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류학자 캐슬린 메리 드루베이커의 연구가 김 양식 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Wikipedia

조선 효종 때의 일이다.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왔을 무렵 왕은 신하들을 불러 백성의 어려움에 대해 물었다. 이때 영의정 이경여가 말했다. “신이 남쪽 지방에 갔을 적에 들으니 나라에 바치는 해의(海衣) 1첩의 값이 목면 20필이나 간다고 하였습니다.” 해의는 김을 말한다. 당시 성인 남성 양민이 군역 대신 납부하던 군포가 1년에 2필 정도였으니, 김 1첩이 성인 남성 열 명의 군포와 맞먹을 만큼 비싸고 귀했다는 이야기다.

그런 김이 한국인의 밥상에 일상적으로 올라오는 반찬이 되기까지 생산량을 늘리고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다. 특히 20세기 초 경력단절과 싸우면서도 홍조류에 대한 연구를 놓지 않았던 영국의 과학자 캐슬린 메리 드루베이커는 김 양식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사람이다.

캐슬린은 1901년 11월6일 랭커셔에서 농기계 제조업에 종사하던 월터와 오거스타 부부의 맏딸로 태어났다. 캐슬린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은 솔즈베리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그는 워즈워스 학교에 다니며 자연과학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캐슬린은 상급학교에 진학해 더 공부하고 싶었다. 특히 캐슬린은 학자가 되어 식물을 연구하기를 꿈꾸었지만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넘어야 할 난관이 많았다. 집안이 여유가 없었을 뿐더러 그의 부모는 물론 동생들도 과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학에 진학해 식물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야심은 가족에게 이해받지 못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자력으로 해나가야 했다.

그는 치열한 노력 끝에 주 장학금을 손에 넣어 맨체스터 대학에 진학했다. 바라던 대로 식물학을 배우게 된 캐슬린은 밤잠을 자는 것도 잊고 공부에 몰두했다. 1922년, 캐슬린은 여학생으로서는 최초로 맨체스터 대학의 1등급 우등 졸업생이 되었고 애슈번 홀 펠로십을 받았다. 그는 졸업하자마자 식물학과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한편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부지런히 공부한 캐슬린은 바로 다음 해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 무렵 캐슬린의 관심사는 홍조류에 쏠려 있었다. 1925년 커먼웰스 펠로십을 받은 캐슬린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2년 동안 머무르며 홍조류 샘플을 채집하고 연구했다. 하지만 맨체스터로 돌아온 캐슬린은 연구를 계속할 수 없었다. 그가 훗날 맨체스터 대학 교수가 되는 헨리 베이커 박사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많은 학술기관과 대학들은 결혼한 여성을 채용하지 않았다. 캐슬린과 같이 본격적으로 성과를 내고 있는 연구원이라 하더라도 일단 결혼을 하면 해고당했다. 하지만 그는 학자로서 홍조류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어떻게든 맨체스터 대학에 적을 두고 남아야 했다. 다행히도 이전에 받았던 애슈번 홀 펠로십이 도움이 되었다. 그는 보수를 받지 않고 연구하는 명예 연구원이 되어 대학 한구석에 작은 연구 공간을 얻었다. 캐슬린은 때때로 식물학과에서 강의를 하며 자신의 연구를 계속해나갔다.

하지만 보수도 받지 않고 교수도 되지 못한 상태로 연구비를 충당하는 것은 무리였다. 조류를 연구하는 데 꼭 필요한 조수 탱크를 새로 살 돈이 없어 직접 만들기도 했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캐슬린은 홍조류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지,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 어떻게 번식하는지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1924년부터 1947년까지 주로 홍조류에 대한 논문 47편과 여러 권의 책을 발표했다.

대학에서 보수를 받지 못한 채 연구를 진행해야 하는 캐슬린은 세계 여러 곳으로 탐사를 다니며 샘플을 채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그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맨체스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영국 서부 해안지방에서 자라는 식용 해조류인 포르피라(Porphyra umbilicalis)였다. 포르피라는 전통적인 웨일스 음식인 레이버브레드(김빵)의 주재료였다. 웨일스 사람들은 이것을 페이스트 형태로 빵에 발라 먹거나, 아예 빵 반죽에 섞어 함께 굽기도 했다. 베이컨과 함께 튀겨서 먹기도 했다. 캐슬린은 이 맛있고 영양가 많은 홍조류의 생태에 주목했다.

심한 태풍 이후 그의 연구가 일본에 소개돼

이때까지만 해도 해조류의 번식이나 한살이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지구 반대편인 한국과 일본에서는 이미 자라난 김을 나무나 대나무 발, 혹은 덤불을 이용해 양식하고 있었지만 사람이 인위적으로 종자를 뿌려 새로 키워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수확을 늘릴 수도, 당장 올해의 수확량을 예측하기도 어려웠다. 캐슬린이 살고 있던 영국 서부 웨일스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캐슬린은 포르피라의 한살이에 대해 연구했다. 포르피라도 번식을 했지만, 이들은 2배체(염색체 한 쌍을 가진 개체)인 과포자(분열한 수정란이 만드는 포자)를 만들 뿐이었다. 그렇다면 포르피라를 만들어내는 각포자(조개껍데기를 뚫고 자라는 포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연구 과정에서 캐슬린은 포르피라의 주변에서 흔히 발견되는, 굴이나 맛조개에 파고들어가는 작고 분홍빛이 도는 곰팡이 같은 형태의 조류에 주목했다. 콘코셀리스라고 불리는 이 조류는 포르피라와 서로 다른 종처럼 여겨졌지만, 그는 이 작은 조류가 포르피라의 2배체인 것을 발견했다. 포르피라가 만들어내는 과포자가 굴이나 조개껍데기 위에서 발아하면 콘코셀리스가 되고, 다시 콘코셀리스가 만들어내는 각포자가 포르피라로 자라는 것이었다.

캐슬린은 1949년 〈네이처〉에 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952년에는 영국 조류학회의 공동 창립자이자 초대 회장이 되기도 했다. 195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캐슬린은 맨체스터 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하며 2700종 이상의 조류 샘플을 채집하여 분류했다. 평생에 걸친 그의 노력과 연구 성과는 학계에서 찬사와 인정을 받았지만,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거나 위대한 상을 받지 못한 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 연구는 지구 반대편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1948년 심한 태풍이 일본 연안을 강타하면서 김 양식장들이 파괴되고 해안이 오염되어 일본의 김 양식업은 초토화되고 말았다. 이때 캐슬린과 친분이 있던 세가와 소키치 규슈 대학 교수가 1949년 발표된 캐슬린의 논문을 일본에 소개했다. 이를 토대로 일본 학자들은 1953년 김의 인공 파종 기술을 개발했다. 이후 이 기술은 일본은 물론 한국에도 전파되어 김 양식 산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구마모토의 우토시에서는 김 양식으로 유명한 아리아케해가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스미요시 신사 안에 기념비를 세워 캐슬린 메리 드루베이커의 업적을 기렸다.

기자명 전혜진 (SF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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