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여행을 즐기는 편이 아닌데 요즘은 떠나고 싶다. 여기 말고 다른 어디로 가고 싶다. 코로나 탓이라 해두자. 어쩌면 서둘러 봄을 타는지도. 아무튼 새들도 세상을 뜨는데 나는 그럴 수 없으니 텔레비전으로 대신한다. 직접 가도 보기 힘든 비경이 감탄스럽다. 하지만 그때뿐, 때깔 고운 화면으론 성이 안 찬다. 마음 깊이 다른 세상의 기운을 불어넣어줄 이야기가 필요하다. 여행의 욕구를 부추기는 멋진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자리를 통째로 옮겨놓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카렌 블릭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오래전 영화를 봤을 때부터 독서 목록에 올려둔 책이다. 그러나 아프리카를 식민화한 유럽 백인의 시선으로 아프리카를 읽는 게 내키지 않았다. 한데 이즈음 그 책이 자꾸 떠올랐다. 망설이다 그가 이자크 디네센이란 필명으로 쓴 소설집 〈바베트의 만찬〉을 먼저 읽었다. 작가의 자질을 떠본 셈인데 읽어보니 결례도 그런 결례가 없었다.

중단편 다섯 편이 실린 〈바베트의 만찬〉은 그가 얼마나 유려한 이야기꾼이며 얼마나 진지한 예술가인지 보여준다. 예술이란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는지 깊이 천착한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자작나무 숲을 떠도는 여행자가 된 것 같았다. 이런 소설을 쓰는 작가의 글이라면 무엇이든 읽고 싶었다.

덴마크에서 나고 자란 카렌 블릭센은 1913년 남편과 케냐로 이주해 커피 농장을 차렸다. 이혼하고 홀로 농장을 경영하던 그는 1931년 사랑하는 사람과 농장을 모두 잃은 뒤 고국으로 돌아갔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첫 작품집 〈일곱 개의 고딕 이야기〉부터 작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은 그는, 1937년 17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을 그린 회고록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생생하면서도 담백하고 비극적이면서도 유머가 번뜩이는 그의 문장은 두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를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함께 후보에 올랐던 헤밍웨이는 수상 소감에서 이 상은 그가 받아야 한다고 했다. 헤밍웨이는 쓸데없는 수사를 쓰는 법이 없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보여주는 진경

〈아웃 오브 아프리카〉
카렌 블릭센 지음
민승남 옮김
열린책들 펴냄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말을 타고, 총을 쏘고, 진실을 말하다”라는 제사로 시작한다. 처음엔 감감했다. 하지만 긴 독서 끝에 다시 이 문장을 마주하자 쉼표마다 가슴 죄는 설렘과 회한이 느껴진다. 아득하다. 어쩌면 삶이란, 아주 잘 살아낸 삶이란 이 한 줄로 갈음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나는 아직 삶을 다 살지도, 제대로 살지도 못했기에 이것은 그저 추측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이런 생각이 든다.

책의 첫머리에서 카렌 블릭센은 케냐의 은공 고원에 자리한 농장 풍경을 짧게 묘사한 뒤 이렇게 말한다. “여기 내가 있다. 내가 있어야만 하는 곳에.” 어떤 장소에 대해 나는 이런 확신을 가진 적이 없다. 아프리카가 아니라 세상 그 어느 천국 같은 곳이라 해도 나는 이런 마음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천혜의 장소가 주는 선물이 아니라 내부에서 비롯한 확신이므로. 자신이 만난 모든 존재를 인정하는 편견 없는 마음에서 비롯한 확신.

여행기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나는 거기서 인생의 나침반을 보고 있었다. 책에는 수많은 죽음과 상실이 적혀 있지만 그걸 쓴 문장에 슬픔이나 아픔이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 남편에게서 매독이란 병을 얻고, 사랑하는 이를 사고로 잃고, 공들여 일군 농장이 가뭄과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무너지고, 끝내 운명이라 여겼던 땅에서마저 떠나야 했던 사람이 그 모든 시간을 슬픔이 아닌 말들로 회고한다. 책을 읽기 전엔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이젠 이런 힘이 사람에게 있음을 믿는다. 카렌 블릭센이 증거이니, 그 사람됨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 해 오두막 여러 채가 무너질 만큼 큰 지진이 일어났다. 첫 번째 진동이 일어났을 때 카렌은 표범이 지붕에 올라갔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진동에 “나는 죽는구나” 했던 그는 뒤늦게 지진임을 깨닫는다. 세 번째 진동이 찾아온다. 그는 평생 맛보지 못한 “압도적인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천체의 운동법칙을 발견하고 황홀경을 느꼈던 케플러를 떠올린다. “케플러와 내가 느낀 엄청난 환희는 움직일 수 없는 줄 알았던 물체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지녔음을 깨달은 데서 비롯되었다. 죽은 흙덩어리에 불과한 줄 알았던 지구가 내 발 아래서 떨치고 일어나 기지개를 켠 것이다. 그건 자연이 보낸 작은 제스처였지만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자연은 한바탕 웃음으로 외쳤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삶을 뒤흔드는 지진 앞에서 자기 존재가 아닌 자연의 필연을 떠올리는 담대한 시선. 그는 이 시선으로 자신의 불행을 바라본다. 연이은 상실에 무너질 것 같은 순간, 그도 많은 이들이 그랬듯 불행의 의미를 묻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그리고 그는 답을 얻는다.

응답은 이러했다. 어느 날 그의 눈앞에서, 카멜레온을 발견한 수탉이 순식간에 카멜레온의 혀를 쪼아 먹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는 돌로 카멜레온을 내리친다. 카멜레온은 혀 없이는 살 수 없기에. 며칠간 자신이 본 충격적인 장면의 의미를 헤아리다 마침내 그는 깨닫는다. ‘신은 자신보다 더 자신의 존엄을 지켜주었으며 진실을 알려달라는 탄원에 큰 웃음으로 답했다’는 것을. 비로소 그는 카멜레온을 고통 속에 서서히 죽지 않도록 해줄 수 있어 너무나 기뻤다고 말한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가혹한 생사의 필연조차 웃으며 받아들이는 삶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보여주는 이 진경, 내가 다시 봄꿈을 꾸는 이유다.

기자명 김이경(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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