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7일 서울 여의도 여의나루역 앞에서 ‘대학 내 권력형 성범죄 해결을 위한 집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모든 성폭력 피해자가 형사절차를 거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수년에 걸쳐 경찰 조사, 검찰 조사, 그리고 원심 및 항소심 공판 과정을 밟기로 결정했다면, 그만큼 절실하게 배상과 회복을 원한다는 뜻일 것이다. 어떤 지난한 여정이 그들 앞에 놓여 있는지 모른 채로 결정했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그 절실함의 크기와 무관하게, 아니 오히려 너무나 간절히 법적 해결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사법제도에 의지할 수 없는 피해자도 적지 않다. 재원이 없어서, 인맥이 없어서, 혹은 우리 사회의 기울어진 인식론적 장 속에서 나의 위치가 어디쯤에 있는지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어떤 피해자들은 사법기관의 문을 두드렸다가,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더해가는 아픔을 견디지 못해 결국 스스로 돌아서기도 한다.

차기 대통령은 ‘개인별’ 사정에 맞춘 ‘공정한’ 법 집행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지만, 그의 협소한 경험치와 무관하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개인은 사회적 편견 및 고정관념과 연결된 어떤 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에 따라 차별적 대우를 받는다. 한편 법과 제도는 공평무사해야 옳겠지만 실제로는 오래된 인식론적 한계, 더 정확히 말하면 기득권의 인식론적 한계를 그대로 담고 있어서 이를 적극적으로 바꾸어 나가야만 한다. 예컨대 ‘강간과 추행의 죄’는 거의 50년 가까이 ‘정조에 관한 죄’라고 불렸다. 그 대상 역시 오랫동안 ‘부녀자’였다. ‘자신의 정조를 지키는 데 실패한 부녀자’로서 법정에 서는 것 자체로 이미 피해자는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물론 법을 실행하는 과정에서도 모든 이들이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는 보장은 없다. 제도의 힘을 대리하는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선택적 보호를 한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제정부터 실행에 이르기까지 우리도 모르게 사회문화적 편견을 작동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법의 제정과 실행을 담당하는 이들이 기득권 바깥의 삶을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을 때 더욱 그렇다.

사법제도는 치유와 회복을 돕지 않는다

예컨대 고용주에게 매일같이 “가벼운” 성희롱을 당하는 이주여성 노동자는 그의 고용주를 신고할 수 있을까? 참고로 몇 개월 전 헌법재판소는 이주노동자 고용허가제에 대해 합헌 판결을 내렸다. 다시 말해서 이주노동자는 원칙적으로 고용주의 허가 없이는 일터를 바꿀 수 없다. 성폭력은 예외 상황으로 간주되지만 피해 입증 책임은 이주노동자 본인에게 있다. 성희롱에 시달리는 여성 노동자에게 이주노동자 고용허가제는 어떤 직간접적 영향을 미칠까. 또한 유일하게 집을 방문해 자신을 돌봐주는 요양보호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70대 여성은 사법기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까? 불과 2년 전, 대한민국 법원은 성추행을 당한 67세 여성에 대해 “사회 경험이 풍부하므로 정신적 충격이나 성적 수치심이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라며 피고인의 손을 들어줬다. 대체 우리가 어느 정도로 ‘연륜’을 쌓게 되면 성폭력을 당해도 괜찮은 나이가 되는 걸까? 젊은 여성만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판결은 과연 누구의 입장과 해석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사실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사법처리 과정 그 자체가 인식론적 부정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 법정에서 인정되지 않을 뿐이다.

한 대학교수가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 ‘성폭력 사건’에 대한 글을 올렸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갈무리

물론 취약계층만 ‘공정한’ 법 집행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에 재직 중인 한 교수는 대학 당국과 학내 양성평등센터는 물론 동료 교수들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 채,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 실명으로 글을 올리는 가슴 아픈 선택을 했다. 그는 “여자로서 세상에 나 강간당했다고 말하는 것은 죽기보다 수치스러운 일입니다만, 용기를 내서 제 실명을 밝히고 공개합니다”라고 썼다.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절차적 부정의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의 끝자락에서, 사건을 덮으려는 대학 당국과 싸우며 홀로 국민청원을 해야 했을 정도로, 그 어떤 규정이나 절차도 피해자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대학교수라는 신분도 이미 기울어진 장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도와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라는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국가와 제도는 우리를 동등하게 보호하지 않는다. 젠더 폭력에 관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사법절차를 통해 (그나마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결과’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치유와 회복을 뒷받침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사법제도는 응보 정의(retributive justice)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애초에 회복 정의(restorative justice)를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이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가중되는 가해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형사절차가 진행되면서 오히려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가해의 양은 증가하며, 피해자는 반복적으로 새로운 트라우마를 얻게 된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피고인이 처벌을 면하기 위해 혐의를 부인하고 피해자를 공격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의 회복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피해가 계속 증가하는 요인은 이 외에도 매우 다양하다. 수사기관 혹은 법정에서 받게 되는 부적절한 질문, ‘피해자다움’에 대한 요구, 가해자의 협박이나 합의 종용, 그리고 공판 과정에서 등장하는 피고인 측의 무리한 변론 등 사법절차 과정에서 축적되는 가해의 양태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이들이 글을 쓰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문제를 지적해왔지만 오히려 폭력적인 피고인 변호의 관행은 ‘수익성 높은 비즈니스 모델’로 자리 잡으면서 날이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좀 더 직접적인 비판이 필요할 뿐 아니라 법조계의 자성과 양심선언이 요구된다.

사법제도의 한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형사절차는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의 반성과 회복도 어렵게 만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염두에 두지 않지만, 가해자 역시 회복과 치유의 대상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야만’이 아니라 ‘사회’라면 그가 반성과 학습을 거쳐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물론 그에 앞서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속죄하는 것이 최우선 조건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어서 가해자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는지 답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다시는 비슷한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실천이 따라온다면 그는 공동체에 재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불행히도 매우 드물고, 사법제도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가해자의 학습이나 교화도 불가능하다. 물론 한국에서도 성범죄자들에게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를 명하고 있지만, 2019년 국정감사 당시 금태섭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미이수자의 비율이 4년 동안 17.5배 증가했다. 결국 가해자들은 스스로 개선할 기회를 거부하거나, 혹은 그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이런 상태로 사회에 다시 돌아오면 가해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겠는가. 실제로 미이수자들의 재범률은 더 높다. 단지 형기만 채우는 것으로는 그 누구도 반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정 시설에서 사회와 단절된 채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피해자를 향한 복수심만 축적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사법제도는 공동체의 회복이나 질적 변화에도 기여하기 어렵다. 공동체로부터 가해자를 분리하는 방법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주요한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회복적 사법을 비롯한 최근의 여러 흐름에도 불구하고, 상처 입은 관계와 공동체를 치유하고 개선하는 것은 현재 시스템으로는 쉽지 않다. 물론 이는 사법제도의 몫이 아니기도 하다. 성폭력이 계속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문화적·구조적 요인을 발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결국 공동체 전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젠더 평등 교육을 대폭 수정·확대하고, 피해자 지원 시설을 확충하며, 범죄자의 재교육 역시 좀 더 중장기적 프로그램으로 바뀌어야 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어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확고한 신념과 의지가 필요하지만, 당분간 그런 추진력은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없을 것 같다.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우리 손으로 만들자

3월8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열린 2022년 세계 여성의날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피해자와 가해자의 치유와 회복을 돕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를 정의롭게 만드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몫이다. 물론 제도의 개혁은 필요하고 반드시 추진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만 의존할 수는 없으며 아래로부터의 변화와 풀뿌리 조직화가 함께할 때 비로소 진정한 공동체의 변혁이 가능하다. 특히 최근 발생한 일련의 권력형 성범죄 사건의 (미)해결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사회문화적 인식과 실천이 바뀌지 않으면 공동체 역시 가해자가 된다. 지난 수년간 한국 사회는 성폭력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데 반복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를 목도하는 피해자들에게 지속적인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겼다. 특히 권력형 성범죄 책임 주체의 대응, 주류 미디어의 보도 양태, 피해자를 상대로 한 음해와 조리돌림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수준의 사회적 가해를 보여줬다. 이런 환경 속에서 피해자 스스로 회복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힘겨운 일이다.

변혁 정의(transformative justice)는 미국의 네이티브 공동체와 사회활동가들이 중심축이 되어 발전시켜온 정치적 이론이자 실천이다. 큰 틀에서는 아래로부터의 권력화와 공동체 구축, 다시 말해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우리 손으로 만들자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변혁 정의론은 젠더 폭력을 근절하고자 애쓰는 피해 당사자들과 활동가들에 의해 가장 적극적으로 발전되어왔다. 법과 제도의 실패를 그 누구보다도 가깝게 경험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법과 제도가 끝내 우리를 보호하지 못하더라도 (혹은 오히려 우리에게 폭력을 가하더라도) 스스로 안전망을 꾸리고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공동체적 기반(infrastructure)과 문화를 만드는 것을 매일의 목표로 삼는다. 피해자, 가해자, 공동체를 뿌리부터 변화시키는 것을 비전으로 삼고 일상적 실천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지키고자 한다. 변혁 정의는 회복 정의와는 다르다. 회복 정의는 상처 입은 관계를 원래의 온전한 관계로 복구하는 것에 방점을 두지만, 변혁 정의는 그 상처를 가능하게 한 기존의 부정의한 조건을 바꿔내는 것에 중점을 둔다. 이전 상태로 되돌리자는 주장이 아니라 그 반대, 즉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젠더 폭력의 영역에서 변혁 정의는 매우 명확한 목표를 추구한다. 그것은 바로 젠더 폭력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가해와 상처를 입히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법적 절차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상처와 트라우마가 계속해서 증가한다. 변혁 정의론자들은 이 같은 상황을 방지할 수 있는 중재, 개입, 조정의 실천 양식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전파해왔다. 물론 쉽지 않은 길이다. 그러나 폭력으로부터 해방된 삶과 관계를 만드는 것은 제도적 강압과 처벌로는 가능하지 않다. 결국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책임의식과 참여가 필요하다. 폭력이 발생한 공동체가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치유와 회복의 수준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가해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우리 자신부터 변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기자명 김정희원 (애리조나 주립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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