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패션 웹진 의 대니얼라 로프터스 대표. 자신의 사진에 가상의류 그래픽을 합성했다. ⓒ 웹사이트 갈무리

‘가상의류’가 뜬다. 말 그대로 볼 수 없는 옷, 실재하지 않는 옷이다. 온라인 메타버스(가상세계) 서비스의 아바타 의상이나 합성된 사진 파일로만 존재한다. 입을 수도 없는 옷을 원하는 이들은 점차 늘어가고 유수의 기업들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뛰어들고 있다.

가상의류를 주도하는 것은 주로 명품 패션 브랜드이다. ‘제페토’ ‘로블록스’ 등 메타버스에서 자사 브랜드명을 새긴 상품을 적극적으로 팔고 있다. 이용자들은 자신의 아바타에 입힐 용도로 이 명품 옷을 구입한다. 특히 적극적으로 나서는 브랜드가 구찌다. 메타버스 내에 ‘구찌스토어’를 내고, 실제 자사 제품을 본뜬 옷·신발·가방 따위를 판매한다. 나이키는 최근 가상의류 전문 플랫폼 ‘RTFKT’를 인수했다. 여러 아티스트들이 만든 3D 가상 운동화, 패션 아이템을 판매하는 곳이다. 랄프로렌, 루이비통, 발렌시아가 등 널리 알려진 패션 브랜드들은 앞다투어 가상의류 시장에 참전하는 모양새다.

글로벌 대기업이 자본으로 밀어붙이는 억지 유행 아닐까? 시장은 아직 걸음마 단계이지만, 일찌감치 평가절하하기에는 조짐이 나쁘지 않다. 지난해 일화가 있다. 구찌는 메타버스 서비스 로블록스에 ‘퀸 비 디오니소스’라는 가방을 판매했다. 브랜드 특유의 무늬 위에 벌 모양이 박힌 가방이다. 로블록스 내 공식 판매가는 5.5달러(약 6500원). 구찌는 이 가방을 한정판으로 팔았다(이 ‘물건’이 실은 ‘무한히’ 복제 가능한 디지털 데이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모순적인 일이다). 사건이 입길에 오른 것은 사람들이 가방을 리셀(재판매)하면서다. 중고시장 역할을 하는 온라인 앱스토어에서 한정판 가상 구찌 가방은 4115달러(약 500만원)에 팔렸다. 판매가의 800배에 달한다. 가상 가방의 모델이 된 ‘실제’ 가방 가격보다도 80만원 비싼 값이다.

사실 ‘가상현실의 아바타에게 옷을 사 입히는 것’ 자체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게임 분야에는 이런 매매가 흔히 이뤄진다. 수십 년 전부터 MMORPG(여러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해 함께 즐기는 온라인 게임) 게이머들은 아바타가 착용할 아이템을 사고팔았다. 현실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않는 아이템에 현금을 쏟아붓기도 했다. 구찌 가방처럼, 게임사가 판매하는 가격보다 훨씬 비싼 값에 아이템이 매매되기도 한다.

그런데 가상의류 가운데에는 예의 ‘아바타 옷’과 좀 다른 유형도 있다. 메타버스 속 아바타가 아니라 실제 본인의 사진에 가상의 옷을 합성하는 것이다. 사진이 아니라 짧은 영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왜 이런 일을 할까? 대니얼라 로프터스는 자신이 설립한 디지털 패션 웹진 〈TODNE〉에 쓴 글에서, 가상 패션 소비자를 두 군으로 나눴다. 우선 명품을 원하지만 그 가격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로프터스는 “가상의류는 소비를 민주화할 수 있다. 명품 휴대전화 케이스 대신 럭셔리 가상의류를 싼값에 구매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두 번째 부류는 가상의류를 ‘대체재’로 보지 않는다. 불타는 신발이나 자체 발광하는 드레스처럼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패션을 원하는 사람들이 여기 속한다. 타인의 시선은 물론 물리법칙도 무시한 채, 사용자의 취향을 100% 반영하는 패션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옷으로 재력을 과시하는 것도, 독특한 감각을 드러내는 것도 이를 관찰해줄 타인이 있어야 성립한다. 입고 나갈 수 없는 가상의류가 이 기능을 할 수 있을까? 로프터스는 ‘SNS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SNS 이용자들이 옷을 ‘입고 있는’ 사진을 보는 것으로 이 합성 서비스는 그 값어치를 한다는 것이다.

가상의류 합성 서비스는 지난해부터 점차 늘고 있다. 국내 업체들도 조금씩 관심을 보인다. 롯데홈쇼핑은 지난 1월 응모를 받아 가상의류 합성 서비스를 시험 진행했다. 이 업체는 2월10일 가상의류 브랜드 ‘LOV-F’를 만든다고 밝혔다. 롯데홈쇼핑은 가상의류 분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려는 업체 중 하나다. 보도자료에서 LOV-F 코트를 입은 ‘버추얼 인플루언서’ 루시의 사진을 내보냈다. 루시는 롯데홈쇼핑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다.

“우리는 꿈을 파는 산업에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역시 가상의류 관련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2월10일 문승욱 산자부 장관은 패션계, IT계, 연예기획사 대표들을 모아 ‘섬유 패션의 디지털 전환 전략’을 발표했다. 디자이너와 유명인이 협업해 가상의류를 제작하고 NFT를 적용해 판매하는 프로젝트를 지원한다. 올 하반기에는 ‘K패션 오디션’ 수상작을 가상의류로 만들어 메타버스에 팔 예정이다. ‘메타패션 클러스터’도 조성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가상의류 제작과 전시 모두 가능한 공간이다. 창작과 창업은 클러스터 내 ‘플레이그라운드’에서 하고, 가상의류 패션쇼를 홀로그램 스튜디오에서 한다.

입지나 협업 업체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산자부 관계자는 “협업 업체, 유관 지자체와 논의 중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예산을 들여 가상의류를 지원해야 하는 까닭이 있는지 물었다. 이 관계자는 “미래의 경제성이 높지만 리스크도 큰 새 시장이기에, 물꼬를 트는 데에 도움을 주려 한다. 대기업뿐만 아니라 자본이 적어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영세한 디자이너들도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산자부는 2월10일 보도자료에서 이 프로젝트를 ‘메타버스 금맥 캐기’라고 불렀다. 가상의류를 통해 “글로벌 브랜드 창출과 청년이 선호하는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품 브랜드 외의 가상의류가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SNS와 비대면 활성화가 기존 유명 브랜드의 입지만 더 공고하게 바꿀 가능성도 있다. 가상의류는 착용감, 질감, 품질에 차이가 없다. 남는 것은 이름값뿐이다. 명품 브랜드로서는 최고급 가죽을 구하고 장인을 고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다. 지난 1월17일 파트리스 루베 랄프로렌 CEO는 자사의 메타버스 진출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메타버스와 랄프로렌의 비전은 유사점이 많다. 우리는 패션 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꿈을 파는 산업에 있다.”

늘 그래왔듯 패션업계는 새로운 유행에 대처하느라 분주하지만, 일반인의 눈앞에 ‘패션 혁명’이 닥친 것은 아니다. 가상의류가 단기간 내에 옷을 대체하리라고 믿는 이는 없다. 코로나19 매출 타격을 극복하고자 하는 업계의 기획 파생상품으로만 기록될 가능성도 있다. 4115달러짜리 아바타용 구찌 가방과 가상의류 사진 합성 서비스는 다만, 두 가지 부수적 진실을 드러낸다. 첫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옷의 품질이 아닌 브랜드 이름만으로도 돈을 지불할 의사가 있다. 둘째, SNS는 우리 생각 이상으로 사교 생활의 많은 부분을 대체해가고 있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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