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운전하는 철학자〉(시공사, 2022)는 〈모터사이클 필로소피-손으로 생각하기〉(이음, 2010)라는 책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매슈 크로퍼드의 신작이다. 아버지가 물리학자인 그는 십 대 시절의 6년간을 캘리포니아의 어느 공동체에서 보냈다(어떤 공동체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학교에도 다니지 않았던 그는 이 공동체에서 전기기사의 조수 일을 하는 등, 여러 가지 기술을 배웠다. 그중에서도 그는 특히 자동차와 오토바이 정비를 좋아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행위 주체성(agency)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무슨 일이든 내가 결정하고 몸을 쓰는 만큼 나의 주체성(자유)은 커진다. 그러나 다시 나오겠지만, 이 개념은 방금 설명한 것처럼 간단치가 않죠.

그는 스무 살 무렵에 캘리포니아 대학에 들어가 물리학 석사가 되었고, 시카고 대학으로 적을 옮겨 정치철학 박사가 되었다. 이후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워싱턴에 있는 한 싱크탱크의 연구소장으로 발탁되었는데, 그의 표현을 고스란히 옮기면 “봉급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연구소 일은 그와 맞지 않았다. 거기서 해야 하는 일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편들기 위해 “학문적 장식”을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지구온난화에 대한 연구비를 지원하는 석유회사들이 취하는 입장과 일치하는 주장을 만드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지은이는 다섯 달 만에 연구소장 직을 때려치우고 허름한 창고 건물에 오토바이 정비소를 차려요.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기술문명을 피해 월든 호숫가의 숲속에 은거했다면, 매슈 크로퍼드는 도시 한 귀퉁이에 오토바이 정비소를 차리고 잘못 흘러가고 있는 기술문명을 공박한다. 소로가 살던 시대만 해도 아직까지 인간이 손으로 할 수 있는 기술이 우세했다. 하지만 인간이 손을 쓰는 기술은 점점 기계로 대체되고, 대량생산과 소비주의의 확산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직접 만드는 손 기술을 기회비용의 손실로 적대시하죠.

인간이 손으로 직접 할 수 있는 기술에 점점 무능해지는 데는 행위 주체성을 오해한 자유주의(freedomism)의 오류가 있다. 행위 주체성이 주체의 자유를 확대해주는 것은 맞지만, 행위 주체성이 “기계적 현실”에 복종해야 할 경우도 있다. 악기 연주자는 악기에, 정원을 가꾸는 사람은 자연환경에, 러시아어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러시아어 문법에 자신을 복종시켜야 한다. 기계가 고장 나는 것은 인간에게 “나 고쳐봐!”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주의와 한통속인 기술과 시장은 행위 주체성을 소비의 자유와 동일시한다. 이들은 신제품과 진부화(陳腐化·obsolescence:기존 제품의 사용기한을 의도적으로 단축하는 것)를 통해 인간의 손 기술이 더 이상 필요 없도록 만든다. 자본주의에 길든 행위 주체성은 인간이 자신의 생산물 혹은 사물에 복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쓰던 물건이 고장 나면 일회용 라이터를 고치지 않고 버리는 것처럼 쉽게 교체해버리죠.

“몸을 써서 기계를 다루는 일에는 일종의 행위 주체성이 따른다. 하지만 기술이 진보하면서 이런 연관이 줄어들었고, 이 발전은 명백히 자율성을 늘렸다. 하지만 어찌 된 이유인지 자아실현과 자유는 항상 새로운 것을 사게 할 뿐, 절대로 오래된 것을 아껴 쓰게 하지는 않는다.” 인용문 속의 자율성은 기술이 인간에게 선사한 자유를 가리킵니다.

미국은 1990년대에 들어 학교에서 기술 수업을 점점 없애기 시작했다. 그 결과 고등교육까지 받고서도 형광등 하나 제대로 갈아 끼우지 못하는 고학력자들이 수두룩하게 생겨났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 모두가 번듯한 직장을 얻는 것도 아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업이 더 높은 명성을 얻지만, 세계경제 체제에서는 책으로 배운 지식이 널리 퍼지며 전 세계의 경쟁 상대들과 맞서는 처지가 되었다. 지은이는 세계화 시대에는 “다운로드받을 수 없고, 오직 몸으로 살아내야만 하는 지식”, 즉 손으로 하는 기술이 각광받게 될 것이라고 말해요.

〈운전하는 철학자〉에서 지은이는 자동차 ‘운전’을 예찬한다. 그 때문에 이 책을 잘못 읽거나, 삐딱한 시선으로 보게 되면, “지구와 환경을 훼손하는 자동차가 그렇게도 좋아?”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다. 그런 독자는 지은이가 가리키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고 있는 셈이다. 지은이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만든 것은 자율주행 자동차(운전자가 차량을 조작하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이는 자동차)인데, 이 책의 열쇠말도 앞선 책에 나왔던 행위 주체성이군요.

자율주행, 감시 자본주의 완성시킬 것

〈운전하는 철학자〉
매슈 크로퍼드 지음
성원 옮김
시공사 펴냄

자율주행 자동차 사업은 구글과 같은 플랫폼 기업, 실리콘밸리의 기술자 집단, 보험회사들이 결탁하고 거기에 정부가 편승한 거대 시장이다. 이들이 이 사업을 밀어붙이는 명분은 “안전성과 효율성을 강화한다는 약속”이다. 겉보기에 자율주행 자동차는 교통사고와 교통지옥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주는 것 같지만, 그것은 인간의 행위 주체성을 빼앗아간다. 운전자가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때는 주인이지만, 자율주행 자동차 안에서는 그저 승객일 뿐이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자율주행 자동차 안에서 승객은 바깥 경치를 구경하거나,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거나, 사무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지은이는 운전을 통해 시민들은 도덕과 상호 협력을 배운다고 한다. 어떤 도로도 교통법규와 처벌만으로 질서가 유지되지는 않는다. 도로는 개개 운전자들의 상호 협력과 낯선 이들 간의 즉흥적인 우정, “도로 위의 재즈” 같은 행위에 의해 질서와 흐름이 유지된다. 자율주행 자동차는 이런 가능성을 모두 빼앗아가죠.

21세기의 권력이 대중을 통치하는 수단은 억압적이지 않다. 거대 자본과 엘리트 정치가들이 통치하는 수단은 안전과 효율(사회적 비용 절감)이며, 이 둘을 내세우기만 하면 시민들은 그 어떤 관료적·기술적 방침도 환영하거나 거기에 침묵한다. 시민들은 부드러운 권력에 의해 주체성을 빼앗기게 되고, 자율주행 자동차 사업을 하고 싶어 안달인 플랫폼 기업은 궁극의 목표인 빅데이터라는 수확물을 챙긴다. 지은이는 자율주행 자동차와 스마트 도시가 더욱 철통같은 감시 자본주의를 완성시킬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모든 것을 식민화하는 자율주행 자동차 시스템이 구축되고 나면 인간의 행위 주체성 가운데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던 이동권이 위협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델마와 루이스〉의 두 주인공이 엉망진창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동차를 몰고 낭떠러지를 향해 차를 몰아가려고 할 때, 내비게이터는 “거기는 길이 아닙니다”라며 엔진을 멈추어버린다. 이미 그때는 인간에게 운전이 금지되고, 따라서 운전 기술도 사라졌을 것이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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