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도서관에서 DVD를 빌려 본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도서관에서 DVD를 대출해준다고? 요즘도 DVD를 본다고? 놀라다 못해 한심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도서관이 아니었다면 〈잊혀진 꿈의 동굴〉이나 〈로큰롤 인생〉 같은 근사한 영화가 있는 줄 알지도 못했을 터. 최근에 본 영화 〈템플 그랜딘〉도 마찬가지다.

템플 그랜딘은 몇 해 전 올리버 색스의 책 〈화성의 인류학자〉를 통해 처음 알았다. 올리버 색스는 많은 책을 썼고 그 책들이 하나같이 좋지만 나한테 한 권을 꼽으라면 〈화성의 인류학자〉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같은 베스트셀러에 비하면 덜 알려진 책인데, 온몸을 흔드는 투렛증후군 외과의사, 세상이 온통 회색으로 보이는 화가 등 책에 소개된 인물들의 독특한 사연이 인상 깊었다. 특히 자폐증이 있는데도 박사학위를 받고 동물의 고통을 덜어주는 목축·도축 시설을 설계한 템플 그랜딘 이야기는 쉬 잊히지 않았다. 그가 이룬 놀라운 성취도 그러려니와 스스로를 ‘화성의 인류학자’라 표현한 그의 고독이 오래 가슴에 남았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영화를 발견했으니, 반가운 마음에 얼른 빌렸다.

영화는 기숙 고등학교에 입학한 10대 시절부터 대학에 다니면서 가축 시설 개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20대까지 그의 젊은 시절을 담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그가 어머니와 친척, 선생님의 도움 아래 닫힌 문을 열고 세상 앞에 당당히 서는 모습에서 책과는 또 다른 감동이 느껴졌다. 책을 읽으면서 템플이 마음의 평안을 얻을 때 쓰던 ‘압박기계’가 어떤 모양인지 궁금했는데 영화로 확인할 수 있어 반갑기도 했다(상상 이상으로 을씨년스러운 모양이라 좀 놀랐지만). 아무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본 옆지기도 감명을 받아서 며칠이 지난 뒤에도 “그 영화 정말 좋았는데” 하고 되새길 정도였다. 그러니 내가 템플 그랜딘에 대한 책들을 찾아보기 시작한 건 당연한 일.

자폐인의 비범한 동물행동학 연구

〈나의 뇌는 특별하다〉
템플 그랜딘·리처드 파넥 지음
홍한별 옮김
양철북 펴냄

책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의 삶을 그린 어린이 책부터 〈어느 자폐인 이야기〉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 등 그가 직접 쓴 책도 여러 권이었다. 언어 표현에 어려움을 겪는 자폐인이 (공저 형태이긴 하나) 이렇게 많은 책을 쓴 것도 놀랍고, 갈수록 책 수명이 짧아지는 현실에서 거의 30년 전에 번역된 그의 책이 절판되지 않고 계속 독자를 만나는 것도 놀랍다. 기분 좋은 놀람이 독서열로 이어져 꽤 많은 책을 읽었다. 그중 몇 권을 소개한다.

사이 몽고메리의 〈템플 그랜든〉은 “타인에게 친절하라. 그대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지금 그들의 삶에서 아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플라톤의 제사(題詞)에 끌려 읽기 시작했다. 〈문어의 영혼〉으로 유명한 자연주의 작가 사이 몽고메리가 템플과 주위 사람들을 취재하고 쓴 전기인데, 짧은 분량에 평이한 문장으로 그의 삶과 성취부터 ‘자폐 범주성 장애아를 위한 조언’까지 알차게 정리해 남녀노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알토란 같은 책이다. 특히 책 말미에 실린 “배우라,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라, 문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으라…”는 ‘템플의 조언’은 자폐인만이 아니라 세상을 피해 자기 안으로만 파고드는 이들에게 유용한 팁이다.

템플 그랜딘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았다면 이제는 그의 육성을 직접 들어볼 차례. 작년에 개정 번역판이 나온 〈동물과의 대화〉는 동물행동학 전문가인 템플이 40여 년간 동물을 연구·관찰한 결과를 과학 저술가 캐서린 존슨과 함께 집대성한 책이다. 동물의 심리와 행동을 섬세하게 파고들어 ‘동물의 바이블’로 불리기도 하는데, 동물만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도 함께 제시해 자폐증에 대한 이해까지 높인 특별한 안내서다.

템플은 자신이 동물행동학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자폐증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자폐인은 “고통을 참는 것, 언어가 미발달한 것, 미세감각에 예민한 것” 등 여러 점에서 동물과 유사하며, 보통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동물의 비범한 재능을 볼 수 있다. 그가 가축 시설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동물의 고통을 덜어주는 도축 시설을 설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자폐적 능력 덕분이다. 동물을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도축 시설을 만드느냐는 비난에 대해 그는, 모든 사람이 채식을 할 수는 없으므로 동물의 공포와 고통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답한다. 이 또한 도덕적 판단보다 객관적 세부 사실을 파악하는 데 집중하는 자폐적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그의 후기작인 〈나의 뇌는 특별하다〉는 자폐인의 이런 사고방식을 MRI라는 최신 뇌과학 기술을 이용해 분석한 노작이다. 사실 〈동물과의 대화〉는 동물에 대한 이해는 높이지만 뇌에 대한 설명엔 문제가 있다. 인간의 뇌가 파충류·포유류·영장류의 뇌로 구성되어 있다는 삼두뇌 이론을 취하는데 이는 현대 뇌과학에서 오류로 확인된 낡은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뇌는 특별하다〉는 다르다. 템플 그랜딘은 수십 년간 MRI로 자신의 뇌를 스캔해 분석하면서 이 낡은 이데올로기를 벗어난다. 그는 자신을 연구 재료로 삼아, 자폐증은 심리가 아닌 뇌의 문제이며 뇌도 근육처럼 어떤 부분을 자주 사용하느냐에 따라 자라고 변한다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폐증, ADHD, 아스퍼거증후군 같은 이름표보다 중요한 것은 개별적 증상이며 개인에게 맞춰진 치료법이라고 역설한다.

이른바 정상인의 뇌가 과거 경험에 의거한 예측을 하기에 ‘인지 편향’을 범한다면, 감정 없이 세부 사실을 보는 자폐인은 ‘국소 편향’을 범한다. 자폐인만이 아니라 비자폐인도 편향된 사고를 하며 알고 보면 이 편향이 우리를 살리는 힘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부족함이 특별함이고 우린 모두 특별하면서 부족한 존재란 건데, 템플 그랜딘이란 놀라운 선생님의 이 가르침을 알면, 고기는 덜 먹고, 잘난 척은 덜 하고, 정상이란 말은 감히 쓸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기자명 김이경(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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