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1일 국회 앞에서 더불어민주당에 ‘검수완박 법안 당론 채택’을 요구하는 촛불개혁 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시사IN 윤무영

“개딸! 개딸! 개딸!” 사방에서 연호가 이어졌다. 백곰 코스튬을 입고 무대 위에 오른 20대 ‘개딸’이 마이크를 잡고 발언했다. “정말 긴긴 겨울을 보내고 짧은 봄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다시 우리를 차갑고 외로운 겨울로 던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봄이 끝나면 겨울이 오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뜨거운 여름입니다. 2030 자매들아, 우리 끝까지 함께하자!” 4월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지하철역 앞에서 열 번째 촛불개혁 문화제가 열렸다. 다음 날 열릴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을 당론으로 채택하도록 요구하는 집회였다.

‘개딸’은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가 극중 ‘성격이 드센 딸’을 부르던 애칭이다. 대선 패배 이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을 위로하고 응원하기 위해 2030 여성 지지자들이 자신을 ‘개딸’이라고 부르며 온라인상의 지지를 이어갔다. 이재명 고문 역시 ‘재명파파’를 자처하며 ‘개딸’들과 SNS 메시지를 통해 직접 소통했다.

이재명 전 후보가 ‘개딸’ 지지자와 직접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다. ⓒSNS 갈무리

‘개딸’이 ‘현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이들이 민주당에 대거 입당하면서다. 대선 이후 한 달 동안 민주당에 14만4000여 명이 신규 당원으로 가입했다. 이 중 36%에 이르는 4만여 명이 2030 여성이었다. 신규 당원 세 명 중 한 명이다. 입당한 청년 여성 당원들은 의원들에게 1004원, 2030원의 소액 후원금을 내며 검찰개혁, 언론개혁, 민주당 개혁을 요구했다. 친이재명계 박홍근 의원을 원내대표로 만들고 ‘검수완박’ 법안을 당론으로 채택하는 데도 주도적인 목소리를 냈다.

어떤 이들은 ‘개딸’을 재기발랄한 신진 세력으로 보기도 하지만 일각에서는 팬덤 정치의 아류로 평가한다. 어쨌든 이전에는 없던 정치적 집단임이 분명한 이 ‘개딸’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당사자들에게 직접 ‘개딸’의 정체를 묻기 위해, 4월12일 〈시사IN〉 사무실에서 파란색의 ‘민주당 대선룩’을 입은 네 명의 ‘개딸’들을 만났다.

이재명 고문 혹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시사IN 조남진

박선영(가명·28):경선 땐 이낙연 후보를 지지했다. 이재명 후보가 대선후보가 된 후에도 투표할 명분을 못 찾았다. 여성으로서 지지를 망설이게 되는 벽이 있었다. 그런데 3차 대선 토론에서 이 후보가 민주당의 권력형 성범죄에 대해 진정성 있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그 벽을 넘었다. 이재명 후보가 정치 경험 하나 없는 여성인 박지현 위원장을 존중해주는 모습을 보면서도 ‘이재명의 민주당은 달라지겠구나’ 하는 기대가 생겼다. 마음속 응어리가 풀렸다.

정주현(가명·31):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스스로의 정체성을 페미니스트로 규정했고 여성 의제에 집중해왔다. 그래서 대선 초반엔 정말 우울했다. 윤석열 후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말할 것도 없고 이재명 후보도 ‘광기의 페미니즘을 멈추라’는 글을 자신의 SNS에 공유했다. 그런데 이재명 후보가 애초 출연을 망설이던 유튜브 채널 ‘닷페이스’에 출연하고 박지현 위원장이 합류하는 등 변화가 시작됐다. 국민의힘은 계속해서 ‘여성을 죽이는’ 쪽으로 가고 있었지만 이재명 후보는 다른 길을 선택한 거다.

정하린(27):나는 성폭행 피해 생존자이자 여성운동가다. 이번 선거에서 페미니즘이 판단의 최우선 기준이었다. 이재명 후보가 경기도지사 시절 전국 최초로 디지털성범죄 원스톱지원센터를 설립하면서 박지현 위원장과 인연을 맺었다는 걸 알게 됐고, 여성 의제 면에서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그전까지는 ‘겨자재명(울며 겨자 먹기로 이재명 뽑는다)’이었는데 이런 모습들을 통해 ‘절박재명’이 됐다.

진현호(33):나도 초반에는 냉소적으로 이재명 후보를 봤다. 그런데 3월4일 이재명 후보가 ‘여성시대(여성 회원 80만명이 넘는 여초 인터넷 커뮤니티 카페·여시)’를 언급하며 여성 공약을 설명하는 영상을 올렸다. 여성 커뮤니티는 외부에서 폄하나 비하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제일 공격을 많이 받아온 ‘여시’를 언급하며 여성들에게 다가왔다.

여성 의제가 중요했다면 심상정 후보를 지지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정하린:심상정 의원을 응원한다. 그런데 심 의원이 지향하는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페미니즘은 나와 맞지 않는다. 정의당이 국민의힘에 대항할 만큼 힘이 있는 정당이 아닌 것도 이유다.

진현호:양당 체제가 굳건한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정의당은 처음부터 나에게 대안이 되지 않았다. 소수당을 지지해 사표를 만드는 것보다는 정책 실현이 가능한 당을 지지하고 그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시사IN 조남진

정주현:내 별명이 ‘사표(死票) 전문가’다. 늘 소신으로 소수당을 찍어왔다. 그런데 이번엔 국민의힘 후보가 여성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신투표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덕에 여성 유권자로서 효능감을 느끼는 경험을 했다. 나 같은 2030 여성들이 ‘세력’으로 민주당에 입당했으니 앞으로도 민주당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을 거라고 기대한다.

선거 이후 민주당 안에서 정치적 효능감을 느낀 경험이 있었나?

정주현:우리가 박홍근 의원을 원내대표로 만들었다. 검수완박 법안이 당론에 채택되는 데도 우리 힘이 컸다고 본다.

진현호:지역 의원 사무실이나 지역 당사에 꽃을 보내고 전화하고 사무실도 찾아갔다. 처음엔 ‘(개딸들) 너희 진짜 있네’ 이런 반응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개딸들이 요구하는) 검찰개혁 안 되면 후폭풍 어떻게 감당하지? 두렵다’ 이런 반응까지 나온다. 대단한 일이다.

박선영:여성 유권자들이 결집이 안 됐던 이유가 온라인 여초 커뮤니티별로 입장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르고, 페미니즘에 대한 관점도 조금씩 다르고. 그런데 이번 선거를 거치면서 이재명이라는 인물로 한 울타리가 만들어졌다. 다 같이 원내대표를 친이재명계 의원으로 뽑아야 한다고 의원들에게 문자 보내고 소액 후원을 했다. 그렇게 해서 진짜 우리가 원하는 게 이루어졌다.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게 되니까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여성 커뮤니티들을 묶는 한 울타리가 만들어졌다?

진현호:여초 커뮤니티 간 갈등이 있다. 예를 들어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커뮤니티가 있는가 하면 그런 ‘남돌’ 팬덤 문화를 비판하는 커뮤니티가 있다. 서로 싸운다.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인데 그런 식으로 갈등이 오래 이어져왔다. 이번 대선에서 이재명을 지지하는 마음으로 서로에 대한 담벼락이 허물어졌다. ‘너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니, 한번 이야기 들어보자’ 하면서.

‘개딸’이라는 용어를 불편해하는 목소리도 있다.

ⓒ시사IN 조남진

진현호:나는 ‘개딸’이 굉장히 똑똑한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여성들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된다. 그런데 ‘딸’이라는 단어를 통해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보호하고 함부로 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물론 이 단어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딸이라는 단어 자체는 중립적이다. 여성을 가리키는 단어를 부정 프레임으로만 해석한다면 결국 우리가 쓸 수 있는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는 남지 않을 거다.

정주현:딸이 가치중립적 단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가족관계 안에서 아버지와 딸이 동등한 위치라고 말하긴 어렵다. 게다가 ‘개딸’로 불리는 여성들도 스스로 장녀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 같다.

정하린:이전에 젊은 여성들은 ‘이대녀’ ‘꼴페미’ 같은 단어로 불렸다. ‘개딸’은 2030 여성들이 이재명과 페미니즘을 지키기 위해 ‘개같이 싸우는’ 이미지로 자발적으로 택한 이름이다. 그래서 나는 이 단어를 정말 좋아했다. 그런데 지금은 ‘진보의 치어리더’를 뜻하는 멸칭이 됐다고 본다. 다른 세대의 지지자들도 2030 여성들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한다고 느낀다. 4월9일에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촛불집회를 했는데 ‘냥아들(이재명을 지지하는 2030 남성 지지자)’에게는 ‘개념 발언 독창’을 하라고 하고 ‘개딸’들에게는 소복 복장쇼를 하라고 하더라. ‘재명이네마을’ 카페에 가면 ‘개딸들한테 에너지 얻고 싶다’는 글도 수시로 올라온다. 애교나 아양을 떠는 천방지축 귀여운 딸로 소비되는 것은, 페미니즘 때문에 이재명을 지지한 여성 당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박선영:‘개딸’이란 단어가 오염됐다고 많이들 말한다. 중요한 건 우리가 이미 ‘개딸’로 불리고 있다는 거다. 나중에 이 시기를 되돌아보면 2030 여성들은 ‘개딸’로 기억될 거다. 그런데 외부에서 비하하는 의미를 덧씌웠다고 이 단어를 여기서 폐기해버리면 결국 ‘개딸’은 부정적인 단어로만 남을 거다. 긍정적으로 이 단어의 의미를 되돌려놓아야 우리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고 본다.

‘개딸’이 또 다른 ‘맹목적 팬덤 정치’는 아닌가 경계하는 시선도 있는데.

박선영:이준석 대표를 지지했던 ‘이대남’들을 보고 ‘팬덤 정치’라고 표현하나? 여성 유권자들의 정치행위에 대해서만 극성, 빠순이, 팬덤… 유독 이런 표현을 쓴다. 이렇게 성차별적으로 바라보는 게 문제라고 먼저 지적하고 싶다. ‘정치’라는 것을 2030 세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평소에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패러디를 하고 밈(meme)을 만들면서 노는 거다. 그 문화 안에 이재명이라는 인물이 추가된 거다.

정주현:굿즈, 팬아트, 팬페이지 같은 걸 만드는 걸 보고 ‘팬덤’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도 중도층일 때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팬덤 문화를 정말 싫어했다. 지하철역에 생일 축하 광고 붙이고 ‘이니’라고 부르고 아이돌 응원봉 만들고…. ‘정치인은 나의 대리인인데 저렇게까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강성 지지자가 되고 나니까 이해가 된다. 지지자들의 내부 동력인 거다. 몇 년 동안, 아주 길게 보면서 정치인을 응원해야 한다. 지지자들이 커뮤니티 안에서 소통하려면 재미있는 동력이 필요하다. 물론 이런 문화를 중도층 입장에서는 불편하게 볼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이전의 정치인 팬덤 문화에서 반면교사 삼을 사례가 많다. 우리 스스로 주의하고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2030 여성들이 지지하는 민주당은 앞으로 어떤 의제를 가져와야 할까?

ⓒ시사IN 조남진

정하린:성범죄 피해 여성들을 지원하는 정책들. 안 하면 후려칠 거다. ‘문자 총공’처럼 의원들을 압박하면서.

정주현:야당으로서 모든 힘과 노력을 다해 윤석열 정부가 하려는 걸 막아주길 바란다. 한 편에선 여성 청년들이 주장하는 게 결국 검찰개혁처럼 기존 의제의 반복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없애려고 하는 약자들을 위한 사회보호망, 이걸 지키기 위해 우선 검찰개혁부터 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이해해주면 좋겠다.

박선영:같은 생각이다. 민주당에 바라는 의제는 너무 많다. 동물권, 포괄적 차별금지법, 기후위기… 논의조차 안 되고 있다. 그런데 현 대통령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검찰개혁은 시간이 촉박한 문제라 우선시될 수밖에 없다. 이후엔 다른 진보 의제들을 민주당이 챙겨야 한다.

민주당이 이제껏 172석을 가진 집권 여당이었는데도 하지 못했던 것들을 앞으론 할 수 있을까?

박선영:때려서라도 시켜야 한다(웃음). 민주당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가 어떤 압박이라도 할 거다. 문자하고 사무실 찾아가고 압박하고. 그러면 민주당은 듣고 바뀐다. 그게 된다는 걸 이번에 경험했고.

진현호:민주당이 해야 할 일을 안 하면 더 강하게 비판할 거다. 다만 ‘민주당은 할 수 있다’라는 긍정적인 응원으로 변화를 이끌고 싶다. 개딸들이 인물만 보는 팬덤 정치를 할까 봐 걱정하는데 우리는 그 인물이 대변했던 신념과 가치, 제도들이 민주당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할 거다.

‘개딸’들이 꿈꾸는 사회가 궁금하다.

정하린:혐오가 돈이 되지 않는 사회를 바란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혐오 발언을 끊임없이 하고 그게 주목받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혐오로 돈 버는 유튜버들도 사라져야 한다.

진현호:혐오가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너무너무 간절하다. 혐오가 상식이 되면 우리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제도적으로든 법적으로든 대책이 필요하다.

박선영:한 정치인이 ‘광장은 빨리 끓고 제도권은 느리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결국 두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건 광장의 경험이 있는 청년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청년들이 정치권에 꾸준히 유입돼서 우리 삶을 반영한 정치가 펼쳐졌으면 한다. 지금의 정치권이 달라져야 가능한 일이다.

정주현:청년들이 죽음을 덜 생각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병원에 안 가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지 대부분의 청년들이 우울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장 일이 안 풀리면 죽음밖에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 중요한 문제인데 이걸 말하는 정치인이 없다. 내가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게 된 것도 기본소득 때문이었다. 내 삶이 벼랑까지 갔을 때 떨어져 죽지는 않게 하는 정책들이 있어서 지지한 거다. 그런데 그것과 완전 반대되는, 최저임금의 취지를 부정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 내가 바라는 건, 덜 죽고 덜 우울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