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성범죄 등 대응 TF’ 전문위원들. 왼쪽부터 오지원 변호사, 최서희 리셋 대표, 박경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시사IN 이명익

법무부에 열두 번째 ‘권고안’을 막 공유한 참이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디지털성범죄 예방교육의 효과성을 제고하고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신설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첨부자료에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배경으로 한 성착취물과 이를 희화화한 댓글이 줄지어 있다. “2020년 4월 디스코드(게임용 음성 채팅 메신저)에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유포하다 검거된 채널 운영자가 12세였어요.” 초안을 쓴 건 ‘리셋(ReSET)’ 최서희 대표다. 익명 활동가로 구성된 리셋은 N번방 수사 초기부터 성착취물이 공유되는 단체방에 잠입해 가담자 검거에 기여하고 피해자를 지원했다.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심정이었다. 리셋이 채증한 자료에는 ‘지인 능욕방’이라 불리는 디스코드 채팅방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었다. “특정 개인이나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단체방에 몇백 명이 들어가 있어요. ‘상위방’이나 ‘능욕방’이 인기가 많은데 이런 곳에 초대되려면 지인을 대상으로 성적 모욕하는 인증을 해야 해요. 경찰에선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는다면서 신고도 안 받아주는 현실입니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전보다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최서희 대표는 또래 관계에서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디지털 성착취물이 동원되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으면, 어떠한 조치도 늑장 대응이 될 것이라 보았다. 지난 10개월간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등 대응 TF(이하 TF)’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이다.

그런데 해당 권고안은 피드백을 받지 못했다. TF 팀장을 맡았던 서지현 검사가 5월16일 TF 출장길에 갑작스러운 원대 복귀 통보를 받으면서다. 서 검사는 “이렇게 짐 쌀 시간도 안 주고 모욕적인 복귀 통보를 하는 것의 의미가 명확하다”라며 사직서를 제출했다. 새 법무부 장관 취임 직전 ‘쳐내기’ 인사라는 비판이 뒤따랐다. 서 검사는 위원들에게 ‘열정과 노력을 잊지 않겠다’라는 짤막한 감사 인사를 남겼다. 이틀 뒤 TF 전문·자문위원 22명 중 17명도 사의를 표했다. “팀장이 부재한 상황에서 TF가 어떻게 되는 건지 어떠한 연락도 받지 못했다. 여기서 우리가 뭘 더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최서희 대표와 리셋 멤버들은 허탈했다.

5월6일 법무부가 발행한 ‘디지털성범죄 등 대응 TF’의 성과 보고서.

법무부 산하에 TF가 출범한 건 지난해 7월27일이다. 법무부 양성평등정책 특별자문관이던 서지현 검사가 이끄는 팀이었다. 텔레그램 N번방 존재를 처음 보도한 ‘추적단 불꽃’과 ‘리셋’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변영주, 싱어송라이터 핫펠트가 TF 전문위원으로 합류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전문위원 10명, 자문위원 12명은 각각 법조, 언론, 시민사회, IT, 문화예술 분야에서 디지털성폭력 범죄 근절을 누구보다 고민해온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서지현 검사가 직접 섭외 요청을 했다.

왜 법정에 피해자가 보이지 않나

‘불꽃’의 ‘단’(전 ‘추적단 불꽃’ 활동가. ‘불’로 활동했던 박지현씨가 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으로 정치에 입문하면서 추적단 불꽃은 ‘불꽃’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은 당시 구글, 트위터 등 해외 플랫폼에서 유포되는 성착취물을 취재 중이었다. 2020년 4월30일 N번방 방지법이 통과되었지만,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들의 현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법무부, 경찰청, 여가부 등 지원 기관을 직접 찾아 증언을 거듭해야 했고, 게시물 재유포를 막을 길이 없었다. 답답함을 느끼고 있던 그때 서지현 검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디지털성범죄 대응을 위한 권고안을 낼 수 있는 임시 조직을 꾸릴 텐데 여기서 현장의 목소리를 공유해달라.” 단은 피해자의 목소리가 제도권으로 갈 수 있는 ‘통로’라고 생각했다.

법무부는 정말로 디지털성범죄 해결의 키를 쥔 정부 부처였다. 가해자 처벌부터 피해 영상물 삭제, 피해자의 일상 회복 지원 등 범죄예방을 총괄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문위원들은 법무부 차원에서 성범죄와 관련해 종합 대책을 마련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전문위원 중 한 명인 오지원 변호사(법률사무소 법과 치유)는 성폭력 피해자를 법률 대리해왔다. “아무리 여가부에서 인권 보호를 얘기해도, 형사사법체계와 관련된 모든 법은 법무부 소관이에요. 성범죄 대응 과정에 피해자 관점이 반영되기 위해서는 법무부가 이 문제를 ‘자기 일’이라고 인식해야 했어요.” 법무부가 디지털성범죄 대응에 힘을 쏟을 수 있었던 배경에 서지현 검사가 있었다고 전문위원들은 입을 모았다.

판사 출신인 오 변호사에게는 ‘왜 법정에서 피해자가 보이지 않는지’가 오랜 화두였다. 형사절차는 국가의 수사·기소 기관과 피의자가 다투는 절차다. 피해자는 사건 당사자임에도 법정에서 제3자로 밀려나는 데 따른 문제의식이었다. 특히 디지털성범죄는 법정과 온라인 현실의 간극이 가장 큰 범죄 중 하나였다. 2016~2020년 법무부 ‘검찰사건 처분 통계 분석’을 보면 불법 촬영, 통신매체이용음란, 허위 영상물 편집·배포 등 디지털성범죄 사건의 81.34%가 집행유예·벌금·선고유예를 처분받았다. 실형 선고는 9.37%에 불과했다. 다음은 오 변호사의 말이다.

“불법 촬영 피해자를 상담하다 보면 심리적으로 힘들어요. 피해자들은 누군가 휴대폰을 들고 있는 걸 봐도 트라우마가 생겨서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분들이 경찰에 신고하고 어렵게 가해자를 찾아요. 그런데 대부분 벌금형이 나와요. 민사소송을 제기해야 하는데 벌금형 사안은 위자료 액수도 적어요. 게다가 주소와 실명도 밝혀야 하지, 변호사 비용도 부담해야 하지, 어떤 피해자에게 이 과정을 감당해야 한다고 권할 수 있겠어요. 권리구제를 포기하라는 말과 다름없거든요.”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에게 징역 42년형이 선고되고,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이 만들어졌는데도 왜 디지털성범죄 피해는 끊이지 않는가. N번방 사건 공론화 2년여 만에 이 문제를 직면하고 디지털성범죄 대응체계를 개선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린 셈이다. 오 변호사는 서지현 검사와 ‘유명무실한 TF로 남지 말자’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전문위원들은 일주일마다 온라인 회의를 열고, 일선 판검사를 대상으로 디스코드와 다크웹 등에서 벌어지는 성착취 현실을 공유했다. 1년 남짓한 시간 내에 다뤄야 할 이슈가 시급하고 또 복잡했다.

TF는 지난 10개월간 60여 개 법률개정안을 담은 권고안 11개를 내놓았다. 기록적인 활동이었다. 법무부 내 분리돼 있던 성범죄 피해자 통합지원의 ‘원스톱’ 지원체계를 갖추었고, 정부 부처 최초로 인권·젠더 데스크를 설치했다. 여기서 성범죄 관련 법무부 홍보물을 만들 때 ‘몰카’ ‘음란물’ ‘몹쓸 짓’ 등 부적절한 단어를 쓰지 않았는지, 시각자료가 2차 피해를 유발하지 않는지 점검한다. 또 연예인 표준계약서에 소속사의 ‘성범죄로부터의 보호 강화’ 규정을 넣고, 연예인들이 성범죄 피해를 겪게 되면 소속사가 의무교육을 받도록 한 문화체육관광부의 대책 역시 TF가 만들어낸 성과다.

무엇보다 11개 권고안은 전문·자문위원이 합의한 디지털성범죄 대응 체계의 가이드라인이다. 경찰이 온라인 사업자에게 영상물을 삭제하거나 차단을 요청할 수 있는 권한 부여, 피해자 측의 사정을 형법상 양형요소에 추가, ‘성적 인격권’을 신설하는 것 등이 포함되었다. 때로 피해 지원 현장의 답답함과 법률가들의 우려가 부딪치기도 했다. 배포 목적 없이 딥페이크 영상을 제작할 때 처벌하지 않는 성폭력범죄처벌법상 ‘목적범’ 조항 삭제안이나,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스마트폰을 해킹해 범죄 증거를 수집하는 ‘온라인 수색’은 담기지 않았다. 토론과 수정 작업이 수개월 이어졌다. ‘불꽃’ 단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들의 일상을 같이 걷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연기하는 음란물과 성범죄는 다르다”

실제로 TF 권고안은 많은 부분 피해자 관점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박경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범죄 피해자 보호와 지원 정책을 모색해온 형법 연구자다. 그에게 N번방 사건과 디지털성범죄는 형법의 존재 이유를 묻게 된 계기였다. “형사처벌이 존재하는 이유는 피해자를 위해서인데, 69년 된 현행 형법체계로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를 구제하는 데 한계가 있어요.” 신체적 성폭력 행위 여부를 위주로 수사하고 판단하는 사법체계에서 디지털성범죄는 여전히 ‘경한 범죄’로 취급된다. 오히려 N번방 사건 처리가 이례적인 경우라고 위원들은 말한다.

지난해 10월, 서지현 검사(정면 오른쪽)가 ‘디지털성범죄 등 대응 TF’ 전문위원회 제2차 권고안을 브리핑하고 있다.ⓒ연합뉴스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성범죄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추적하기 어려운 데다, 피해 범위가 훨씬 크다. 제작자와 유통자, 소비자가 집단적으로 성착취 산업을 떠받친다. 플랫폼은 사실상 이를 묵인하고 방관한다. 리셋의 최서희 대표는 정치권과 사법기관이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범죄의 실상을 제대로 모른다고 지적한다. “몇몇 익명 온라인 커뮤니티만 모니터링해봐도 N번방과 유사한 게시물들이 올라와요. 플랫폼에 삭제를 요청하면 다시 유포돼요. ‘더 센 거 가져오라’면서. 성착취물을 유포하는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모욕하고 괴롭혀도 본인이 잡히지 않을 걸 알아요.” 그는 가해행위의 잔인함이 평가절하돼 있다고 말했다.

TF 위원들은 직접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 및 유포죄로 기소된 판결문을 살펴봤다. ‘피해자의 처벌 불원’ ‘진지한 반성’ ‘처벌 전력 없음’ ‘사회적 유대가 양호한 점’ 등이 대부분 양형에 반영된 것으로 나타났다. 오 변호사는 사법기관이 피고인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강력 처벌’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엄격한 증명도 중요한 형법의 구성원리라고 본다. “다만, 가해자의 미래를 생각하는 만큼, 피해자의 미래도 고려해야죠. 양형 심리할 때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정말 사죄를 구했는지, 피해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는지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피해자의 관점을 배제하는 게 중립적인 판결이라 할 수 있을까요?” 오 변호사는 객관적 양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양형 기준에 피해자 진술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제안이 TF 4차 권고안에 반영되었다.

디지털성범죄 현장을 모니터링하는 리셋 최서희 대표는 성폭력처벌법에 ‘성적 인격권’을 신설하는 5차 권고안만은 꼭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명과 주소가 박제된 ‘지인 능욕’ 게시물을 신고하려고 해도 법조항이 모욕죄나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죄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를 디지털성범죄로 처벌해야 피해자들이 ‘성범죄 피해자’로 인정받고 피해 회복을 지원받을 수 있다고 본다.

‘불꽃’ 단의 의견도 비슷했다. “디지털성범죄가 왜 이렇게 끊이지 않는가, 그 이유를 들여다보면 여전히 피해자가 피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구조가 아직 없어요. 가해자들은 아동·청소년을 카카오톡 오픈 채팅이나 텔레그램 대화방으로 유인해 그루밍하고, 성적인 사진과 영상을 착취하잖아요. 이런 범죄는 플랫폼의 책임 방기와 피해자를 탓해온 문화 속에서 증식해요.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사회적 메시지가 좀 더 퍼져야 피해가 빨리 드러날 수 있어요. 본인의 피해를 증언할 수 있는 성적 인격권이 신설되면 피해자들에게 언어가 생기지 않을까 합니다.”

계획대로라면 11개 권고안이 입법될 때까지 점검하는 것이 전문위원들의 최종 목표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인사 통보와 사퇴로 모든 일정과 계획이 기약 없이 멈췄다. 정권이 바뀌고 팀장이 교체되더라도 TF에 남아서 업무를 완수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위원들은 임기 3개월을 남기고 파견 종료 통보를 하는 것은 법무부가 TF 운영 의지가 없다는 뜻이라고 읽었다. TF 존속 여부를 묻는 질문에 법무부 기획조정실 관계자는 “현재 내부 검토 중”이라고만 밝혔다. 최서희 대표가 TF에 남더라도 열두 번째 권고안을 추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디지털성범죄는 증가하는 중이다. 2022년 3월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0년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발생 추세 및 동향 분석 결과’를 보면, 강간 및 강제추행 등 성폭력 범죄자는 전년 대비 10.6%, 피해자는 12.9% 감소했다. 반면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 등 범죄자는 전년 대비 61.9%, 피해자는 79.6% 증가했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해 탄식을 내뱉는 전문위원은 아무도 없었다. 수년간 디지털성범죄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를 끈질기게 파고든 이들에겐 이상하지 않은 결과였기 때문이다. 박경규 부연구위원은 “음란물과 성범죄가 다르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너무 부족하다”라고 말했다. 오 변호사는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의 목소리가 더욱 반영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수사기관이든 판사든 이건 음란물이 아니라 실제 피해자가 있는 사건이고, 여성이 가상으로 연기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걸 알아야 해요. 성착취물이라고 판단하면서도 피해자를 찾는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문제는 거듭될 것입니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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