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중국 공산당은 전근대적 문화를 몰아내고 공산주의 문화를 창출할 것을 천명했다. ‘문화대혁명’의 시작이었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적 경제와 맞지 않는 교육이나 문학·예술·과학 등은 부르주아에 부역하는 반동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학자와 교사, 의사 등 교육받은 엘리트는 쫓겨나 시골에서 육체노동에 종사해야 했다.

같은 시기 전쟁 중이던 베트남에서는 말라리아가 창궐했다. 베트남과 국경을 면하고 있던 중국 남부에서도 말라리아 환자들이 폭증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중국 대륙에서만 말라리아 감염자가 무려 4000만명에 달했다. 1967년 마오쩌둥은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연구자들이 쫓겨나거나 숙청된 가운데 중국 정부는 치료제 개발을 위해 연구자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과학자이자 네 살배기 딸을 둔 어머니였던 투유유도 그렇게 동원된 연구원 중 한 사람이었다.

투유유(屠呦呦)는 1930년 12월30일, 저장성 닝보에서 5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딸이 태어나자 〈시경〉 소아편 ‘녹명(鹿鳴)’의 “유유록명 식야지호(呦呦鹿鳴 食野之蒿)”라는 구절을 떠올렸다. 투유유의 이름은 “사슴이 기뻐하는 소리를 내며 들판의 다북쑥을 먹는다”라는 이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훗날 투유유는 개똥쑥에서 말라리아 치료제인 아르테미시닌(Artemisinin)을 추출해낸다. 아버지가 소중한 딸에게 지어준 이름이 마치 미래를 예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투유유는 3세기경의 문헌을 연구해 개똥쑥(왼쪽) 추출물로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했다. ⓒWikipedia

그는 1951년 베이징대 의과대학 약학과에 진학하고, 졸업 후에는 중국 중의과학원에 들어간다. 이곳에서 2년 반 동안 중국의 전통의학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한 뒤 중약연구소에 배치된다. 1959년부터 3년에 걸쳐 체계적으로 중의학을 공부하고 약재회사에서 약초들을 감별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1963년 투유유는 금속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소련으로 유학을 갔던 중학교 동창 리팅자오(李廷釗)와 결혼했다. 연구 외에는 많은 면에서 서투르던 투유유에게 가사에 능하고 침착한 리팅자오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연구를 응원해주는 사람이었다. 결혼하고도 연구를 계속하는 가운데 딸이 태어났다. 행복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길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며 공산당은 지식인을 강제로 시골 벽지로 보내는 하방운동을 전개했다. 리팅자오도 벽지로 끌려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투유유는 중의학연구소의 ‘523 임무’, 즉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 프로젝트의 리더로 임명되었다. 하방은 면했지만 네 살밖에 안 된 어린 딸을 보육원에 맡겨놓은 채 연구를 위해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하이난으로 떠나야 했다.

그 무렵 말라리아 환자를 치료하는 데는 주로 클로로퀸을 비롯한 합성 키니네(기니나무 껍질에서 얻는 알칼로이드)를 사용했다. 하지만 당시 베트남과 중국 남부에는 클로로퀸에 내성이 있는 말라리아가 유행했다. 새로운 약이 필요했다. 투유유는 중의학에서 학질(말라리아)을 치료해온 처방들 중에 해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투유유와 523팀은 중의학서는 물론, 황실의 병부들을 탐독하고 용하다는 중약사들의 처방과 구전으로 전해지는 민간요법까지 조사했다. 그렇게 2000개에 달하는 학질 관련 처방들을 모았다. 그는 이 처방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우선 640여 종의 한약재를 포함하는 항말라리아 처방을 정리하고 가능성을 좁혀나갔다.

523팀이 수집한 많은 학질 처방전에 청호(菁蒿), 즉 개똥쑥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실험을 시작했을 때 개똥쑥의 항말라리아 효과는 12%에 불과했다. 심지어 후추보다도 효과가 없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투유유는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러던 중 투유유는 3세기경 동진시대의 학자인 갈홍이 쓴 〈주후비급방〉에서, 개똥쑥을 찬물에 갈아 즙을 내서 쓰라는 말을 발견했다.

2011년 중국인 최초로 ‘래스커상’ 수상

투유유는 끓는점이 물보다 낮은 에테르를 사용해 성분을 추출했다. 이렇게 추출한 개똥쑥의 유효성분, 191번 샘플을 말라리아에 감염시킨 쥐와 원숭이에게 투여하자 확실한 약효를 보였다. 그는 이제 사람에게 이 성분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투여했다. 서른 시간 만에 열이 내리고 혈액 내 말라리아 원충들이 사라졌다. 이번에는 남편인 리팅자오가 실험에 도움이 되고 싶다며 나섰다. 효과가 있었다.

마침내 1972년 난징에서 열린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 프로젝트 실무회의에서 투유유는 개똥쑥 추출물의 약효를 소개했다. 이후 모든 연구자들이 개똥쑥 연구와 실험 검증에 매달린 끝에 1973년 말라리아에 효과가 있는 이 추출물을 ‘아르테미시닌’으로 명명했다.

2015년 12월10일 투유유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AP Photo

투유유는 약학과 중의학을 공부했지만 그에게는 박사학위도, 해외유학 경험도 없다. 중국 과학계 최고 권위자를 선발하는 원사 선거에 몇 번이나 나갔지만 매번 떨어졌다. 박사과정 지도교수가 된 것도 71세의 일이었다. 게다가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 프로젝트 당시 중국에서는 과학 논문 대부분이 개인의 이름으로 발표되지 않았으므로 아르테미시닌에 대한 그의 공헌은 523팀의 것이 되었다.

처음에 아르테미시닌을 독점하려 했던 중국 의학계는 1976년 무렵 서방국가에서 말라리아 신약 개발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에서 말라리아 신약이 개발되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아르테미시닌의 발명 과정과 화학구조를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것은 국가적인 영광이었지만 중국 의학계도, 투유유도 아르테미시닌의 지식재산권을 누릴 수는 없었다. 곧 서방국가에서 아르테미시닌의 구조를 이용해 만든 말라리아 약이 출시되어 시장을 선점했다.

하지만 투유유의 공헌이 그대로 잊힌 것은 아니었다. 2011년 그는 임상의학 분야 최고상인 래스커상을 중국인 최초로 수상했다. 2015년에는 치명적인 기생충 질병에 대한 혁신적인 치료법 개발을 한 공헌을 인정받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2017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은 투유유에게 중국 본토 과학계의 최고 영예인 국가최고과학기술상을 수여했다.

기자명 전혜진 (SF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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