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달리기 모임 친구들과 함께한 일본 오사카 순환선 19개 역 달리기. 이곳은 모모다니역이다. ⓒ이범준 제공

처음 마라톤을 완주한 것은 달리기 시작해 3~4년 되던 해이다. 3년째에 마라톤 대회에 나가려고 42㎞를 연습해놓았는데 사정으로 참가하지 못하고, 4년째에 대회에 나가 완주 메달을 받았다. 그래서 3년째인지 4년째인지 애매하다(3년째 대회 기념 셔츠는 조금 입다가 버렸다. 완주자 사칭 같아 꺼림칙했다). 첫 대회에 앞서 세워둔 목표 기록이 있었는데 25㎞쯤 지나면서 어렵다는 걸 알았다. 초반 오버 페이스 때문이었다. 그 탓에 나머지 17㎞도 괴롭게 마치면서 다시는 마라톤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듬해 봄에도, 가을에도 마라톤 대회에 나가 완주했다. 하지만 나이롱 신자 예배당 나가듯 치러내는 행사가 됐다. 완주가 주는 뿌듯함은 처음뿐이었다. 대회 며칠 전부터 탄수화물만 섭취하는 카보로딩(carbo-loading) 같은 것을 하기도 했는데, 영양 균형이 깨져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아마추어 수준에서는 평소 더 달리고 체중을 줄이는 게 올바른 방법이었다. 달리기의 유일한 목표이던 마라톤 완주에 시들해지니, 평소 달리는 일도 즐겁지 않았다. 그나마 달리기를 그만두지 않은 것은, 기록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덕분이다.

그 무렵 일본에서 살게 됐는데 이때 새로운 달리기를 경험했다. 일본은 2000년대 초반부터 달리기가 인기였다. 달리기 인구가 많으니 즐기는 수준도 달랐다. 달리는 거리가 길고, 스피드도 제법이었지만, 죽자 사자 달리는 사람은 적었다. 달리기를 즐거워했다. 오사카성에서 매주 모이는 달리기 모임에 들어갔다. 첫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갔는데 오늘은 ‘붕어빵 달리기’라고 했다. 인도로 천천히 5㎞쯤 달려가 붕어빵을 사먹고 돌아왔다. 신호등에 계속 걸리면서 누구도 처지지 않았고, 모두 붕어빵 맛집도 알게 됐다.

오사카에는 서울 지하철 2호선 같은 순환선이 있다. 19개 역이고 노선 거리 21㎞이다. 이 순환선 역들을 순서대로 달리기도 했다. 19개 역에서 사진을 찍고 떡집과 공원에 들렀다. 함께 달리면서 외국인인 나에게 역 이름의 유래와 동네 특징을 알려줬다. 이렇게 달리는 사람이 많으니 가게들도 이들을 위한 상품을 마련한다. 시가현에 비와코(琵琶湖)라는 둘레 235㎞에 이르는 호수가 있다. 오쓰시에서 출발해 중간에 다리를 건너면 43㎞ 코스가 나온다. 이곳 목욕탕들은 출발 전에 짐을 맡아주고 돌아오면 음료수를 주는 상품을 판다.

마라톤 대회에는 온갖 특이한 차림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지금까지 본 것을 다 말할 수 없지만 가장 특이한 것은 말과 기수였다. 두 사람이 말의 다리가 되어 인형 안에 들어가고, 한 사람이 기수가 되어 이끄는 모양이었다. 마이클 잭슨 옷차림으로 노래를 부르며 달리는 사람, 자동판매기로 분장해 콜라를 주는 사람 등등 끝이 없었다. 게다가 평소 좀 달리는 사람들이 정작 대회에서는 이런 놀이를 했다. 기록은 친구들끼리 모여서 내거나 혼자 측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사카 같은 큰 도시를 관통하는 대회에서는 가능하면 느리게 오래 달렸다. 그야말로 놀자판이다.

2014년 일본 고베마라톤에서 말과 기수로 분장한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이 달리고 있다. 이들이 말에게 붙인 이름은 ‘칩 임팩트(Cheap Impact)’로 전설적인 경주마 ‘딥 임팩트(Deep Impact)’의 패러디다.ⓒ이범준 제공

화가 나 있는 서울의 마라토너들

24시간 릴레이 마라톤도 있다. 7월 중순 연휴에 한다. 오사카 북항 바다를 메워 만든 인공섬에서 열린다. 10~18명이 한 팀을 꾸려 24시간 동안 달린다. 한 바퀴 1.4㎞를 팀원들이 번갈아 뛴다. 16명이 달리면 21㎞마다 차례가 돌아오는 셈이어서 대략 100분에 한 번씩 뛴다. 한 사람이 두 바퀴씩 뛰면 200분마다 차례가 온다. 150개 팀이 참가하는데 목적도 가지각색이다. 24시간 내내 무서운 속력으로 달리는 팀도 있고, 술을 마시다가 나와 흐느적거리는 팀도 있다. 성격도 다양해 고교 동창회, 부서 단합대회, 스피드 훈련, 심지어 소개팅도 있었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달려보고 싶었다. 서울국제마라톤에 정장 차림으로 나갔다. 넥타이를 매고 손에는 신문을 쥐었다. 재미있게 회사원 복장으로 달리기로 했다. 나 말고는 컬러 가발 쓴 사람조차 없어 머쓱했지만 일단 달렸다. 어쩌다 웃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화를 내는 사람도 많았다. “마라톤은 인간 승리 순간인데 어디서 달려보지도 않은 놈이 장난질이냐”라며 소리를 질렀다. 나와 상관없이도 화들이 나 있었다. 기록을 내겠다는 생각에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고, 초코파이를 빨리 내놓으라며 자원봉사 학생에게 호통을 쳤다. 이후로 한국에서는 운동복 아닌 차림으로는 달리지 않았다.

서울에서 경험한 달리기 모임은 지나치게 기록에 집착했다. 어느 20대 남성은 1년6개월 만에 20㎞를 달리게 됐다고 자랑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 나이에 그 기간을 연습해 20㎞는 너무 짧았다. 들어보니 나름 빠른 페이스로 1㎞를 달린 날, 그 기록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이후로는 처음 빠른 페이스를 어느 정도 유지하는 선에서만 거리를 늘렸다. 하지만 지금 같은 페이스를 지키면서 더 거리를 늘리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렇다고 페이스가 떨어진 기록을 인스타에 올릴 수도 없을 것이다. 달리는 속력을 낮추든가 기록을 공개하지 말아야 하지만, 어느 것도 쉽지 않을 테다.

영화 〈말아톤〉에서 음주운전으로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마라토너는 자폐아 아들을 가르쳐달라는 아이 엄마에게 말한다. “마라톤이 폼 나죠? 인간 승리 하는 것 같아서. 그거 다 현실도피예요. 사는 게 갑갑하니까 대리만족하는 거라고요.” 그렇다. 완주도 기록도 삶을 바꾸지 못한다. 잘해야 현실도피이고 요새는 관종질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마라토너가 마음을 바꿔 자폐아 초원을 가르치는 계기가 있다. 우연히 수십㎞를 달리게 된 초원이 자신의 뛰는 가슴을 만져보라며 마라토너의 손을 잡아당긴 다음부터다. 마라토너는 벌떡벌떡 뛰는 심장을 느끼기 위해 달린다.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그 도저한 감동이 삶을 바꾼다.

기자명 이범준 (아마추어 마라토너·논픽션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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