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6일 서울고용노동청 외벽에 설치된 모니터에 고령자 계속고용장려금 광고가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임금피크제는 연령차별에 해당한다. 어떤 나이에 도달했다는 이유만으로 임금을 깎기 때문이다. 연령차별이라고 해서 무조건 불법인 것은 아니다.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차별한 경우에만 위법한 차별이 되어 무효다. 그렇다면 어떤 임금피크제가 위법한 연령차별인가?

이에 대한 대법원의 첫 판단이 5월26일 나왔다. 공공연구기관인 전자부품연구원(현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의 행정직 ㄱ씨(67)가 제기한 소송에서다. 이곳은 2009년 1월 임금피크제를 도입했고, ㄱ씨는 만 55세가 된 다음 해인 2011년 4월부터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았다. 이 연구원에서는 직급별로 ‘역량등급’이 정해져 있고 이에 따라 기본급을 받는다. 선임 직급은 1~21등급, 책임 직급은 1~23등급, 수석 직급은 1~33등급으로 점점 올라가는 식이다. ㄱ씨는 가장 높은 직급인 수석 직급에서 역량 20등급에 따른 기본급을 받고 있었는데, 만 55세가 되자 하위 직급인 선임 직급이 되면서 약 50등급이 일시에 하락했다. 여기에 성과 평가를 적용하자, 평가 결과가 S등급일 경우 월 93만원, D등급일 경우 월 283만원만큼 급여가 줄었다. ㄱ씨는 이 연구원의 임금피크제가 ‘합리적 이유 없는 연령차별’로서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고령자고용법)’에 위반되어 무효라고 주장했다.

대법원은 임금피크제가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연령차별’인지를 판단하는 네 가지 요건을 제시했다. 첫째,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목적이 타당해야 한다. 둘째, 직원들이 입는 불이익의 정도가 과도해선 안 된다. 셋째, 임금이 깎이는 것에 대해 적정한 대상 조치(보상 조치)가 있어야 한다. 넷째, 임금피크제로 감액한 재원을 본래 목적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이런 기준에 비춰보면 해당 임금피크제는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연령차별이어서 무효라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연구원은 경영을 혁신하고 실적 달성률을 높이기 위해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고 주장했는데, 정작 가장 임금이 높은 구간인 51세 이상 55세 미만 정규직 직원들의 수주 목표 대비 달성률이, 임금피크제로 임금이 깎이는 55세 이상 직원들에 비해 낮았다(목적의 타당성). 임금피크제 시행으로 55세 이상 노동자들의 임금이 일시에 대폭 하락했으나(불이익의 정도), 이들에게 부여된 목표 수준이나 업무량, 업무 내용이 변경되었다고 볼 만한 자료도 없었다(보상 조치의 유무 및 적절성). 대법원은 임금피크제로 아낀 재원을 본래 목적을 위해 썼는지는 이번 사건에서 따로 판단하지 않았다.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18 물류산업 청년 채용박람회’에서 구직자들이 채용 게시판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고령자고용법 개정안’에 달린 단서

그런데 이번 판결 대상이 된 사건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위 연구원의 경우, 기존 정년 61세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인건비 절감 목적으로 만 55세 이상부터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정년도 늘려주지 않고 업무도 조정하지 않으면서 임금만 깎았다. 이쯤에서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 특정 나이가 되면 임금을 깎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전에, 왜 일정 연령이 되면 고용계약을 종료해야 하나?

직종과 개인 역량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연구자들은 노동자의 생산성이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시점을 평균 45세 전후로 본다. 그런데 한국은 연차에 따라 임금이 올라가는 ‘연공급 체계’가 공고한 나라다. IMF 외환위기 이후 성과연봉제가 상당 부분 도입되었으나 바탕에는 호봉제 요소를 깔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젊었을 때는 생산성보다 못한 임금을 받고, 나이 들었을 때는 생산성을 웃도는 임금을 받는다(그래서 연공급을 ‘이연임금’, 즉 뒤로 미뤄 받는 임금이라고 한다). 이런 구조에서는 어느 시점에서 강제로 고용계약을 종료시킬 필요성이 생긴다. 정년이다.

한국에는 원래 법정 정년이 없었다. 많은 기업이 정년을 자체적으로 55세로 정하고 있었지만, 고용이 불안정한 민간 부문에서 실질적인 정년은 53~54세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의 은퇴가 시작되고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정년 연장이 더 미룰 수 없는 과제로 떠올랐다.

문제는 정년을 늘리면 임금을 어떻게 줘야 할지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정년을 연장하되 임금을 연차에 따라 계속 오르도록 하면 문제가 생긴다. 첫째, 기업들은 나이가 들어 생산성이 떨어진 직원들에게도 높은 임금을 줘야 하므로 희망퇴직·권고사직 따위로 사람을 내보내려 한다. 둘째, 한정된 자원을 조직 내 고령자에게 더 써야 한다면 신규 채용 여력에 제한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민간에서 자율적으로 정년을 연장할 때는, 정년을 연장하되 정년 직전의 몇 년 동안 정점(피크)에 이른 임금을 깎거나 동결하기로 노사가 합의해왔다. 이것이 ‘임금피크제’다.

정년이 법제화되어 ‘기득권’이 되면 노동자들로서는 더 이상 임금 삭감에 동의할 이유가 없어진다. 임금은 노사 간 합의 사항으로 법이 강제할 수 없다. 이에 국회는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고령자고용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정년을 60세로 법제화하면서 단서를 달았다. 이 법에 따라 정년을 연장하는 사업주와 노동조합은 “임금체계 개편 등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고령자고용법 제19조의2 제1항)”라는 조항이 그것이다. 이로써 2016년부터는 공공기관과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 2017년부터는 전 사업장에서 정년을 60세 이상으로 정하도록 강제했다.

정부가 그나마 팔을 비틀 수 있는 건 공공기관이다. 법 시행 1년 전인 2015년, 박근혜 정부는 급한 대로 ‘공공기관 임금피크제 권고안’을 내놓아 공공기관 경영평가에 임금피크제 도입 여부를 반영하기로 했다. 이때 정년을 ‘연장’하는 경우뿐 아니라 ‘보장’, 즉 기존 정년을 유지하는 경우에도 임금피크제를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앞서 자율적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의 일부도 고령자 고용안정을 꾀하겠다며 정년 ‘보장’형 임금피크제를 시행했다.

“이번 판결이 나오기 전에도, 정년은 변함없고 일도 똑같이 시키면서 임금피크제라는 명칭만 붙여 연령을 이유로 임금을 삭감하는 건 위법할 가능성이 높다는 논의가 상당히 있었다. 임금피크제는 (한국과 비슷하게 연공급 체계가 강한) 일본에서 들여온 건데, 거기는 정년연장형이지 우리처럼 정년을 그대로 두고 임금만 깎는 방식이 아니다.” 박귀천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노동법)가 말했다.

이번 판결에 당장 영향을 받는 곳은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곳이다. 공공연구기관이 대표적이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에 속한 이광오 전국공공연구노조 조직위원장은 “다른 공공기관들은 정년이 연장된 사례가 있지만 우리 공공연구기관은 정년이 61세로 그대로 유지된 채 임금만 깎였다. 이번 판결로 산하 40여 지부 실태조사와 법률적 검토를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인천교통공사 등 지방공공기관 500여 곳 중 440여 곳(87%)도 정년을 유지한 채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고 KBS가 보도했다. 일부 퇴직자들은 소송을 진행 중이다.

정년을 연장하면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경우는 괜찮을까? 업무의 양이나 질과 상관없이 임금을 과도하게 삭감했다면 ‘합리적 이유 없는 연령차별’이라는 판결이 있다. 다만 정년유지형보다는 합리적이라고 인정될 여지가 크다. 예컨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청년층 고용을 촉진하기 위해 임금피크제를 실시했는데, 이에 대한 무효 소송에서 법원은 정년 60세법 시행을 앞두고 노사가 법에 따른 ‘임금체계 개편 조치’를 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고령자고용법은 ‘특정 연령집단의 고용 유지·촉진을 위한 지원조치’는 연령차별로 보지 않는데, 해당 임금피크제 시행 이후 신규 채용 규모가 확대되었으므로 법원은 연령차별 금지의 예외에 속한다고 봤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임금피크제로 감액한 재원을 ‘본래 목적’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대목은, 임금 삭감분이 청년 채용에 쓰였다면 합리성을 인정하겠다는 취지로 보인다.

문제는 남는다. 여연심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는 “정년 연장이 임금피크제에 대한 가장 강력한 보상인 것은 맞다. 하지만 10년 후에도 그럴지 의문이 든다”라고 말했다. “지금 소송을 제기한 원고들은 대체로 정년이 연장되면서 임금이 깎인 사람들이다. 그런데 입사할 때부터 정년이 60세인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 또는 정년 60세법이 시행되고 나서 생긴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에게 임금피크제를 시행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 시점이 되면 대법원이 또 한 번 고민을 해야 할 수도 있다.”

현장에서도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든다. 삼성전자는 정년법 시행 전인 2014년 정년을 55세에서 60세로 늘리면서 임금을 56세부터 매년 10%씩 깎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2018년부터는 57세부터 5%씩 삭감한다. 한국노총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은 2020년부터 임금피크제 폐지 또는 개선을 회사에 요구 중이다. 손우목 전국삼성전자노조 부위원장은 “회사가 보상 차원에서 정년을 연장한 게 아니라 법에 따른 정년이 60세다. 60세를 넘어서 추가로 정년을 연장해주는 것도 아니고, 법정 정년을 보장해준다며 임금을 삭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고 말했다.

고령화시대의 ‘직무 가치 평가’는?

KB국민은행 등 2000년대 중후반 이후 일찌감치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은행권에서도 ‘시니어 노조’를 중심으로 소송 움직임이 있다. 이에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청년 일자리에 영향을 줄 거라며 난색을 표한다. 반면 한국노총은 “청년 일자리가 느는 효과는 미미했고,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만 삭감됐다”라며 임금피크제 폐지를 주장한다.

그런데 정년제를 운영하는 사업체는 전체의 21.1%에 불과하다. 300인 이상 기업일수록(93.8%), 노조가 있을수록(96.1%) 정년제 운영 비율이 높다. 반면 5인 이상 사업장 전체의 평균 근속연수는 6.8년에 그친다. 정이환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노동사회학)는 “정년 연장이나 임금피크제가 문제가 되는 영역은 청년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공공부문과 대기업인데, 여기서 일자리가 잘 생기지 않고 임금도 높은 편이다. 정년도 연장해가야 하는 상황에서 고령자의 업무강도를 낮추는 대신 임금도 완만하게 조정해간다면, 임금피크제가 장기적으로 연공급을 넘어 ‘동일노동 동일임금’으로의 임금체계 개편을 촉진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때 정년이 연장되는 사람들의 임금을 깎으면 기업의 이윤으로 돌아갈 뿐이라고 노조가 비판하는데, 청년 구직자나 하청업체 등 노동 약자들에게 그 몫이 돌아가게 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노조가 적극적으로 대안을 찾을 수 있고, 사측에 요구해 연대기금을 만들 수도 있다.”

사실 하는 일에 따라 임금을 받는 체계라면 임금피크제는 당연히 무효다. 같은 일을 하는데 나이 들었다고 어느 날 임금을 깎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런저런 조건을 붙여서 임금피크제를 인정하는 이유는, 임금피크 연령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임금이 연차에 따라 올랐기 때문이다. 연공급은 근속기간이 길면 숙련이 향상되리라고 간주하지만, 한국의 현실에서 숙련을 제대로 평가하지는 않는다. 박귀천 교수는 “현재 시스템에서 젊은 사람은 같은 일을 하거나 성과를 많이 올려도 나이 든 사람보다 대체로 적게 받는데, 이 역시 엄밀히 말하면 젊은 사람에 대한 연령차별에 해당할 여지가 있다. 연령만을 이유로 직장에서 내보내는 ‘정년’이 합리적인지도 다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고령화시대에 말로만 해오던 ‘직무가치 평가’를 어떻게 할지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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