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에서 10대의 선자를 연기한 김민하(위) ⓒApple TV 제공

“(〈파친코〉 소설을 접한 것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이전, 〈기생충〉 이전, 〈오징어 게임〉 이전이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시리즈 형식으로 본 적이 없다.” 드라마 〈파친코〉의 테레사 강 로우 총괄프로듀서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장르는 다르지만 세 작품 모두 흥행에 성공했고 아시아계 배우가 전면에 등장한다는 점이 같다. 5년 전만 해도 굉장히 낯선 일이었다. 전쟁 이야기를 제외하고 할리우드가 아시아 역사에 관심을 보인 적은 거의 없었다. 애플TV플러스가 공개한 〈파친코〉는 단어 자체로도 도박을 의미하지만 처음 드라마 제작을 고민했던 이들에게도 도박과 같은 일이었다.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2017년, 4대에 걸친 한국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파친코〉를 접하고 깊은 인상을 받은 강 로우 총괄프로듀서는 이 작품이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웠다. 인기 미국 드라마 〈더 킬링〉 〈더 테러〉의 작가 수 휴에게 각본 및 총괄 제작(쇼러너)을 제안하며, 지금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아시아계 미국인 작가가 높은 수준의 쇼러너 위치에 오르기까지 7~10년은 더 걸릴 거라고 말했다. 둘 다 한국계 미국인이다. 수 휴는 원작을 접하는 것도 꺼렸다. 20세기 한국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고통의 트라우마를 재현하고 싶지 않았다. 책을 읽는 동안 놀라운 회복력을 가진 등장인물을 접하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내 어머니와 할머니였다.”

2018년, 미국에서 개봉 3주 만에 흥행수입 1억 달러를 넘어선 로맨틱 코미디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화제를 일으킬 당시 존 추 감독은 “단지 영화 한 편이 아니라 하나의 움직임이다”라고 말했다. 아시아계 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의 티켓 파워가 입증된 사건이었다. 2022년 〈파친코〉도 마찬가지다. 오랜 할리우드의 통념을 깼고 그 중심에 한국계 미국인 창작자들이 있다. 70여 년의 이야기를 다루는 데다 3개 언어로 쓰였고 슈퍼히어로나 액션 신도 없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아시아계 배우이고 1000억원 규모의 방대한 제작비도 화제가 됐다. 제작이 확정되기 전 수 휴 각본가 겸 총괄프로듀서는 여러 콘텐츠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었는데, 특이한 현상을 발견했다. 그 관계자들이 설명회가 시작된 지 30분쯤 지나면 눈물을 쏟더라는 것이다. 제작진은 〈파친코〉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와닿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확신했다. 관객도, 할리우드도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다. 그렇게 만들어진 〈파친코〉가 3월25일부터 매주 한 편씩 총 8편을 선보였다.

1~3화를 한꺼번에 공개한 지 나흘 만에 국내 OTT 통합 랭킹 차트 키노라이츠에서 1위를 기록했다. 미국의 영화 웹사이트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100%를 받았고 “눈부신 한국 서사시(BBC)” “쉽게 볼 수 없었던 보석(〈포브스〉)” “원작 소설의 촘촘함과 영상물 특유의 장점이 완벽하게 결합된 가족 대서사(〈롤링스톤〉)” 등의 찬사가 이어졌다. 〈뉴욕타임스〉는 “한국계 미국인 스타일의 한국 드라마”라고 요약했다. 그 표현대로 〈파친코〉는 한국계 미국인 1.5~2세대 창작자들이 한국의 역사를 소재로 만든 미국 드라마다.

선자의 손자인 솔로몬을 연기한 진하. ⓒApple TV 제공

“넌 절대 그들이 될 수 없어”

〈파친코〉의 선전을 지켜보는 재미 한인 창작자의 감회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한인 디아스포라를 소재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온 영화 〈헤로니모〉의 전후석 감독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미국의 주요 스트리밍 플랫폼 기업인 애플TV플러스가 한인들이 출연하고 한국말로 진행되며 한국 근대사를 다룬 이야기를 야심작으로 내세웠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가 알기로 1903년 한인들이 하와이로 첫 해외 이주한 이후, 재미 한인들이 미국의 대규모 자본을 통해 미국 주류에서 한국의 역사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를 펼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 감독은 콘텐츠 업계의 여러 재미 한인들의 숨은 노력도 있지만 그것을 믿고 투자와 배급을 진행한 애플TV플러스의 결정을 보며 하나의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코리안(아시안) 아메리칸으로서 늘 미국 주류에서 변방인이던 우리가 우리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고, 그것이 상업적으로 유효한 결정이라고 애플 내부에서 판단했다. 한국 콘텐츠의 최근 인기와 반향을 보여주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원작 소설 〈파친코〉는 일본의 재일동포 ‘자이니치’의 굴곡진 삶을 보여주는 ‘디아스포라 문학’이다. 이민진 작가는 1989년 대학 3학년 때 예일대 초청 강연에서 ‘식민지 시대에 일본으로 이민 온 조선계 주민들’을 일컫는 ‘자이니치’ 개념을 처음 접했다. 2007년 일본에 가서는 조선인(자이니치) 수십 명과 인터뷰를 해 다시 쓰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소설은 주류에 속하지 못하고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방인의 삶을 그려낸다. 이들의 정체성을 요약하는 한마디는 소설 속 대사에 있다. “자이니치는 영원한 외국인이고 결코 일본인이 될 수 없어.”

지역을 떠나 이민자의 정체성을 요약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민진 작가 스스로도 인종차별, 식민주의, 외국인 혐오에 관한 한 〈파친코〉야말로 자전적 소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드라마에도 원작과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넌 절대 그들이 될 수 없어. 그렇게 비싼 옷을 입고 좋은 학위를 따고, 그들은 네가 기회가 있다고 착각할 딱 그만큼만 문을 열어놓을 거야. 넘어가지 마.”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선자의 손자 솔로몬이 1989년 현재 시점에서 듣는 말이다. 미국 내에서 ‘모범 소수자’라 불리는 아시아계의 현실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원작과 드라마 〈파친코〉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를 보여주는 인물이 솔로몬이다. 1915년 선자의 탄생에서 시작해 시간순으로 세대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원작과 달리 드라마는 1989년, 미국에서 유학한 야심찬 은행가 솔로몬을 처음부터 선자와 교차해 보여준다. 러닝타임 내내 교차 편집되는 솔로몬의 분량은 원작보다 크게 늘었다. 수 휴 각본가 겸 총괄프로듀서는 미국 공영방송 NPR과의 인터뷰에서 “(원작처럼)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솔로몬 세대를 만나지 않으면 더 큰 걸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거라고 느꼈다. (앞선) 세대의 희생에 대해서, 다음 세대의 부담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 말이다”라고 말했다. 이민 1세대와 이후 세대가 소통하는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밝히기도 했다.

제작진 대부분이 〈파친코〉에 개인적인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 드라마를 감독한 저스틴 전, 코고나다 감독 역시 한국계 미국인이다. 저스틴 전 감독은 〈푸른 호수〉를 통해 미국계 한국 입양인을 소재로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보여주었다. 〈콜럼버스〉 〈애프터 양〉을 만든 코고나다 감독의 어머니는 탈북의 경험이 있고 아버지는 일본에서 자란 이민자였다. 선자의 둘째 아들로 파친코를 운영하는 솔로몬 역을 맡은 박소희 배우는 실제로 재일 한국인 3세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재미 한인 1.5~2세대가 한국의 역사를 다뤄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한국인이 만들면 (역사적으로) 다소 기울었을 법한 이야기인데 시선이나 관점이 다르고 낯설다. 경계인의 시선에서 봤을 때 보이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다.” 캐스팅도 달랐다. 미국에서 아시아계 배우들을 섭외할 때, 중국이든 싱가포르든 국적에 상관없이 ‘아시아계’에게 배역을 맡기는데 〈파친코〉는 실제 그 역할에 맞는 국적과 출신의 배우를 섭외했다. 전후석 감독은 “그런 세세한 디테일에서 작품을 대하는 진정성이 나타났고 그것은 아마 제작진과 감독 등이 모두 한인이기에, 백인 등은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을 캐치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파친코〉의 코고나다 감독, 테레사 강 로우 총괄프로듀서, 수 휴 각본가 겸 총괄프로듀서, 마이클 엘렌버그 총괄프로듀서. ⓒApple TV 제공

변방인·경계인의 보편성과 그 안의 휴머니즘

20세기 변방의 한 국가, 그 이민자의 역사를 다루지만 보편적인 시선도 담겨 있다. 수 휴 총괄프로듀서 역시 한국이나 일본, 미국을 넘어 글로벌한 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비록 한국인 혹은 이민자 가정이 아닐지라도 더 나은 기회를 찾아 고향을 떠나야 했던 경험은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전후석 감독은 “한반도라는 본국과 미국이라는 거주 국가에서 늘 마이너리티였던 재미 한인들이 내포한 디아스포라적 경험, 즉 이민자로서, 소수자로서, 변방인·경계인으로 겪었던 어려움의 보편성과 그 안의 휴머니즘이 결국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건너와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선자에게 동서 경희는 말한다. “괜찮아지진 않아. 그래도 참는 법을 배우게 될 거야.” 70여 년간 고된 삶을 살아간 선자가 손자에게 건네는 한마디도 인상적이다. “내가 선택한 기다.”

이민진 작가는 자주 ‘왜 한국인에 대해서 쓰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때마다 대답한다. 안 쓸 이유가 없으니까. 전후석 감독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여태껏 굳이 한국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그것에 관심을 갖고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이민진 작가는 하버드대 강연에서 말했다. “인생에서 제 어젠다는 여러분 모두를 한국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제가 여러분을 모두 한국인으로 만들 수 있다면 여러분 모두가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파친코〉가 제작되는 동안 〈기생충〉 〈미나리〉가 개봉됐다. 드라마의 촬영 시기는 코로나19의 ‘아시안 혐오를 멈춰주세요(#StopAsianHate)’ 운동을 관통한다. 보통 사람들의 ‘큰 이야기’를 좋아하는 수 휴 총괄프로듀서는 말했다. “〈기생충〉 〈오징어 게임〉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사례처럼 문이 무너진 것을 축하하고 싶지만 그것은 긴 여정이다. 몇 년 후 질문에 대한 답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거대한 파도의 시작일까, 아니면 그저 운이 좋은 사람들 중 하나일까?”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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