를 접한 이후부터 계속 이래. 나를 안심시키려 하지만, 이미 기분은 완전히 절망적이야.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전쟁)은 늘어지고 있어. 돈도, 물도, 식료품도 일주일 후 바닥날 거야. 혹시 우리 아파트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 대가족이 갈 곳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정말 괴로워. 우리에게는 다른 집이 없어. 우리가 버려졌다고, 이제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이 글은 너한테 쓴다기보다 나 자신에게 쓰는 거야.

처음으로 정신줄을 놓았어. 오늘은 잠을 자지 않고 복도에서 안락의자에 앉아 밤을 지새우기로 했어. ‘제때 떠나지 않은 우리는 정신 나간 얼간이들이다’라고 욕을 해대며 소리를 질렀어. 료샤는 듣지 못했고, 베라는 알아듣지 못해 정말 다행이야.

이 상황들이 오래도록 지속되리란 걸 깨달았어.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로 나 자신을 채우고 있어. 긍정적인 거라곤 아주 작은 것도 느껴지지 않아. 사샤, 있잖아, 나 방금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 남편이 욕하지 말라고 했어. 엄마는 진정하라고, 정신 차리라고 하셨어. 그만. 나는 정상으로 돌아와야 해. 모두가 두렵고 모두가 지쳐 있잖아. 나 혼자만 감정을 쏟아부으면 안 돼. 창의적인 행위를 해야 해. 내 상태가 안 좋거나 무서울 때 나는 걸레 청소를 하고, 요리하고, 료샤에게 책을 읽어줘. 그럼 좀 괜찮아져.

그런데 좀 전에 (민간인 희생에 대한 뉴스를 접하고 난 이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다른 각도로 보게 되었어. 그리고 정신줄을 놓고 히스테리가 시작되었어.

나는 지인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어. 그녀와 택시를 타고 산부인과에 같이 갔어. 베라가 태어나기 한 시간 전에. 맞아, 출산의 하이라이트, 즉 통증이 멈추지 않는 시간이지. 그때 택시에서 나는 계속해서 신음 소리를 냈고 가끔 비명을 지르기도 했어. 나중에 엄마는 ‘그 지인 의사 앞에서 너 때문에 부끄러웠다’고 하셨어. 아무래도 좀 참았어야 한다고. 나는 늘 그렇게 교육받았어. 감정은 드러내지 않는 거라고. 그때 그렇게 배운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덕분에 소리 지르거나 패닉 상태이다가도 금세 멈출 수 있거든. 엄마의 ‘정신 차리라’는 말(은 늘 즉시 효과적이었어)이 아니었더라면 료샤는 많이 놀랐을 거야. 정말 심각했거든. 아직까지는 료샤의 기분이 좋아. 우리는 그의 안정을 지키고 있어. 전쟁을 겪은 아이들이 평생 말을 더듬거나 신경성 틱장애를 앓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어. 내 생각에 엄마의 교육이 지금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 나는 진심으로 엄마에게 감사하게 생각해.

가끔 나는 료샤 앞에서 울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해주곤 해. 그런데 지금의 패닉 상태, 즉 ‘우린 모두 죽을 거야’라는 건 다르잖아. 이건 설명이 안 돼. 사샤, 이 모든 걸 너에게 털어놓을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마워.

3월1일

오늘도 폭격 소리가 들려와. 우리 위에 전투기 몇 대가 지나갔어. 어딘가 폭발 소리가 들려. 우리는 복도로 달려가 그곳에서 숨어 있어.

폭발 이후 하루 종일 광장은 조용해. 나는 기다제팜(신경안정제)을 복용하고 좀 잤어. 부모님은 밖에 두 번 나갔다 오셨어. 그 후 나는 감자와 버섯을 요리하고, 이웃들과 통화를 했어. 아이가 아프다고 해서 약을 전해줬어. 친구들과 남은 식량을 계산해보았어. 그리고 난민 자격으로 피란 가는 것에 대해 같이 얘기해보았어.

지금은 통금 시간이야. 전투기가 날아다니고, 폭발 소리가 들려. 만약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그건 정말 행운일 거야. 남편 말로 나는 기운을 완전히 잃었대. 정말 그런 듯해. 한 친구에게 지금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씩씩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어. 그녀가 말하길, 자신이 이미 겪었던 일들보다 더한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해. 그녀의 딸은 자폐를 가지고 있거든. 내 남편도 30년 전 (선천성 심장질환을) 진단받은 이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

엄마 아빠도 정말 씩씩하셔. 그리고 (씩씩한) 그들 사이에 원시적 두려움에 가득 찬 내가 껴 있어. 더 이상 뉴스를 보지 않지만, 가끔씩 총격당한 이들이나 불에 타는 건물 사진이 눈에 띄면 나는 다시 패닉 상태가 되고 기분이 다운돼. 가족들의 투혼에 대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

한 시민이 포격으로 파손된 아파트 블록 옆에서 물을 채우고 있다.ⓒTASS

3월2일

오늘도 한숨도 못 잤어. 이제는 밤 10시 이후부터 전투기가 날아다니고 폭탄이 떨어져. 날아오는 전투기 소리가 들리면 나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베라를 안고 복도로 뛰어나가. 료샤는 깨우지 않지만 언제든 안고 복도로 뛰어나갈 수 있도록 아이 앞에 서 있어. 그 후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폭발 소리가 들려. 우리 집이 아니야, 오늘은 우리 집이 아니야. 무언가 말하다가 내가 방금 말을 더듬고 있다는 걸 인지했어.

우리는 다시 잠자리에 들지만, 나는 더 이상 잠이 들 수 없어. 고요 속의 울림에 귀를 기울여. 딸아이는 잠을 자다가 이따금 뾰족한 소리를 내. 아침 6시까지 버티다 보면 통금 시간이 끝나고 길거리에 차 다니는 소리가 들려. 예전에는 자동차 바퀴 소리가 마치 파도 소리 같아서 정말 좋아했는데 이제는 전투기 소리 같아서 무서워.

어떻게든 품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려고. 뭐라도 하려고 해. 그런데 실은 나는 공습이 두려울 뿐이야. 그게 전부야. 대략 20분 후 공습이 다시 시작될 거야. 그리고 밤 10시까지 지속될 거야. 혹은 더 오랫동안. 그럼 또 밤을 새우겠지. 매번 똑같아. 머리를 비워야 한다는 걸 알아. 절망하면 안 된다는 걸.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방금 전 전투기가 지나간 뒤 겨우 료샤를 안정시켰어. 옆집 창문이 전부 터져버렸어. 엄마는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리셨어.

3월3일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저녁에 의논을 했어. 모든 장단점과 리스크를 고려해본 후 우리는 아직까지는 집에 남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어.

아침에 남편과 함께 물을 뜨러 샘에 다녀왔어. 알고 보니 어제 저녁 우리 집(아파트 단지)에서도 창문이 터졌더라고. 유리는 아스팔트 위에 깔려 있어. 아침 7시에 엄마는 식료품점에 줄을 섰고,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어. 줄이 정말 길어. 새벽에 그래드(그래드 다연장로켓포 미사일) 폭격 소리가 들렸어. 따발총 소리. 그런데 나는 익모초(안정제)를 먹고 자서 베라 때문에만 잠에서 깼어. 총격 소리는 잠결에 들었어.

이웃들, 그리고 친구들과 통화했어. 한 명은 우유를 사준다 하고, 다른 한 명은 베라를 위해 호박을 얼려 준댔어(나는 그녀에게 사과를 나눠줄 생각이야). 이런 어두컴컴한 불행 속에서 혼자가 아니란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몰라. 하나님께서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 도움을 주시는 게 느껴져. 피부로 그 선한 도우심을 느낄 때 더 이상 죽는 것도 그리 무섭지 않아(사실 거짓말이야, 정말 무서워).

지난 하루 동안은 전투기 딱 한 대만 우리 위를 지나갔어. 나는 그걸로 정말 기뻐. 나는 평범한 러시아인들이 불쌍해. 그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잖아. 사실 난 모두가 가여워. 바로 지금 그래드 폭격이 일어나고 있어. 그리고 지금 바로 옆에 나의 아가 베라가 잠들어 있어. 나는 내 딸 베라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여워.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청소하러 갈 거야.

사방이 요란하게 울려. 나는 복도에, 베라가 앉아 있는 유모차 옆에 서 있어. 그저 다시 평화가 찾아오면 나는 정말 행복할 것 같아. 그저 평화로운 생활로 충분할 거야. 바닷가 휴가도 원치 않고, 예쁜 옷이나 맛있는 음식도 필요 없어. 그저 평화로운 생활을 바랄 뿐이야.

ⓒ그림 이지영

3월4일

오늘은 구호식품 지원이 두 차례나 왔어. 첫 번째는 식용유, 두 번째는 달걀. 아빠와 차례로 다녀왔어. 얼른 다녀와서 베라를 재웠는데, 나는 통 잠이 오질 않아. 혹시나 또 지원이 들어왔다고 연락 올까 봐. 뒤쪽에서 총격 소리가 들려. 우리 집 근처에는 한 남자의 시신이 있어. 아마 심장마비로 죽었나 봐.

3월6일

밤새 시끄러웠어. 총격 소리, 폭격 소리. 우리 가까운 이웃들이 떠났어. 료샤의 친구도 떠났어. 아침 6시에 열쇠와 음식을 가지러 그 친구네 내려갔다 왔어. 료샤는 아냐(친구)와 작별 인사를 했어. 크레멘추크로 떠난다고 해. 아냐네 할머니는 짐가방 더미에 앉아서 조용히 울고 계셔. 어른들은 정신없이 분주해. 택시 기사는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빠르게 짐을 실었어. 그들은 순식간에 떠나버렸어. 아파트 우리 동에는 사람들이 4분의 1만 남아 있어. 오늘 같은 밤을 겪고 나면 어떤 돈을 써서라도 떠나려고들 하지.

3월7일

밤 11시에 폭격 소리에 잠에서 깼어. 건너편 집 뒤에서는 무언가 끝없이 번쩍거리고 폭발 소리가 들렸어. 베라를 복도 유모차로 데려갔어. 남편과 부모님은 순식간에 나갈 채비를 해 아파트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어. 폭발은 11시부터 12시까지 이어졌는데, 영원처럼 느껴져. 겨우 잠이 들었어. 엄마는 밤새 잠을 설치고, 아침 6시에 구호품을 타러 나가셨어. 이웃 아저씨가 전화해서 집 주변에 피해가 없는지 물어봤어(그 집 창문에서는 안 보인대). 나는 없는 것 같다고 대답했어.

방금 구호품을 타려는 줄에 엄마를 교대해줬어.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더 기다려야 해. 우리 줄은 90%가 노인이야. 아마 두려울 게 없는 분들이겠지. 우리는 지금 떠날지 말지를 결정하고 있어. 미안해, 더 이상 쓸 수가 없어. 정말 바빠. 우리 동네가 폭격당했어. 떠나는 버스들을 폭격한대. 너무 무서워.

3월8일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트립탄 항우울제를 복용했어. 지금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아. 졸려. 오늘은 전쟁 13일째야. 그런데 사실 모두 꿈이었을 거야. 엄마와 이모는 오래된 사진을 보고 계셔. 나는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다 괜찮아. 전쟁은 악몽일 뿐이야.

3월9일

내 아이들을 안전하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워. 특히 베라. 아마도 이 어린 아가들은 모두 안전한 곳으로 보내졌을 거야. 하르키우에 대해서는 정말 무서운 소문이 돌고 있어. 모든 아이들을 피란 보낸대. 어른들도 마찬가지야. 어제 피란을 시도하려다가 떠나기 한 시간 전에 마음을 접었어. 우리 경우에는 집이 더 안전해(아무리 미친 소리로 들릴지라도).

난 잠드는 게 두려워. 새벽 6시 이후로 폭격이 가장 뜸해. 6시에서 8시 사이. 저녁과 밤에는 폭격 간격이 일정하지 않아. 익모초를 마시고 기다리는 중이야. 부디 오늘은 폭격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5월23일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의 한 식량 기부처에서 시민들이 밀가루를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AP Photo

3월13일

어제 구호품을 타러 갔어. 구호품 줄에는 여전히 70대 이상 분들이 대부분이야. 그들은 몇 시간씩 영하의 추위를 견디며 기다려. 어떤 분들은 판지를 깔고 계단에 앉아 계시고. 나는 기저귀와 이유식을 타러 갔어.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어.

나는 내가 좀 더 도움이 되고 활동적이었으면 좋겠어. 어떨 때는 그게 되는데, 내 상태는 종종 꿈속인 듯, 잠이 덜 깬 듯해. 지각, 감각, 기억은 각자 따로 노는 듯해. 정말 무서울 때면 나는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몸을 쓰는 일을 해. 아이가 둘일 때 몸을 쓰는 일은 어렵지 않아.

오늘은 전쟁 18일 차야. 그런데 오늘 하루는 이제 막 시작되었어. 부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셔서 오늘 하루, 그리고 앞으로의 전쟁 속 하루하루를 안전하게 버틸 수 있기를. 생존할 수 있기를.

3월16일

베라는 잠을 잘 못 자. 가끔은 너무 크게 울어서 폭격 소리가 안 들릴 정도야. 그럴 때면 떨리는 유리창을 보고야 바깥에 폭격이 일어난다는 걸 알 수 있어. 그런데 사실 나는 베라가 이렇게 투정 부리는 게 오히려 기뻐. 아기 때문에 계속 잠을 못 자다 보면 오로지 잘 생각뿐, 다른 건 모두 상관없어지거든.

아침에는 폭격이 정말 심했어. 집 앞 5분 거리 마트에 다녀오는 게 정말 무서웠어. 지금 우리 모두는 ‘작은 한 걸음’의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어. 당장 내일 계획은 있을지라도, 모레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어. 나는 지금 같은 상황 속에서 내가 품위 있게 행동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오롯이 두렵고, 산만하고, 계산적일 뿐. 그리고 정말 잠이 모자라. 나는 계속해서 이곳을 도망치려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 지금 현재의 상황을 견디고 인정하는 게 정말 힘들어. 여전히 농담을 하며 씩씩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있어. 그렇지만 나는 아니야.

3월19일

그때 나는 나자의 행동 때문에 뚜껑이 열렸어(나자는 폭격당하지 않는 지역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폭격을 당했고, 나는 정신적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어. 나자는 나에게 말했어.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살이 빠졌다고. 나는 대답했지. 우리는 폭격당하고 있어. 나자는 ‘그래, 우리 모두 정말 힘들어’라고 말했어(대략 그런 내용). 그런데 나는 그 말에 상처받았어. 요새 다른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아. 대화하는 게 너무 힘들어. 나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느껴져. 대화를 하든, 말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해. 지금 하는 대화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해.

가끔 떠난 사람들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느껴. 마치 쥐새끼들처럼 도망간 놈들. 나는 마치 미친 여자처럼 울먹이며 이곳에 남은 지인들에게 징징거려. 나에게는 두 아이가 있고, 나는 내 아이들을 지킬 수가 없다고. 그리고 패닉 상태에서 이곳을 떠난 사람들을 비웃어. 그런데 실은 나는 그들이 부러워. 그들은 더 이상 폭격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지 않아. 폭격 소리를 들으며 잠들지도 않아. 집이나 대피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산책할 수 있어. 그리고 난 여기에 남아 있어. 내 아이들, 구호품,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당근 커틀릿을 만드는 엄마의 이모와 함께. 만약 그래도 되었더라면 나는 두려움에 밤새 소리를 질러댔을 거야. 그런데 나는 마치 마비된 듯 내 아파트 바닥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

이 모든 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야. 사샤, 너에게 이 모든 걸 이야기해서 정말 미안해. 오로지 너만 믿고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야. 난 내가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 그리고 지금 일어나는 일들도 마땅히 감내해야만 한다는 것도 알아. 그런데 내 마음은 지금의 전쟁 상황을 받아들일 그릇이 되질 못해. 영적인 자질(겸손, 자비)이 부족해서 말이야.

우크라이나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어쩌면 아이들일지도 모른다. 5월8일 러시아군 점령 지역에서 탈출한 한 어린이. ⓒAP Photo

3월20일

‘전쟁은 사람의 가면을 벗겨버린다’라는 생각을 오늘 했어. 사람의 본성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드러나. (스트레스성) 신경쇠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전체적인 인성의 ‘노출’에 대한 이야기야. 배신과 비열함을 드러내거나 반대로 고결함을 나타내기도 하지. 내 지인들 어느 누구도 나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어. 모두의 본성을 예측할 수 있었어. 실망의 씁쓸함을 느끼지 않았어. 많은 이들이 배려하고, 동정심 많고, 선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정말 기뻤어. 전쟁은 25일째 지속되고 있어. 어쩌면 시작에 불과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이 통로 끝에 빛을 보고 싶어.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내고 싶어.

잠을 푹 자거나 바깥이 조용할 때는 정말 행복해! 단순히 살고 싶다는 생각 외에 교회 예배에 대한 생각이 들어. 정말 그리워. 나사로의 토요일(2022년 정교회 휴일인 ‘나사로 토요일’은 4월16일이다)에라도 꼭 교회에 가고 싶어. 보통 그날 우리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헤루빔스카야(성가)는 정말 아름답거든.

3월21일

이웃 여자에게 전화가 왔어. 지금 우체국에 가면 현금을 뽑을 수 있다고. 줄이 어마어마해. 옆줄에서는 빵을 나눠줘. 한 아주머니가 아가씨에게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어. “컵 건드리지 마! 더럽잖아!”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는 듯 악을 쓰며 소리 질러. 그런데 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뒤로 폭격과 폭발 소리가 들려. 지팡이를 든 장애인 할아버지가 인파를 뚫고 앞으로 걸어갔어.

건장한 남자가 소리 질러. ‘노인네가 어딜 가는 거야? 줄 서야지!’ 할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현금을 받으려고 하지. 건장한 남자는 할아버지에게 서류를 빼앗고 아무것도 주지 말라고 소리쳤어. 할아버지는 변명했지. ‘나는 장애인이에요, 나는 90세예요, 좀 지나가게 해주세요.’ 젊은 남자는 신경질을 부리며 비켜주지 않았어. 관리자(염색한 검정 머리 여성)는 할아버지 편을 들어주며 줄 서 있는 사람들의 야박한 마음을 책망했어. 할아버지는 드디어 2000그리브나(약 65달러)를 받았고, 곧이어 젊은 남자가 받았어.

나는 한 시간 줄을 섰는데 남편의 여권만 챙기고 내 여권을 안 가져갔기 때문에 돈을 받지 못했어. 뒤쪽으로 미친 듯이 폭격소리가 들려와. 줄 서 있는 예쁘장한 여자는 공포에 질려 벌벌 떨었어. (신선한 공기가 없어서) 답답하고, 광기가 가득한 데다 시간 낭비를 한 것이 원망스러워 나는 급히 우체국을 뛰쳐나왔어. 엄마에게 ‘저들 같은’ 나쁜 XX들만 남았는데, 나는 왜 아직도 떠나지 못했는지에 대해 불평했어. 울먹이며 입을 비틀다 순간 지금 내가 히스테리 상태라는 걸 인지했어. 창피하지만 어쩔 수 없어. 지금 이 상황도, 그리고 이 상황에 대처하는 나 자신도. 빨리 이 하루가 끝나고, (수많은 다음 날들) 내가 전쟁을 견뎌야 하는 다음 날이 시작되기를 바랐어.

6월21일 우크라이나 보로디얀카의 파손된 아파트들 사이의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그네를 타고 있다.ⓒEPA

3월25일

전쟁이 시작된 이후 매일이 선물과 같아. 그걸 알면서도, 주어진 선물을 잘 쓰는 것 또한 재능인 것 같아. 나에게 없는 재능. 나는 짜증 내고, 낙심하고, 별것 아닌 거에 덤벙거려. 그렇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정말 감사해. 오늘 푹 잔 것. 비교적 평온한 것. 화창한 하늘. 그리고 냉장고 안에 치즈가 있다는 것.

오늘 아침에 친구네가 떠났어. 남편과 나는 샘에 다녀왔다가 작별 인사를 하러 들렀어. 몇 마디 나누고, 농담을 하고, 포옹했어. 친구는 맥도널드 여우 장난감을 선물해줬어. 20년 전 그녀의 부모님이 이혼했을 때 친구의 불행에 내가 힘이 되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아파해줬대. 그때 우리 동네에 처음으로 맥도널드가 생겼는데, 내가 막 사온 곰 인형을 선물했대. 나는 잊고 있었는데 친구가 알려줬어. 이제 친구가 준 여우 장난감은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있어. 딸아이에게 물고 놀라고 주었어. 새로운 장난감을 갖고 놀다 보면 좀 덜 아픈 것 같아. 그리고 사실 새 장난감을 구할 곳도 없어(식료품점만 일하거든). 이건 ‘친절의 순간’이야.

나 자신이 조금 덜 이기적이었으면 좋겠어. 20년 전처럼, 한 사람을 따뜻한 말과 곰 인형으로 위로해주었던 때처럼, 남을 더 위할 수 있기를 바라.

3월27일

결국 나도 아프기 시작했어. 엄마를 위해 약을 사러 갔다가 약사와 나눈 대화야.

나:코 호르몬제 있나요?
약사:있어요. 살 거예요?
나:아직이요. 나중을 대비해서 묻는 거예요.
약사:(절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나중이라니요?!
나:음, 사실 저는 나름 긍정적으로 생각하거든요.

사람들은 모두 신경이 곤두서 있고, 침울해.

3월30일

밤중에 다시 폭격과 로켓 발사 소리가 들렸어. 밤 12시쯤 잠결에 큰 폭발 소리가 서너 번 들렸어. 우리 집에 (포탄이) 떨어진 줄 알고 베라를 껴안고 복도로 뛰어나갔어. 다리가 돌덩이처럼 무거워서 말을 듣지 않았어. 잠시 서성거리다 다시 자리에 누웠어. 약을 먹은 덕분에 바로 잠들었어. 아침에 남편이랑 물을 길러 우물에 다녀왔어. 저 멀리서 번쩍번쩍거려. 더 이상 극심한 두려움은 없어. 인간은 그 어느 무엇에도 적응한다는 게 맞는 말인 것 같아.

사셴카(사샤의 애칭), 너의 따뜻함을 나눠주어서 정말 고마워. 오늘 난 나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나. 그 생각을 안 하려고 하는데, 마지막으로 교회에 갔던 날이 자꾸 생각나. 2월19일이었어. 그날 나와 아이들은 성찬을 받았어. 바실리 아버지(정교회 사제를 뜻함)는 소년 알렉세이(아들 료샤의 본명. 료샤는 애칭)를 축복하셨어. 종지기 콜랴 아저씨와 료샤(는 서로 이미 친구 사이야)가 서로의 지난 생일을 축하하며 선물을 교환했어. 집에 돌아가는 길 우리는 르비우 프랴닉(계피 당밀과자)을 샀어. 집 근처에서 이웃 아저씨를 만났는데, 아저씨는 시장에서 사온 버터 500g을 들고 있었어. 2주 후 이웃들이 떠나면서 남은 음식을 우리에게 주고 갔는데 그중 곡물, 감자, 그리고 그때 바로 그 버터 한 덩어리를 남기고 갔어. 우리 성당에 이제 바실리 아버지도, 콜랴 종지기도 없어. 이웃 아저씨도 없어. 나는 감성적이지 않아서 잃어버린 지난날에 대해 오열하지 않아 다행이야. 그런데 사실 우리 삶은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내 교회가 안쓰러워. 내 찬란했던 과거가 너무 아파.

지금은 다른 것을 걱정해야 할 때란 건 잘 알고 있어(나와 내 가족들의 안전). 그렇지만 가끔 지난날에 대한 환상통이 가끔 되살아나곤 해.

바로 지금 창 밖 폭격 소리가 들려. 많은 이들이 이미 적응한 것 같아. 내가 말한 대로 두려움에 대해 무뎌졌어. 전쟁은 끝날 것이고 어쩌면 우리는 살아남을지도 몰라. 폭격으로 인해 벌벌 떨지 않을 때, 정말로 걱정되는 게 있다면 내 내부에서 일어나는 전쟁이야. 짜증, 인내심 부족, 앙심을 품는 기질은 나를 갉아먹고 있어. 예전에는 모두 남 탓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탓이더라고. 그리고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공포스러워. 나 자신으로부터는 도망칠 수 없어. 사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아.

4월3일

이른 아침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 그녀의 가족은 오랜 시간 인내했지만, 인내심은 바닥나고 그들은 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했어. 내가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친구는 전날 자기 동네가 폭격당한 상황들을 자세히 설명했어. 계단참의 깨진 유리에 대해, 타박상과 사망자에 대해. 나는 드보락(코티지치즈와 비슷한 구소련 지역의 유제품)을 먹으며, 내가 지금 듣고 있는 불쾌한 이야기들로 인해 언제 토할지 궁금했어. 결국 토하지는 않았어. 친구는 울음을 터뜨렸어. 친구는 집을 떠나고 싶지 않았고, 딸을 익숙한 상황에서 데려가고 싶어 하지 않았어.

아냐(친구)는 정말 열심히 가정의 평화를 지켜왔거든. 한 층의 여러 아파트 사이에 있는 복도에서 잠을 자면서도 아이를 위한 아늑하고 근심 걱정 없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냈거든. 어디서 그럴 힘이 났는지 알 수 없어. 그리고 지금 그들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시골마을로 떠난다고 해. 아냐는 울고, 나는 사과를 마저 씹어 먹고 있어. 아냐는 하르키우에 남아 있던 마지막 친한 친구야. 그리고 내일 자동차는 그녀를 태우고 멀리 떠나버릴 거야. 나는 아냐를 위로하면서, 무언가 무거운 것이 내 목을 메우는 걸 느껴. 그리고 통화가 끝날 때쯤 그 ‘무언가’는 쇄골 사이에 내려앉았어.

이웃 단지 폭격 이후 나는 더 이상 베라와 산책하지 않아. 오로지 발코니에만 나가. 그것도 잠시 필요할 때에만. 조금 후에 (너에게) 이 메시지를 보낼게. 저녁때쯤. 혹시나 오늘 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좋은 일이었으면 좋겠다.

결국 이야깃거리가 더 생겼어. 한 달 전 우크라이나 중부로 떠난 친구가 (공포로 인한) ‘아드레날린 과다’ 상태에서 아이를 데리고 폴란드나 체코로 떠나기로 했대. 남편은 여기에 남고. 우리가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까? 떠난 이들, 그리고 남은 이들 말이야.

한 어린이가 대피소에서 노트북을 켜고 있다.ⓒTASS

4월4일

료샤네 학교에서 줌으로 화상 수업을 시작했어. 수업 시작할 때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줘. 누구는 우크라이나 중부, 누구는 카르파트 산맥을 넘어, 누구는 서유럽으로 떠났어. 료샤가 하르키우에 남아 있다고 하자, 반 친구 한 명의 눈이 휘둥그레졌어. 아이야, 나는 매일 너처럼 눈이 휘둥그레진단다.

왜 (딸에게) 베라(믿음이라는 의미)라는 이름을 지었는지 알아? 성경에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표현이 몇 번 나오거든. 이 표현은 나를 매료시켰어. 내가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그 문장에 들어 있거든. 그렇기 때문에 ‘베라’라는 이름은 내 세계관의 서사이자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어.

4월7일

결국 우리도 떠났어. 남편 말대로 하르키우에 남는 게 아이들에게 위험해서. 남편의 친구가 우리를 데리러 올 때까지 나에게는 3시간이 주어졌어. 친구가 빌려 살던 집 창문이 폭파로 인해 깨졌어. 하르키우에 다른 살 곳이 없는 친구는 완전히 떠나는 거야. 우리와 함께.

부모님은 피란길에 오르는 걸 거부하셨어.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었어. 오랜 시간을 걸쳐 어수선하게 계단을 내려갔어. 무언가 잊어버려 다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고. 차 앞에 섰는데 내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버렸어. 엄마와 나는 울음을 터뜨렸지. 부디 우리가 떠나는 그 몇 시간 동안이라도 폭파와 폭격 소리가 잠잠해졌으면 했어. 그래야 남편이 우리가 남는 걸 허락할 테니. 그래야 다시 이곳에서 아이들과 산책할 수 있을 테니. 그래야 드디어 창문에서 테이프를 떼어내고 유리창을 닦을 수 있을 테니. 유리창이 터질 것을 감안해 안전망으로 세워두었던 장문을 밀어낼 수 있을 테니. 더 이상 우리 집이 폭격의 타깃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을 테니.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전쟁은 계속되었고, 우리는 떠났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말들은 일상이야. 박격포의 짧은 파열, 그리고 집 뒤 그래드 폭격 소리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는지도 몰라. 이건 끝내야 하지만 끝낼 수 없는 학교 독후감과 같아. 그리고 우린 그냥 떠나버렸어.

4월18일

오늘 친척들이 나폴레옹 케이크를 사왔어. 내가 좋아하는 바로 그 맛의 케이크. 지난 몇 년간 내가 늘 구웠던 것과 같은 케이크. 지방이 많고 빵가루가 풍성한 비스킷이 겹겹이 쌓인 케이크 말이야. 나는 전쟁이 끝난 후에나 케이크를 먹기로 했어. 지금은 단 한 조각도 삼킬 수가 없거든. 남편에게 먹을 거냐고 물어보니 먹겠대.

하루 종일 공원에서는 멧비둘기들이 저음으로 소리를 냈어. 비가 많이 내렸고, 나는 혼자서 잠든 베라를 태운 유모차를 끌었어. 노르딕 워킹 스틱을 든 활기찬 여성들이 지나갔어. 그녀들의 대화를 엿들었어. 어린 손자들과 대화하는 요령에 대한 이야기더라고. 어떤 남자는 사업 관련 통화를 했어. 저 멀리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어. 아주 가끔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만 아니라면 전쟁 중이란 걸 모를 지경이야.

엄마가 전화해서 도시의 파괴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어. 내가 가장 좋아하던 서점 건너편 집. 유치원에 발사체가 떨어진 것. 지인들의 발코니가 파편으로 인해 깨져버린 것. 사샤, 사실 나는 지금 이 전쟁에 아무런 관련이 없으면서도, 내가 하르키우에 있을 때보다 이 전쟁에 더욱더 가까운 것 같아. 그때 나는 전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지만, 지금은 케이크 한 조각도 전쟁을 상기시키거든.

ⓒ그림 이지영

4월23일

우리 병원의 수간호사님이 돌아가셨대. 그분은 지인들을 모시고 몇 번이나 나에게 진료받으러 오셨거든. 지금 나는 목 잘린 닭처럼 집 안에서 서성이며 ‘어떻게 이럴 수 있지?’를 반복하고 있어. 그 와중에 급히 해결해야 하는 일들을 의논하면서. 요리, 빨래, 청소. 삶은 계속되고 있는데… 내 생각은 속에서 나를 태워버리는 듯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4월26일

3주 만에 처음으로 방에 혼자 남았어. 난민의 삶에서 북적거림은 필수 조건이야. 남의 집과 유치원에서 보내는 밤들, 공동 주방, 어른들의 대화와 아이들의 시끄러운 놀이. 우리가 임시로 거주하는 유치원 복도에는 구호품 박스가 배치되어 있어. 맨 위에 올려져 있던 하늘색 스웨터는 베라에게 아주 잘 맞았어. 오래도록 그렇게 기억에 남을 거야.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어. 엄마의 친구가 떠난 이야기를 해주셨어. 어떤 회사의 총무이고 품위 있는 여성분이래. 자기 옆집에 폭탄이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절대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소파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창 밖에 커다란 불덩이가 나타나더래. 뒤이은 폭발파는 그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어. 벽을 붙잡고 겨우 안쪽으로 피했고, 폭발 이후 발코니는 완전히 뒤틀려버렸대. (그때가 3월 초였는데) 바로 다음 날 가족들은 떠나버렸대.

우리 엄마는 여전히 씩씩해. 맞아, 그게 맞는 거야. 엄마는 다 괜찮다고, 지금 계신 동네는 조용하다고 하셔.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어. 내가 걱정할까 봐 하는 말이란 걸, 그들은 폭격하던 대로 계속해서 폭격하고 있다는 걸.

전쟁이 터지기 며칠 전 엄마는 키이우로 가는 표를 샀어. 대수도원에 기도하러 갈 계획이었어. 엄마가 그때 선물로 뭘 사올까 물어보셨어. 아기 베라를 위한 십자가 목걸이를 사달라고 했어. 우리는 그때 유모차를 끌며 5분 동안 십자가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했어. 그때 산 키이우행 표는 책장에 남아 있어. 갑작스러운 삶의 풍경 변화(오늘은 유모차를 끌고 산책했는데, 내일은 그 자리에 폭탄이 떨어지는 현실)가 초현실적으로 느껴져. 다음 날엔 엄마가 다시 전화 와서 다 괜찮다고, 더 이상 폭격은 없다고 하시겠지. 하지만 그때는 나는 믿을 거야(번역:정소은).

5월9일 우크라이나 르비우 외곽에 마련된 피란민 이동식 주택 단지에서 모자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연합뉴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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