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 아이들이 에누마의 ‘킷킷스쿨’이 설치된 태블릿으로 공부하고 있다. ⓒAP Photo

‘스컬리 효과(Scully Effect)’라는 말이 있다. 1990년대 높은 인기를 얻었던 미국의 TV 드라마 〈엑스파일〉의 여자 주인공 데이나 스컬리를 가리킨다. 스컬리는 〈엑스파일〉에서 물리학과 법의학을 공부한 박사이자 FBI 요원이다. 스컬리를 연기했던 배우 질리언 앤더슨이 “많은 여성들이 나에게 당신이 연기한 스컬리 덕분에 과학을 전공하게 되었다고 말했고, 우린 이걸 스컬리 효과라고 부르기로 했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비영리단체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 젠더연구소’에서 2018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드라마 〈엑스파일〉을 본 여성의 50%가 실제로 이공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현재 이공계에서 일하는 여성의 63%가 스컬리를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답했다.

최근 스타트업 생태계에도 스컬리가 등장하고 있다. 스타트업 전문 미디어 〈스타트업레시피〉가 뽑은 2021년 가장 많은 투자금을 받은 스타트업 톱 5를 보면, 1조원 투자를 받은 ‘야놀자’에 이어 2위는 식품 전문 이커머스 ‘마켓컬리’였다. 마켓컬리는 작년 한 해에만 투자금 4754억원을 유치해, 누적 투자금이 약 9000억원에 달했다. 신선식품을 소량만 주문해도 다음 날 아침까지 배송해주는 서비스로 마켓컬리는 내로라하는 오프라인 기반 유통 대기업들의 전략을 한 번에 바꿔버렸다. 마켓컬리 김슬아 대표의 행보가 지금 막 사회에 발을 내디딘 1020 여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스컬리 효과만큼 커질지도 모른다.

이런 김슬아 대표도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창업 초기에 충격적인 상황을 경험했다고 고백했다. 한 투자자가 김 대표의 발표를 듣고 “사업도 좋고 사람(창업가)이 마음에 들어도 투자를 안 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당신 사업도 잘 모르겠고 심지어 여자라서, 결혼도 해서, 애를 낳을지도 모르는, 그런 리스크도 있는데 내가 왜 투자를 하겠냐”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창업자가 투자자에게 비즈니스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다만 결혼한 여성이 대표이고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리스크라고 말하는 건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한 성차별이다. 하지만 나는 김슬아 대표의 인터뷰를 보고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한 기관의 지원사업 심사를 받을 때 나 역시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여성 창업자 열에 여덟아홉은 한 번쯤 겪어본 일일 거다.

몇 해 전부터 젠더 관점의 투자(GLI:Gender Lens Investing)라는 말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 젠더 관점의 투자란, 투자자가 젠더 편향적 투자 관행을 인지하고 성평등적 관점에서 투자를 집행하는 것을 뜻한다. 2018년 스타트업 투자사 소풍벤처스가 낸 리포트 ‘젠더 안경을 쓰고 본 기울어진 투자 운동장’을 보면 “남성 중심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창업 생태계에 대한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젠더 편향적인 투자 생태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 투자자는 좁게는 지분투자나 대출투자, 재무적 훈련뿐만 아니라 넓게는 투자자와 창업가 사이의 힘의 역학관계, 사회적인 편견이 젠더 편향적으로 투자 프로세스에 작용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라고 말한다.

배제 집단 포함하면 모두가 이익

이 말의 배경은 이렇다. 직전 해인 2017년 하반기, 소풍벤처스 투자팀은 정기투자를 결정한 4개 팀 중 여성 창업 스타트업이 한 곳도 없고, 경영진에도 여성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더 스트리트(The Street)〉의 2017년 11월 보도에 의하면 미국 내 벤처 투자금 중 3%만이 여성 CEO가 있는 기업으로 흘러갔고, 여성 심사역은 전체의 6%로 나타났다”라며, 자신들의 투자 결정에도 젠더 편향이 있을 수 있다고 자각하게 된다. 이는 투자 프로세스의 전면 검토로 이어졌고, 모든 과정에 젠더 관점을 적용한 결과, 이듬해 소풍벤처스의 상반기 정기투자 최종 심의에 진출한 기업 중 여성 창업 스타트업이 42.9%를 차지했다.

이러한 젠더 관점의 투자 움직임이 스타트업 생태계 전반에 점차 확산되고 있을까? 〈스타트업레시피〉가 발행한 ‘투자 리포트 2021’에 따르면, 2021년 전체 투자 건수는 1272건이었는데 투자 유치에 성공한 여성 창업 스타트업은 9.5%(121곳)에 불과하다. 지난해 총투자금액 12조286억4000만원 중 여성 창업 스타트업이 유치한 투자금액은 9147억원으로 7.6%에 해당한다. 앞서 언급한 마켓컬리가 지난해 투자받은 4754억원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여성 창업자 비율이 점차 증가하고 몇몇 소수 기업이 대규모 투자에 성공하고 있는 흐름이 포착되지만, 이것만으로 전체 생태계가 성평등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내 벤처캐피털(VC) 업계의 여성 심사역은 7%밖에 안 된다.

2019년 5월16일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 우승 시상식을 하고 있는 에듀테크 스타트업 에누마의 이수인 대표(왼쪽 사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코이카 제공

이처럼 험준한 경영 환경에도 불구하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사회문제에 새로운 불빛을 비춰 전에 없던 비즈니스를 만들어온 여성 창업가들이 많다. 에듀테크 기업 ‘에누마’ 이수인 대표는 학교도 선생님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교육용 게임 ‘킷킷스쿨’을 만들었다. 이 게임은 2019년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가 후원하는 아동 교육 경진대회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에서 공동 우승했다. 에누마는 코로나19 여파로 등교가 힘들어진 개발도상국 아동들에게 킷킷스쿨 앱을 무료 배포했다. 2017년 생리대 발암물질 논란 이후, 유기농 생리대를 제작 판매해온 ‘해피문데이’ 김도진 대표는 호르몬 변화를 감지해 몸 상태를 진단하고 월경과 임신, 여성 질환 관련 콘텐츠를 제공하는 모바일 앱 ‘헤이문’을 개발했다. 여성의 건강권을 증진시키고, 여성 의료 분야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여성 대표’ ‘여성 창업자’ ‘여성 투자자’ 같은 말을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더 많아져야 한다. 여성 창업자들이 원하는 것은 배려가 아니다. 특정 성별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되거나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길 원한다. ‘배려하는 것’과 ‘차별을 시정하는 것’은 다르다.

스타트업은 미래 경제성장 동력이자 향후 가장 많은 일자리가 생겨날 분야다.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주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자리에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참여해야 한다. 게이츠재단의 멀린다 게이츠는 에세이 〈누구도 멈출 수 없다〉에서 “배제되어 있던 집단을 포함시킬 때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간다”라고 말했다. 더 많은 김슬아가, 이수인이, 스컬리가 나온다면, 기술과 혁신을 만드는 주체의 절반이 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 다채로워질까. 

기자명 김미진 (위커넥트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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