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자 윌리어미나 플레밍.ⓒWikipedia

1879년 천문학자이자 하버드 대학 천문대장인 에드워드 찰스 피커링은 연구원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계산이나 관찰, 행정 업무를 맡은 남성 연구원들이 피커링의 연구를 제대로 보조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들은 망원경을 통해 밤하늘을 사진으로 찍어 수집하고 항성의 스펙트럼을 분석한 뒤 그 변화를 기록하고 계산해야 했지만 피커링이 원하는 만큼 일을 해내지 못했다.

그 무렵 피커링의 집에 스물두 살 가정부가 새로 들어왔다. 임신한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집에서는 보통 미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피커링은 미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피커링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미나가 수학 계산을 아주 잘한다고 말했다. “농담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자기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로도 일했대요. 집안일에, 우리 아이들 돌보는 일에, 장부 정리까지 척척 해내고 있어요.” “그런 사람이 왜 가정부를 하고 있겠소?” “남편이 미나를 버리고 도망갔다나 봐요. 곧 아이도 태어날 텐데….”

피커링은 아이를 낳고 돌아온 미나에게 시간제로 천문대 사무를 보는 일을 맡겼다. 미나는 그 일을 잘 해냈고 연구에 필요한 계산 일도 맡기 시작했다. 1881년 피커링은 미나, 아니 윌리어미나 플레밍을 정식으로 천문대의 직원으로 받아들이고, 본격적으로 스펙트럼 분석을 맡겼다. 남성 연구원들이 그 사실에 불만을 표했지만 피커링은 개의치 않았다.

윌리어미나 페이턴 스티븐스는 1857년 5월15일,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가의 대도시인 던디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교에서 뛰어난 학생이었고, 14세 무렵부터는 당시 고학년 우등생들이 맡던 보조교사 일을 했다. 졸업한 뒤에도 결혼 전까지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877년 윌리어미나는 아내와 사별한 회계사 제임스 오어 플레밍과 만났다. 그는 윌리어미나보다 열다섯 살이나 나이가 많았지만 둘은 결혼했다. 어릴 때부터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윌리어미나에게 결혼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고,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그는 나이 많은 남편에게서 아버지의 정을 찾으려 했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1년 남짓 지난 1878년 11월 미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제임스는 윌리어미나가 기대했던 따뜻하고 다정한 남편과는 거리가 멀었다. 보스턴에 정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임스는 임신한 아내를 버리고 도망쳤다. 윌리어미나는 임신한 몸으로 낯선 미국 땅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다행히 윌리어미나를 고용한 피커링 부인은 사려 깊은 사람이었고, 그의 남편인 에드워드 피커링 교수는 여성이라도 연구에 필요한 재능이 있다면 채용할 수 있는 실용주의자였다. 윌리어미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며 태어난 아이에게 피커링의 이름을 따서 에드워드라 이름 붙였다.

사실 그 무렵 피커링은 폭증하는 천문 데이터들을 앞에 두고 애를 먹고 있었다. 연구원을 늘려야 했지만 예산에는 한계가 있었다. 피커링은 여성들을 고용하면 같은 비용으로 더 많은 인원을 쓸 수 있고, 더 많은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피커링의 생각에 확신을 더해준 사람이 바로 윌리어미나였다. 그는 천문대의 행정 일은 물론 분광분석의 결과를 처리하는 데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윌리어미나에게 만족한 피커링은 연구소에 여성들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여성 천문학자들의 저임금 문제 제기

1881년부터 천문대의 정식 직원이 된 윌리어미나가 맡은 일은 피커링과 그의 연구원들이 관측해 기록한 결과나 사진에서 발견되는 스펙트럼을 분석해 별의 등급을 계산하는 일이었다. 그는 별의 밝기뿐 아니라 스펙트럼에서 볼 수 있는 수소의 양에 따라 별을 재분류해 16가지 유형을 부여하는 새로운 조직 체계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 무렵인 1882년, 의사이자 천문학자인 헨리 드레이퍼가 세상을 떠났다. 헨리 드레이퍼는 천문 사진과 항성 스펙트럼 사진의 선구자로 최초로 달 사진을 촬영한 인물이었다. 드레이퍼의 아내인 메리 애나는 피커링이 항성의 스펙트럼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알고 1886년 남편의 이름을 붙인 거액의 기부금을 희사했다. 피커링은 천체 스펙트럼 연구를 확장하며 윌리어미나가 제안한 알파벳으로 스펙트럼을 분류하는 체계를 도입했다.

헨리 드레이퍼의 이름을 딴 첫 번째 항성 목록은 적위 -25°의 북쪽에 있는 1만351개 항성 중 2만8266개의 스펙트럼을 분류한 것으로, 1890년에 출판되었다. 윌리어미나는 연구의 저자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이들 항성 스펙트럼 데이터의 대부분을 분류했으며, 피커링은 목록 내부에서 윌리어미나의 스펙트럼 체계에 대해 소개했다. 이 연구는 항성의 스펙트럼 유형을 분류하여 목록으로 만든 최초의 대규모 시도가 되었다.

하버드 대학 천문대에서 일하는 여성 수리천문학자들의 모습. ⓒWikipedia

윌리어미나의 뛰어난 업무 처리와 연구 능력에 감명을 받은 피커링은 더 많은 여성 연구원을 채용하고 윌리어미나에게 여성 연구원 부서의 책임자 역할을 맡겼다. 장차 ‘하버드 컴퓨터’로 불리는 이들 여성 연구원은 항성 분류를 위한 수학 계산을 수행하고 천문대의 출판물을 편집했다. 이들 중에는 윌리어미나의 분류를 발전시켜 온도와 스펙트럼 유형을 기반으로 별을 구성하고 분류하는 ‘하버드 항성 분류 체계’를 구축한 애니 점프 캐넌, 세페이드형 변광성의 변광 주기와 광도 사이의 상관관계를 발견한 헨리에타 스완 레빗, 마차부자리 베타성이 쌍성임을 발견한 안토니아 모리, 태양의 구성 물질을 밝혀내고 항성의 유형마다 온도가 다르다는 것을 밝혀낸 세실리아 페인 등의 여성 천문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1918년부터 1924년까지, 북반구와 남반구 하늘 전체에 있는 별들을 총망라하는 목록을 만들었다.

윌리어미나는 대학에서 천문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이들 여성 연구원이 대학에 소속되어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만든, 그 첫걸음이 된 사람이었다. 그는 여성 연구원들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천문대의 여성 연구원들은 남성 전공자를 연구원으로 채용할 때의 급여에 한참 못 미치는 액수이자 남성 비숙련 노동자와 비슷한 수준의 임금인 시급 25~50센트를 받고 있었다. 윌리어미나는 여성 천문학자들의 저임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한편, 1893년에는 〈천문학 분야에서의 여성의 노동〉이라는 논문으로 여성 연구원들의 연구와 기여에 대해 소개했다.

윌리어미나 플레밍은 1888년 오리온자리를 촬영한 천문 사진에서 최초로 말머리성운을 발견했다. 그는 1889년 하버드 대학 천문대의 천체사진 큐레이터가 되었으며, 1906년에는 미국의 여성 천문학자로는 최초로 영국 왕립 천문학회의 명예회원이 되었다.

기자명 전혜진 (SF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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