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4월11일부터 단식에 나선 종걸(왼쪽)과 미류.ⓒ시사IN 이명익

미류와 종걸, 두 활동가가 다시 길 위에 섰다. 지난해 ‘평등길1110’ 도보 행진 이후 6개월 만이다. 목표는 같다. ‘차별금지법 제정’이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농성장이 차려졌다. 무지개 커튼이 달린 이곳 ‘평등텐트촌’에서 두 활동가는 4월11일부터 26일째(5월6일 기준)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나중에’가 아닌 올봄에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미류 활동가는 “구조적 차별이 없다고 말하는 대통령의 정권이 시작되기 전에,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이제는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에서 다음 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올봄을 ‘평등의 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3월20일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공동비대위원장은 당 쇄신 방향을 밝히며 “국민 모두의 평등법을 제정하겠다”라고 말했다. 4월25일 박지현 비대위원장은 “차별금지법을 당론으로 확정하자”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다음 날 민주당은 일정과 참고인을 정하지 않은 공청회 계획서를 법사위에서 의결했다. 진전 없는 논의가 국회에서 표류될 때, 미류와 종걸의 단식농성 일기가 〈시사IN〉에 도착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투쟁 중인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시사IN 이명익

[미류] 단식 전날(4월10일, 일요일) 
내일이면 단식을 시작한다. 목숨을 걸 만큼의 용기는 모르겠지만 내 삶을 걸고 싶다는 용기를 냈다. 그 와중에 죽 맛집을 검색하는 나도 웃긴다. 하루 끼니를 모두 죽으로 먹으며 내일을 위한 마음을 챙겨보았다.

[종걸] 단식 1일 차(4월11일, 월요일) 
이른 아침 여의도로 향하는 버스 안. ‘평등길1110’ 도보 행진이 떠올랐다. 그때는 한 달이라는 예정된 기한이 있는 투쟁이었지만 이번에는 기약 없이 시작하는 단식 여정이다. 농성장 설치는 계획대로 될지, 언론사에서 얼마나 올지, 우리가 잘 싸울 수 있을지 생각이 뒤죽박죽이다.

그래도 길 위의 시간은 오고, 아침의 걱정이 무색하게 함께 연대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천막도 무사히 설치했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도 직접 나와서 거들었다. 햇살이 유난히 뜨거운 하루였다. 밤에는 텅 빈 국회 앞 도로를 달리는 바이크 소리와 때 이른 모기로 자주 깼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투쟁 중인 이종걸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사무국장.ⓒ시사IN 이명익

[종걸] 단식 2일 차(4월12일, 화요일)
의원실을 방문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단식농성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지지 방문과 면담을 요청했다. 민주당은 대선 이후 당 쇄신 방향을 밝히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약속했다. 그런 만큼 민주당 의원들에게 반드시 올봄 차별금지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전했다.

민주당은 이날 오후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는 법안을 당론으로 채택하고 4월 국회에서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검수완박’을 위한 법안 제정을 새 정부 출범 전에 완수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민주당은 지금껏 국민의힘 핑계를 대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미뤄왔다. 검찰개혁 법안을 처리하는 과정을 통해 그것이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172석(당시 기준)을 가진 민주당은 의지만 있다면 법을 제정할 수 있다. 의지가 문제다.

4월17일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에게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입장을 묻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페이스북

[미류] 단식 4일 차(4월14일, 목요일)
아침에 씻으려고 보니 갈비뼈가 벌써 드러났다. 밑천 들킨 느낌. 물도 소금도 더 열심히 먹어야지.

[미류] 단식 5일 차(4월15일, 금요일)
오후에 ○○이 찾아왔다. 인사를 건네는데 눈시울이 붉다. 인권활동가로 오래 만나온 동료가 단식투쟁에 나선 걸 보며 속상하고 걱정되는 마음을 숨기기 어렵겠지.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나오려는데 꾹 참았다.

[종걸] 단식 6일 차(4월16일, 토요일) 
농성 첫 토요일 문화제를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이 준비했다. 성소수자들이 앞장서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쟁취하자는 구호를 외치니 힘이 났다. “차별금지법 제정되나, 봄?” “차별금지법 제정된다, 봄!” 미류의 신나는 구호로 문화제의 기운은 달아올랐다. 문란하고 더럽다고 비난받아왔던 사람들과 함께 “사회를 변화시키자”라고 외치며 국회 한 바퀴를 행진하니 애잔하면서도 신이 났다.

[종걸] 단식 7일 차(4월17일, 일요일) 
낮에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를 국회 앞에서 마주쳤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입장을 묻자 “개인적 관심은 높으나 당론이 없다”라고 답했다. 민주당이 뚜렷하게 법 제정을 추진하지 않고 있으니 국민의힘은 급하지 않은 모양새다. 미온적인 민주당에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장을 요구하려고 박홍근 원내대표와 박광온 법사위원장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준비했다. 그렇게 날이 저물었다.

[미류] 단식 8일 차(4월18일, 월요일) 
아침부터 짜증이 많이 났다. 밥을 안 먹으면 사람이 예민해진다던데 이런 건가?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박광온 법사위원장에게 서한을 전달하러 가는 걸 막은 국회 방호과 직원들 때문일지도.

힘들지만 소소한 즐거움은 있다. 오후에 태양광 발전기가 들어와 밤에 전기장판을 틀 수 있게 됐다. 저녁에는 ‘월요일의 평등토크’ 행사가 처음으로 열렸다. 이야기 나누는 시간에 참가자 한 분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두 딸아이를 키우기 전까지 차별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고, 일을 하면서 엄마로 지내다 보니 그제야 차별이 보이더라고 말했다. 딸아이는 자신과 다르게 대접받는 세상을 간절히 바라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분은 두 딸의 엄마라고 처음 자신을 소개하면서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는데, 이야기의 말미에는 “오늘 이 자리가 상처가 치유되는 자리가 됐다”라고 말했다.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을 하는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이기도 했다. ‘차별’이라 할 때, 차별당해서 억울하다고 울고 화내고 싸우는 사람들만 떠올린다면 그건 차별의 진짜 의미를 ‘반의 반의 반’도 모르는 거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이 아무 말 하지 못하게 말문을 막는 것, 차별의 경험을 말할 언어를 빼앗는 것, 구조적 폭력을 개인적인 문제로 사소하게 만드는 것. 그게 차별이다. 그래서 차별금지법 제정은 차별을 말할 수 있는 공적 자리를 여는 일이다.

[미류] 단식 9일 차(4월19일, 화요일) 
단식투쟁을 시작한 이후 차별금지법 ‘반대’ 피케팅을 하는 분들이 훨씬 많이 거리로 나오고 있다. 낮에는 한 분이 단식농성장 바로 앞까지 들어와 피켓을 들려고 했다. 단식자가 직접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 “다른 데로 가주십사” 부탁드렸다. 막무가내였다. 반은 이죽거리며 반은 성내는 표정을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적진 앞에 홀로 선 ‘용기’에 취한 표정이기도 했다. 용기라니, 무례함일 뿐이다.

사과를 받고 싶었는데, 그에게서는 아니었다. 그는 떠나면 그만이지만 누구든 다시 이런 무례함을 반복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찬성 측과 반대 측이 알아서 합의하라는 사회, ‘폭력’과 ‘불편’을 비교 가능한 것으로 만든 정치인들과 국가로부터 사과받고 싶었다.

4월20일 단식농성장에 박홍근 원내대표(오른쪽 두 번째) 등 더불어민주당 인사들이 방문했다.ⓒ미류 페이스북

[종걸] 낮에 김승섭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와 인터뷰했다. 에너지가 많이 쓰였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지금 해야 할 이야기들을 전하는 것이 너무 중요했다. 미류의 마지막 말이 귀에 맴돈다. “국가가 사과해야 한다.” 국가가 뒷짐 지고 방관하고 있는 이 현실에 대해 사과를 받아야겠다.

[종걸] 단식 10일 차(4월20일, 수요일) 
월요일에 보낸 공개서한의 효과였을까. 민주당의 평등법 대표발의 의원 3명(권인숙·박주민·이상민 의원)과 박홍근 원내대표가 늦은 오후에 농성장을 방문했다. 자신들은 제정 의지가 분명하다고 했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제정하겠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6월이면 법사위원장이 국민의힘 의원으로 바뀔 텐데 민주당은 어떻게 할 작정인가. 교회 핑계는 이번에도 빠지지 않았다. 15년 동안 보수 개신교 주장만 듣고 차별금지법 논의를 미뤄왔다. 그렇게 방치된 혐오로 공격받은 이들의 목소리는 언제쯤 들을 건가.

[미류] 단식 11일 차(4월21일, 목요일) 
점심 무렵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서 찾아오셨다. 유가협 어른들이 다가오는데 역사가 걸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1996년 성신여대 학원 자주화를 위해 단식농성을 하다 목숨을 잃은 권희정 열사 어머님께서 “후회 없이 싸우라”고 격려해주셨다. 저녁에는 3월28일부터 단식투쟁 중인 민주노총 파리바게뜨지회 임종린 지회장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를 촬영했다.

[미류] 단식 12일 차(4월22일, 금요일) 
페미니스트 연구-활동가들의 성명 발표 기자회견이 열렸다. 나보다 한 세대는 앞서 싸우기 시작한 ‘언니’들이다. 1987년의 민주주의가 페미니즘을 배웠다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고 단식까지 하는, 비극인지 희극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은 없었겠지. 차별금지법 제정은 민주주의에 페미니즘을 새기는 일이기도 하다.

4월22일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평등텐트촌을 방문했다.ⓒ차별금지법제정연대 페이스북

[종걸] 단식 16일 차(4월26일, 화요일)
4월21일부터 성소수자 활동가들이 매일 민주당 의원들에게 온라인 공개편지를 전하고 있다. 타리 활동가의 공개편지는 어제 공개됐다. “성소수자들이 존중과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특권이나 보상을 달라는 게 아니에요. 그저 동등한 시민으로 공론장에서 각자가 처한 차별이 무엇인지 꺼내놓고 해법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세요. 차별금지법이 하려는 것이 정확히 그런 것입니다.”

그날 밤 법사위에서는 차별금지법 공청회 계획서가 채택됐다. 일정도, 참고인도 정하지 않은 빈칸투성이 계획서다. 지난해 부산에서 서울까지 30일 동안 평등길 도보 행진을 한 뒤에 민주당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를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이번엔 30일 굶으면 공청회를 열겠다는 말인가.

[종걸] 단식 18일 차(4월28일, 목요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비상시국회의’가 열렸다. 트랜스젠더 1호 연예인이라는 무게를 견디며 활동한 하리수씨는 수년 동안 겪어온 차별의 경험을 말했다. 나는 단식자로서 발언했다. 미류와 함께 18일째 이어가고 있는 이 투쟁이 당당하다는 말을 하는데 울컥했다.

[미류] 단식 19일 차(4월29일, 금요일) 
박지현 민주당 공동비대위원장이 비대위 회의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민주당의 책임을 더욱 강하게 촉구했다. 그를 ‘청년’이나 ‘여성’이 아닌 ‘눈 밝은 정치인’으로 대접할 줄 알 때 민주당도 회생할 텐데.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은 누구든 각자의 자리에서 더 많은 걸 할 수 있게 하는 거점이 되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미류] 단식 20일 차(4월30일, 토요일) 
‘다른 세상을 만드는 4·30 봄바람 문화제’에 참석했다. 문정현 신부님과 평화바람 식구들이 함께하는 ‘봄바람 순례단’은 제주 강정 해군기지에서 출발해 40일간 전국의 투쟁 현장을 찾았다. 40일 순례의 마지막 날 열린 이날 행사엔 전국 곳곳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모였다. 저마다의 싸움과 요구를 가진 사람들이 알록달록 고깔모자를 쓰고 한목소리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힘차게 외쳐주었다. 종걸은 우리의 싸움이 법 제정에 그치지 않고, 이 정치와 사회를 바꾸는 싸움이 될 거라고 힘주어 말했다.

[미류] 단식 21일 차(5월1일, 일요일) 
오전에 회의를 했다. 5월10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농성장을 자진 철거하라는 통보가 왔기 때문이다. 무슨 환경미화 사업도 아니고 국회 안에서 하는 취임식 때문에 국회 밖 농성장 치우라는 건 웬 말인가. ‘검수완박’ 한다고 회기 쪼개며 4월 국회 시간을 허비한 민주당에도 화가 난다. 하지만 우아하게, 단식투쟁을 이어가야지.

[종걸] 단식 22일 차(5월2일, 월요일) 
꿈쩍 않는 국회를 향해 시민들이 동조 단식을 시작했다. 4월28일 열린 시국회의에서 급하게 요청한 건데도 국회 앞에 70여 명이 모였다. 사실 좀 놀랐다. ‘지금 당장’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는 구호는 시민들의 명령인 셈이다. 평등을 ‘추앙’하는 사람들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는다. 시민들을 쉽게 보지 마시라.

5월2일 동조단식 첫 날, 70여명이 넘는 시민들이 평등텐트촌을 찾았다. ⓒ미류 활동가 페이스북

 

기자명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이종걸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사무국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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