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7일 우크라이나 서부 우즈호로드의 주민들이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도시를 지키기 위해 화염병을 만들고 있다. ⓒREUTERS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월24일 우크라이나 침공 작전을 시작하면서 러시아 방송을 통해 한 시간이 넘는 긴 연설을 했다.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답지 않게 감정이 많이 들어간 이 연설에서 푸틴은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겨냥한 말을 했다. 하나는 우크라이나에 대량살상무기(WMD)가 있을 수 있다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나토의 계속된 확장이 “러시아의 목에 겨눈 칼날”이라는 말이었다. 물론 1994년에 핵을 포기한 우크라이나가 WMD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푸틴이 모를 리 없다. 2003년에 미국이 있지도 않은 WMD를 구실로 이라크를 침공한 것을 빗댄 얘기였다. ‘너희도 이익을 위해 침략의 구실을 만들어내지 않느냐’는 게 푸틴이 하려던 말이다.

이라크 침공에 관해서는 미국 내에서도 꾸준히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던 반면, 나토의 확장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외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잘 아는 사람들은 냉전 후 일극 체제에 익숙해진 미국이 지나친 이상주의적 외교정책을 펴고 있다고 비판해왔다. 1990년 미국은 “소련(러시아)이 독일 통일에 협조를 해주면 나토는 동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라며 안심시켰는데, 나토와 미국은 그 약속을 어기고 (이에 대한 나토의 입장은 그런 내용을 담은 ‘서명한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꾸준히 확장해서 이제는 러시아와 접경한 우크라이나까지 가입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 나토 확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푸틴의 편이라기보다는 특정 세계관에 입각한 현실주의를 대변하는 학자나 전직 외교관들이다. 흔히 ‘현실정치(Realpolitik)’라 불리는 이들의 생각은 냉전시대 미국 외교를 대표하는 헨리 키신저의 사고방식이기도 하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힘의 논리에 기반한 사고다. 이들은 국제정치에서 강자가 약자를 집어삼키는 것을 옹호한다기보다는 양쪽의 힘이 어느 정도 균등할 때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현실적인 주장, 즉 ‘힘의 균형’ 이론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균형 자체가 불가능한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에서 힘의 균형 논리는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지난 20여 년간 외교의 일선에서 물러나는 듯했다. 힘의 균형 이론을 대표하는 시카고 대학 존 미어샤이머 교수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은 이제 워싱턴에서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점령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현실주의 외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핵을 가진 러시아를 지나치게 밀어붙이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며 지난 몇 년 동안 다시 목소리를 키워왔다. 그리고 지난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이상주의적 외교의 실패”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이상정치 vs 현실정치

소련 붕괴 이후 군사력보다는 경제력과 국가 간 조약에 의존하는 이상주의적 노선에 대한 비판은 나이 든 냉전시대의 학자들에게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2021년에는 미국의 보호 아래 이상주의를 체화하며 독일 밀레니얼 세대가 푸틴의 군사적 위협 앞에서 전략적 사고를 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한 30대 군사 분석가로부터 나와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시각은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푸틴의 위협이 현실화하고, 그 대응으로 독일이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을 국방에 투자하기로 하면서 더욱 힘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20세기 말에 끝난 줄 알았던 현실정치와 힘의 균형론은 다시 화려하게 귀환하는 걸까? 이상주의 정치는 일극 체제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한 걸까? 무엇보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는 그런 이상주의에 빠졌던 미국과 나토의 “실수”가 만들어낸 걸까?

이를 판단하기 전에 먼저 현실정치의 대척점에 있는 ‘이상정치(Idealpolitik)’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개별 국가의 이해관계보다 인권과 민주주의 같은 ‘이상’을 앞세우는 이상정치가 다소 낯설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를 교과서를 통해 배워왔다. 바로 삼일운동의 근간이 되었다고 하는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대표적인 이상정치의 사례다. 미국에서 윌슨주의(Wilsonianism)로 통하는 이 사상은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미국이 대부분 독재체제인 적대 국가를 상대로 사용하던 사상적 무기였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에 속한 미국이 ‘식민지에 남아 있을지, 독립할지는 그 나라 사람들이 결정해야 한다’라고 선언한 민족자결주의는 사실상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무늬만 이상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신음하던 한민족에게 미국의 진정한 의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현실에서 이상(ideal)은 북극성과 같은 존재다. 태평양 너머에서 윌슨이 한 말에 힘을 얻어 거리로 뛰쳐나온 조선 사람들에게 “그 이상이 정말로 이뤄질 것 같으냐” 하는 질문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온 세상을 나눠 가진 제국들의 압제하에서 숨이 막히고 앞날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의 운명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줄기 빛이고, 소중한 한 줌의 산소 같은 존재다.

미어샤이머를 비롯한 현실정치 옹호론자들은 나토가 2008년에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나토 가입을 지지한다고 밝히는 바람에 이들이 가입을 추진했고 그 결과 몇 달 뒤 조지아가 푸틴의 군대에 무참히 짓밟혔고, 이제는 우크라이나가 같은 운명에 처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절대 실현될 가망이 없는’ 희망을 준 미국과 나토 국가의 이상주의 정치인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이 그들의 비판이다.

우연히도 삼일절에 쓰게 되어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1919년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만세를 외치고, 그 결과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제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뉴스를 읽은 서구 열강의 학자와 외교 전문가들이 “윌슨 대통령이 실현 불가능한 이상주의를 늘어놓는 바람에 한반도에서 수천 명의 양민이 죽지 않았느냐”라고 비판하는 모습,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의 총칼을 무릅쓰고 거리에 나온 조선인들에게 소파에 앉아 이론을 늘어놓는 학자들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이상이 비현실적이었어도, 혹은 미국의 위선이었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의 시민군이 항전가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트위스티드 시스터스’의 노래 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 너희들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 1919년에 우리가 했던 말이다. 비록 해방을 맞기까지 우리는 다시 26년을 기다려야 했지만, 한민족은 결국 해방을 맞았다. 미국은 똑같은 경험을 1776년에 했다. 우크라이나는 그 순간을 지금 맞이한 것뿐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더 이상 푸틴의 압제를 참지 않기로 했다면, 그래서 목숨을 걸고 총을 들었다면 그들의 모습을 보고 “이번 사태는 저들에게 헛된 희망을 준 미국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비판으로 포장된 전형적인 제국주의적인 태도다. 민족의 자기 결정권을 무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기자명 박상현 (오터레터 발행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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